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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1장


온통 붉은 꽃만이 가득한 공간.
에브니스는 그곳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
피를 닮은 색의 꽃이 들판에 흐드러지게 피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물었다.
의식이 시작하기 전에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의 쓰임새는 후작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초대 용사의 부활을 위해 쓰일 제물에 불과했다.
대단한 재능을 타고났기에 오히려 대체품으로 선택받았다.
소후작이든 아니든 그 자리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거다.
그리 생각하니 에브니스는 모든 게 어찌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그리고 자기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도.
가만히 손을 펼쳐 보였으나, 빛의 마력은 그녀의 의지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아하하…….”
메마른 웃음이었다.
저항도 해 봤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 꺼냈다.
하지만 닿을 수도 없었다. 그 편린에 감히 다가갈 수도 없었다.
마력으로 빚어 만든 신성검은 초대 용사의 검 앞에서 부러졌다.
근력은 이쪽이 뛰어났으나, 기교에서 형편없이 밀려 버렸다.
“……부족했네요. 나도, 그리고 당신도.”
알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뒤따라왔고……. 정신을 잃고 쓰러진 자신을 구하기 위해 직접 초대 용사와 싸운 것까지.
기절했지만 의식은 살아 있었으니까, 들려오는 소리로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결국엔 ‘싸움’에선 승리했지만, 그는 ‘의식’을 막을 수 없었다.
……아드리안.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명이 된다.
어째서 갑자기 망나니 연기를 한 건지.
자신과 거리를 두고, 모르는 사람인 척 굴고. 끝내는 자신이 그를 적대하게까지 만들었다.
자기를 상처입히며까지 후작의 계획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준비했던 모든 일은 실패했고, ‘영혼’이라 추정되는 지금의 자신은, 본래의 육체에서 튕겨 나와 어딘지도 모를 장소에 와 있다.
에브니스는 고개를 들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아무런 소리도 없는 곳이었다.
바람이 불긴 하지만 바람 소리가 없다.
붉은 꽃들이 흔들리고 구름이 흘러가지만, 벌레의 소음이나 풀이 스치는 소리까지 들리지 않는다.
꽃밭의 저 멀리.
흐린 안개에 뒤덮인 숲이 보였다.
아마 저곳으로 가면 모든 게 끝날 것이다.
이곳은 그저 입구일 뿐이고, 저곳을 넘어가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겠지.
그렇다 해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법 또한 몰랐다.
저쪽 세상과 세상의 입구.
에브니스는 그곳에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닌 채로 떨어진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자욱한 안개의 숲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손짓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리 와.’
‘어차피 여기서 돌아가 봤자 널 사랑해 주는 사람 따윈 없어. 애초에 돌아갈 수는 있어?’
‘네가 레펠하이트 가문에 입양된 이유는 오직 제물이 되기 위해서야.’

귓가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라면 에브니스 역시 가볍게 무시했을 목소리였다.
하나, 그 말은 비수가 되어 강한 척을 하고 살아야 했던 연약한 열여덟 소녀의 마음을 찢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어차피 넌 필요도 쓸모도 없던 거야. 레펠하이트 소후작이란 지위도 그냥 허울 좋은 낚시 미끼였을 뿐이라고.’
“……응.”
‘이리 와.’
‘우리랑 행복해지자.’

……내가 그쪽으로 가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어?

‘그럼.’
‘여기는 너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여기선 정말로 소후작이 될 수도 있다고?’
‘너를 아끼는 진짜 가족도 만날 수 있어.’

진짜 가족.
소후작.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
에브니스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선 걸었다.
목소리가 부르는 소리는 점차 강해졌다.
이젠 아예 환영이 보이는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웃으면서 손짓하고 있었다.
그래, 저기로 가면.
저 너머로 건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는…….
그때.

“내가 분명히 꿈에서 잘 부탁한다고 그리 말했던 것 같은데. 결국엔 내가 직접 나서게 만드는군.”

에브니스는 뒤를 돌아봤다.
듣기만 해도 심사가 뒤틀릴 것 같은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녀의 등 뒤에는 반투명한 모습의 그가 서 있었다.
“……아드리안?”
교복 차림.
“음.”
“다, 당신이 여기에 왜 있어요? 당신도 죽었어요?”
“설명하긴 조금 복잡하겠구나. 아무튼…….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에브니스, 내 동생.”

* * *

눈앞에서 검이 휘둘러진다.
백스텝을 밟으며 빠르게 회피했음에도 참격이 허공을 부수며 날아왔다.
카가가강!
바람의 검과 화신검을 교차해 막아 냈음에도 손바닥이 얼얼했다.
“씁…….”
아예 살갗이 통째로 뜯어진 듯한 고통이었다.
원래도 신의 근력에 비견되는 재능인 몸뚱이에, 초대 용사의 영혼이 들어가면서 근력 그 자체가 초월을 넘어선 것이다.
레펠하이트는 스스로 검을 휘두른 뒤에도 고개를 갸웃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이 몸은 아주 신기하군. 보폭도, 근육도 움직임도 전부 어색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나와 파장이 일치해.”
그냥 검이 아니다. 에브니스의 몸을 차지한 초대 용사 레펠하이트는 ‘신성검’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전의 ‘후작’의 육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에브니스의 근력을 담아 휘두르는 검을 막는 데 모든 전력을 다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튼 그 여파일까.
주머니에 넣었던 사진이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건?”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그것이 사진인 것을 깨닫고서 관심을 껐다.
나 역시 떨어진 사진 따위에 신경을 기울일 때가 아니었다.
신성검을 두 손으로 움켜쥔 레펠하이트가 땅을 박차고 내게 달려들려고 했던 때였다.
─파앗!
별안간 사진에서 빛이 뿜어졌다.
레펠하이트는 그것이 내가 준비한 어떤 마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즉시 크게 뛰어 사진에서 멀어졌지만, 나도 왜 사진이 빛을 발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이어, 나는 사진에서 발하고 있는 마력이 ‘나’…… 그러니까 ‘아드리안’의 마력과 놀랍도록 비슷하다고 느꼈다.
마력은 이전에 내가 캐릭터…… 아니, 사람의 ‘의지’라고 했었다.
그만큼 겉은 똑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동시에.

─나는 실패했다. 아니, 이미 대충 실패하리라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네게 뒤를 맡기기로 했다.
‘누구 맘대로 그걸 막 맡기겠단 거냐?’
─너라면 할 수 있지 않겠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에 기억 하나가 단발적으로 스쳤다.
나무, 그리고 들판.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저 말을 마지막으로 웃으며 ‘놈’ 아니, ‘아드리안’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