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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장
32장
33장
34장
35장
31장
화끈하게 대선 지원 자금을 풀었더니 진드기가 들러붙었다.
- 아! 자네만 지지를 표시해 주면 미주리가 넘어온다니까. 공장을 지으면서 자네가 고용한 노동자가 몇인가!
“저는 외국인이지 않습니까. 함부로 한쪽 편을 들어 지지 의사를 표시하기 힘듭니다. 표시한다고 해도 역효과가 날 겁니다.”
슬쩍 발을 뺐다.
- 누가 공개적으로 지지를 해 달라고 했나. 은근슬쩍 파티장에 나가서 말만 흘려도 미주리가 넘어온다니까. 화끈하게 자금 지원을 해 주면서 더 쉬운 걸 못 해 준다니 말이 되나.
소위 말하는 여론의 향배를 알 수 없는 스윙보트를 쥔 주중에 하나가 미주리였다.
전체 대의원 가운데 10석을 가진 미주리가 넘어오면 박빙인 대선 판도에 커다란 흐름을 바꿀 수가 있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의 지지 세력이 강한 지역이 하나가 민주당으로 넘어오는 것이다.
캐리의 애가 닳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미적거리자 텍사스까지 찾아오겠다는 걸 휴가 중이란 핑계로 억지로 막았다.
초반에 승부가 가려지는 것 같아서인지 애를 먹었던 선거 자금 모금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나중에 캐리의 손을 들어주겠지만 당분간은 튕겨야 값이 올라간다.
한참 동안 들러붙는 진드기를 떼어 내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전화 통화를 끝내자 조용히 듣고 있던 제이미가 물었다.
“누구야?”
“캐리 상원 의원.”
“전화 내용을 들어보니까 어지간히 급한가 보네.”
“마음이 급하기는 하겠지. 까마득하게 멀어졌던 대통령 자리가 눈앞까지 다가왔으니까.”
내 말에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도 하겠다. 나도 여론 조사에서 부시가 너무 앞서나가면서 이번 대선은 포기했거든.”
제이미의 정치 성향은 민주당 쪽이었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강한 할리우드에는 보수 세력인 공화당보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번 승부를 걸어 볼만 하니까 급해졌나 보지.”
이라크 전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쟁점으로 불이 붙으니까 좀처럼 꺼질 줄 몰랐다.
“이라크가 그렇게 심각할 줄은 나도 몰랐는데. 전비가 그렇게 많이 들어간다는 게 사실일까?”
제이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름 깨어있다고 자부하는 제이미도 외국 사정에 신경 쓰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방송에서 크게 떠들지 않으면 관심 없다는 게 옳은 말이겠지만.
“왜 믿어지지 않아?”
“그게 사실이면 부시가 제정신이야? 내가 내는 세금 가지고 남의 나라 가서 돈을 허공에 뿌리는 거잖아. 다들 손해를 보는데 어째서 거길 쳐들어간 거야.”
사람들은 남이 피를 흘리는 것보다 자기 돈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걸 더 질색한다.
“모두가 손해를 보는 건 아니지 방위 산업체들과 석유 회사들, PMC들은 떼돈을 벌고 있잖아.”
“그게 뭐야, 세 곳 모두 공화당을 지지하는 세력이잖아.”
그동안 자금 사정이 좋지 못해 휘청거리던 방위 산업체들은 전쟁이 터지면서 급격하게 실적이 오르고 있었다. 남부 유전 지대에서 신나게 석유를 퍼 올리는 석유 기업들도 신나기는 마찬가지.
부시 행정부가 억지로 큰 전쟁을 벌이려고 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새롭게 각광 받는 업종인 PMC이었다.
이쪽은 하나같이 체니 부통령의 손길이 닿은 회사들이 성업 중이었다.
나쁘게 볼일은 아니었다. 그들이 정치를 하는 이유는 자기 지지 세력의 이익을 위해서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걸 욕할 건 아니지. 미국 국민이 대통령을 그런 사람으로 뽑았잖아.”
내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 몰라도 제이미가 입을 내밀었다.
팩하고 토라져서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는 거야?”
“보면 볼라! 말 타러 가!”
그제야 입고 있는 복장이 말을 타러 갈 때의 것이었다.
텍사스 목장에서 키우는 말들은 대부분 좋은 품종의 말이 아니었다. 드넓은 목장에서 소를 키우기 위해서는 빠른 기동력이 필요했다.
목동 대장 오말리가 가져다 준 세 마리 말은 하나같이 순해서 타기가 편했다.
처음에는 이런 걸 뭐 하러 타나 싶었지만 몇 번 타보니까 시간을 보내기 좋았다. 워낙 시골 동네라서 할 게 없었다.
그래서 영화 감상의 삼매경에서 빠져나온 제이미는 말을 타고 목장 주변을 돌아보는 것에 맛을 들였다.
제이미의 뒤를 쫄래쫄래 쫒아갔다.
말을 타고 둘러보는 목장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새로웠다. 낮은 관목들과 듬성듬성 자란 잡초들, 한눈에 봐도 메마른 대지에서도 생명은 어김없이 경이로운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남았다.
개울가를 찾아서 이른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제이미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길게 자리를 비워도 돼?”
길어지는 텍사스 체류를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회사를 걱정한다고? 바쁜 일은 없을 테니까 김 실장이 잘 처리하겠지.”
“WD는 다른 회사하고 많이 다른가 봐?”
“날마다 출근하고 그러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아서 처음부터 경영자에게 전권을 위임했어.”
비싼 연봉 주면서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는 이유는 맡긴 일을 잘 처리하라고 주는 것이다.
소소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진짜 중요한 일들은 매일 보고를 받고 있었다.
오히려 내게는 여기서는 일상인 대면 보고란 게 익숙한 일이 아니다.
드넓은 우주에서 직접 만나서 보고를 하겠다는 놈이 있으면 제정신이 아닌 놈이다.
“솔직히 말해봐. 느닷없이 텍사스로 온 이유가 뭐야? 진짜 휴가 아니지?”
제이미도 영 눈치가 꽝인 여자가 아니었다. 이렇게 산책을 핑계로 밖으로 나온 김에 중요한 일을 물어봤다.
“갑자기 주변에 감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감시!”
“그냥 파파라치 같은 거라고 생각해.”
“정부 기관에서 널 감시한다고? 왜?”
쓰게 웃었다.
“미국 정부에서 봤을 때도 내가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니까.”
“잘난 척은. 어쩐지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뭐가 이상해?”
“전화를 할 때마다 누가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단 말이야.”
“그래? 이제 봤더니 감각이 예민하구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이미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거 불법 아니야. 엄연히 사생활 보호라는 게 있는데.”
“애국법이 통과된 다음부터는 개인의 통신을 감청해도 이젠 불법이 아니야.
“으으으, 그놈의 애국법!”
911의 충격이 가라앉기도 전에 의회를 통과한 애국법은 개인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침해했다.
테러를 방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지금처럼 악용될 여지도 많았다.
제이미가 옆에서 부시 행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종알거렸다.
그렇게 제이미가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까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신호가 보였다.
낮에는 목장 주변이 무더웠지만 저녁이 되자 그래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서 살만했다.
준비한 테이블 위로 적당하게 익힌 스테이크가 올라왔다.
두꺼운 두께의 스테이크를 잘라서 입으로 가져가니 맛이 일품이었다. 소스를 발라서 부지런히 입으로 가져갔다.
저녁 식사는 목동 대장인 오말리 가족을 초대해서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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