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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1장


밀리제는 생각했다.
최근, 자신은 지나칠 정도로 분량이 없지 않나?
전해 듣기로, 아드리안 선배님께선 스노화이트 선배님과 함께 탐험을 나가 던전 공략을 하거나, 약혼자인 볼프강 선배님과는 자주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하신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최근에는 황녀 리제릴리아스 전하의 측근이 되셨고, 유일한 ‘엘프’의 후손이라는 렐브리안 선배와 친분을 쌓았다.
그렇다.
그 모든 부분에서 밀리제는 느꼈다.
‘전부 다 여자!’
물론 스노화이트 선배님은 여자가 아니지만, 묘하게 여성스러운 점도 있고, 아니, 그걸 제하고도 남녀 성비가 지나칠 정도로 한쪽에 쏠려 있지 않나!
거기다 하나같이 평범한 자신과는 다르게 매력이 넘쳐 나는 사람들이니, 밀리제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체육대제에서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뭔가 제대로 된 일도 하지 못했어.’
이대로면…….
‘선배님의 곁에 설 수가 없어……!’
밀리제 헤일로는 순수한 소녀다.
선배님께서 그 거대한 라이칸슬로프와 혼자 맞서 싸울 때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아직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동경하는 사람의 옆에 서고 싶다. 그분의 뒤를 따라가고 싶다.
그런 순수하기 짝이 없는 감정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참 바보 같은 언니.]
“네로?”
[왜 못 깨닫는 거예요? 하 이것 참……. 인간도 아닌 제가 언니보다 ‘감정’을 더 잘 알겠어요.]
방구석에서 앞발로 세수하는 슬라임 고양이의 이름은 네로.
전(前) 어둠의 정령이자, 아드리안 선배님의 말로는 멜우드 선배님을 조종해 공격하게 만든 흑막.
하지만 지금은 밀리제 자신과 강제 계약한 정령이고, 밀리제의 명령 외에는 그 어떠한 나쁜 짓도 할 수가 없다.
계약의 조건이 어떻게 된 것인지 밀리제도 잘 모른다. ‘네로’가 밀리제를 마주한 순간 ‘밀리제’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계약, 아니, ‘금제’를 스스로 걸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네로’는 밀리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난, 네로,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왜요.]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2인용 기숙사지만, 혼자 있는 건 쓸쓸하거든. 에헤헤…….”
[어휴, 진짜 바보 같아.]
새까만 슬라임 고양이는 후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틀고 제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언니, 친구라도 만드는 게 어때요?]
“친구?”
[네, 친구요. 웃으면서 함께 지낼 수 있는 친구.]
친구라.
“나는 아드리안 선배님의…….”
[그 빌어먹을 레펠하이트는 언니를 그냥 착한 후배 1로 보고 있다니까요! 언니의 인생을 그 빌어 처먹을 레펠하이트한테 다 걸어 버릴 생각이에요? 거기에 언니의 인생은 어디에 있죠?]
밀리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로, 지금 나 걱정해 준 거야?”
[흥, 언니가 그렇게 침울하게 있으면 간식도 제대로 안 나오잖아요.]
“알고 있어.”
밀리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렇게 평범한데? 내가 친구를 어떻게 만들어? 룸메이트도 또 그런 사고가 터질까 봐 무섭다면서 나가 버렸는데.”
[어휴 진짜 이 화상…….]
고양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앞발 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언니, 이대로면 따라갈 수도 없는 거 알아요?]
“뭘?”
[지금의 언니는 너무 ‘평범’해요. 이대로면 뒤처지고 말 거에요. 그 빌어먹을 레펠하이트는 저 멀리 앞서 나가는데, 언니 혼자 전전긍긍하면서 뒤를 겨우 쫓아갈 건가요?]
“……맞아.”
생각해 보면 그렇다.
자신은 너무나도 특색이 없다. 평범하다.
성적이야 중간고사가 끝나고 이제 중상위권에 들어간 것 같지만, 아드리안 선배나 레이나 선배 같은 사람들을 따라가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일단 나가서 돌아다니기라도 해 봐요. 운이 좋다면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응……, 네 말이 맞아, 네로.”
지금 이곳에서 푸념이나 늘어놓으며 앉아 있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선배님을 위해서,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일단 밖에 나가서 뭐라도 해야 한다.
던전을 찾아 홀로 공략하든, 가까운 필드로 혼자 조심스레 나가보든.
의외로 방법은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좋아. 결정했어, 서쪽 숲으로 가 보자.”
소녀는 교복으로 갈아입은 뒤, 슬라임 고양이를 어깨에 올리고, 당당한 걸음으로 기숙사를 나섰다.
그렇게.
서쪽 숲으로 통하는 출구 앞에 도착한 밀리제는 숨을 삼켰다.
선배님과 한 번 와 본 곳, 그러나 그때는 선배님의 뒤를 따라간 것 뿐이기에 자신이 직접 발을 들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억하는 것도 별로 없다. 그냥 앞서가던 등만 쳐다보며 걸었으니까.
하지만 아드리안 선배가 해 준 말은 기억하고 있다.
‘초입에는 다람쥐나 토끼들만 나오지만, 깊숙이 들어가면 슬라임과 고블린이 튀어나온다고 했지.’
각오는 되었다.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싶다. 어디가 부족한지 알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왔으니까.
한 걸음, 또 한 걸음. 서문을 지나 넓게 펼쳐진 숲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순간.
[언니, 저게…… 뭐죠?]
“그러게, ……저게 뭐지?”
둘은 기묘하기 짝이 없는 것을 보았다.
[사람인데요?]
“으, 음, 사람이지?”
진한 하늘색의 긴 머리.
밀리제 자신보다 훨씬 작은 체구에, 교복은 맞지 않은 것을 입은 것처럼 헐렁하고 크다.
[마력의 흐름은 정상이에요. 딱히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왜 저러고 있는 걸까요?]
“일단 가까이 가 보자, 네로, 마력 감지로 주변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 줘.”
서문으로부터 이어진 숲길 저편.
정체 모를 누군가가.
바닥에 얼굴을 박고 뻗어 있었다.

* * *

생각해 보면.
내게 살레니움 사가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니고 하나의 엄연한 ‘현실’이다.
게임 속에서 퀘스트를 발주하던 NPC들도 지금은 한 명의 학생이고.
히로인을 비롯한 플레이어블 캐릭터 역시, 한 명의 살아 움직이는 학생이다.
정해진 코드를 따라 움직이는 프로그램들이 아니라, 다치면 아파하고, 자신의 감정으로 웃고, 울고, 하는 진짜 사람들이란 것이다.
그러니, 나는 더 이상 놀라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들은 모두 나와 같은 사람이고 생명체다. 나비 효과라 하던가, 내가 알던 원작의 스토리와 달라지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이미 나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나.
에브니스가 히로인에서 비틀렸으며, 레이나는 ‘침울, 어른스러운 선배, 옛 약혼자를 잊지 못하는 슬픈 여인.’이라는 원작의 스탠스를 벗어나 뭔가 커다란 댕댕이같이 변해 버렸다.
그렇기에.
더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
“서, 선배님,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는 부탁이란 건 알고 있는데요……. 그, 혹시…….”
그 맹세는 삼 분도 안 되어 깨져 버렸다.
그야.
“그, 제가 타, 탐험을 하려고 서쪽 숲에 갔는데, 이 아이가 길바닥에 쓰러져 있어서…….”
후배가 쓰러진 사람을 내 방에 데려왔다.
흘긋 뒤를 보니, 네로 녀석은 제 몸을 변형시켜 두 발로 서서 다른 발 두 개로 ‘그 녀석’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게 뭔 형태냐, 고양이 컨셉 안 지키냐?
그래서.
나한테 데려왔다고?
왜 데려온 거지?
“의무실에 가면 되는 것 아닌가?”
“그, 일단 사람이 쓰러져 있다고 생각해서 저도 모르게…….”
그렇군.
밀리제는 아직 1학년. 어리다.
의지하는 선배니까, 일단 데려가면 이 일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일단은 들이도록, 하지만 나중에 같은 일이 있거든 의무실로 먼저 데려가면 된다.”
“네, 네!”
대충 ‘그 녀석’을 들고 있던 네로가 내 침대 위로 녀석을 던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이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헉!”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휘둘러보더니, 나를 보고선 느린 동작으로 천천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드리안 선배……. 가 왜 여기?”
“그렇다. 수플레.”
“나는 분명……. 서쪽 숲에 있었는데.”
“기절해서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이 녀석이 널 데려왔지.”
내가 한 걸음 비키자, 뒤에 숨어 있던 밀리제가 허둥지둥하더니, 곧장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응,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