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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난민 중 자원한 레인저는 총 백여 명.
하나같이 나이가 많은 이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눈빛에서는 형형한 기세가 느껴졌다.
그중 대표로 나온 인물은 이전 레인저 부대로 활동했다 은퇴한 사람이었다.
“반갑소. 에오스트레라고 하오.”
“마찬가지. 흰고래 용병단의 준이다. 자원에 감사를 표하지.”
“당연한 일이오. 생면부지의 우리를 위해 여기까지 찾아 온 그대들만 할까.”
들어 보니 그의 손자가 피난 행렬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때마침 동상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던 것을 엘레노어가 치유해 주었다고.
“반드시,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곳을 지킬 것이오.”
“의지는 좋지만, 우리 중 죽을 사람은 없어.”
“고작 이만한 숫자로 일만에 다다르는 적군을 피해 없이 막겠다는 거요?”
“물론. 이미 놈들의 발목도 붙잡아 놨어. 끽해야 몇 시간이겠지만.”
“허어…….”
그리고 눈앞의 마법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몇 시간 후면 마주쳤어야 할 군영의 군대가 보인 것은 한참 후였다.
“놈들이 나타났군. 어찌할 예정이오?”
“별거 없어. 괜히 오르막을 선택한 게 아니거든.”
군영은 어느새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협곡 사이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이 충분히 가시권에 들어왔다고 판단이 됐을 때.
준의 마법이 펼쳐졌다.
[그리스]
때론 적의 진군을 막는 것은 고서클 마법이 아닌, 평범한 3서클 마법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준이 마법에 매료된 것도 바로 이런 점이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쓰지 못할 변수를 별거 아닌 방법으로 창출하는 능력.
그리고 준의 기대처럼 결과가 돌아왔다.
꽈강! 콰가가강!
“우하하하학!”
그 모습에 박장대소를 터뜨린 사람은 다름 아닌 엘레노어였다.
오르막을 오르던 중 미끄러워진 바닥으로 인해 수백의 군영들이 우당탕탕 부딪히며 저 밑으로 쓰러져 내린 것이다.
심지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군영의 숫자 또한 적지 않았다.
그 모습은 퍽 웃기기까지 했으니.
“지금이다.”
“아, 알겠소!”
설마하니 이토록 우스꽝스럽게 쓰러진 적들을 상대할 줄은 몰랐던 레인저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세월이 지나며 근력은 많이 줄어들었으나, 수많은 경험이 녹아든 자세였다.
쉬쉬쉬쉭!!
순식간에 백여 발의 화살이 허공을 갈라 협곡 아래로 넘어진 군영들 위로 떨어져 내렸다.
자세가 무너져 방패도 제대로 들지 못한 군영이 그대로 화살에 꿰뚫려 안개처럼 사라졌다.
“이, 이렇게 쉽게 놈들을 죽일 줄이야…….”
레인저들은 살짝 얼이 빠진 표정이 되었다.
피난길에 나서기 전, 놈들과 싸우기 위해 활을 들었을 당시 얼마나 절망스러웠던가.
놈들의 방패는 철벽과도 같았고,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수가 적을 때는 포위라도 해서 처리할 수 있었지, 숫자가 많아지면서 그마저도 불가능해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단 한 명의 마법사가 가볍게 손을 쓴 것만으로 전황이 이토록 달라졌다.
‘이런 자리를 미리 선점한 것도 좋은 수였지만, 본래라면 이조차도 불가능했다.’
예정대로라면, 피난 행렬은 이곳에 오기 전에 뒤를 잡혔어야 했다.
그것을 모종의 방법으로 막고서, 이 자리를 선점한 것은 저 마법사가 만든 결과물이었다.
“이걸로 시간을 좀 더 끌 수 있겠어.”
“방금 그 마법으로는 계속 막을 수 없다는 소리요?”
“저놈들의 적응 능력은 꽤나 귀찮은 종류의 것이거든.”
“적응 능력?”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인저.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저, 저거!”
몇 차례 [그리스]로 놈들의 진군을 막자, 이내 놈들 사이에서 기사급 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전에 에이든과 함께 죽였던 천인대장이었다.
놈이 등에 진 깃발을 땅에 꽂자, 저번처럼 검붉은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발밑으로 접지력을 상승시켰군.”
마치 미끄러운 눈길에 아이젠이라도 착용한 듯, 놈들의 발은 [그리스]에도 미끄러지지 않았다.
더 이상 같은 방법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저놈들의 정체가 무엇이요?”
“군대지 뭐.”
그러면서 준은 등 뒤에 서있는 레인저들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은 충분히 제 몫을 했어. 이제 돌아가. 가족들의 품으로.”
“그게 무슨 소리요? 아직 적들이 한참이나 있는데.”
“화살도 거의 다 썼잖아.”
“그건…….”
애초에 들고 온 화살의 개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리 차원 팔찌가 있다 한들 비축할 수 있는 용량은 한계가 있었으니.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막지.”
“그대들이 어떻게……?”
“어떻게든 해 봐야지. 그보다 시간이 없어. 놈들은 병력을 나눠서 협곡 위로 분산시켰을 거야. 포위되면 우린 당신들을 못 구해.”
오히려 짐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돌려서 하자, 레인저들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꼭 살아서 봅시다.”
“그러자고.”
그렇게 백여 명의 레인저 부대가 후퇴하고, 다시 네 명이서 좁은 협곡의 길을 바라봤다.
“선배.”
“어, 에이든.”
“느껴지십니까?”
“안 그래도 방금 막 느꼈어.”
성가시다는 듯 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군영 측에서부터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이라서, 마치 어디까지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것마냥 지긋한 기세였다.
“그럼 기대에 부응해 줘야지.”
아직 동료들의 힘을 빌릴 때가 아니다.
준의 서클이 강렬히 회전하며 일대의 마력을 흡수했고, 이내 그 마력은 마력회로를 달리며 다시금 외부로 분출되었다.
[고유 마법]
[탐화:요원지화(燎原之火)]
“이번에도 저번처럼 막을 수 있는지 보자고.”
6서클에 이르며 찾아온 변화 중 하나는 바로 새로운 마법의 창안이었다.
5서클이 향후 성장의 토대를 찾는 과정이라면.
6서클부터는 그 위로 건물을 쌓는 과정이다.
본인만의 시그니처 기술을 개발하고, 스스로의 내면을 살펴보며 훗날 완성될 자신의 심상을 탐구하는 것.
화르르르륵!!
거기에 준의 고유 마법은 마력에 속성을 부여하여 마법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속성에 마력을 부여하는 것.
단순하게 들어 보면 순서를 반대로 한 것뿐이라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드러난 결과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게…… 마법.”
에이든의 눈빛이 반짝였다.
몇 번을 봐도 새롭다.
지금도 보라.
정말로 마법처럼, 협곡이란 이름의 들판에 들불마냥 거센 불꽃이 치솟아 오르지 않는가.
그 위에 있는 붉은 군대는 마치 빨갛게 타오르는 숯처럼 보였다.
“이건 또 무슨 마법이야…….”
그리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엘레노어는 살짝 질린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최근 마법에 매진하고 있는 그녀는 준이라는 마법사가 얼마나 기존의 마법사들과 틀을 달리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속성에 마력을 입힌다니, 어떤 마법사도 저런 현상 따윈 들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후우…….”
한편, 준은 온 정신을 불꽃을 다스리는 데 집중했다.
‘강력하긴 강력하군.’
땅에서부터 치솟아 올라오는 불꽃에 속절없이 안개로 화하던 군영들.
마치 불구덩이로 돌진하는 부나방과 같은 모습이었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발의 접지력을 높여주던 놈들의 마력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준의 마법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
일차 난민 구출 작전에서 [탐화]가 담긴 [플레임 레이지]에 대항하던 것마냥, 놈들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하나, 이전과는 다르다.
당시 펼쳤던 [플레임 레이지]는 마력에 속성을 입힌 것.
그렇기에 [탐화]가 가진 근본적인 힘을 한계까지 끌어내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속성 위에 마력이 입혀졌다.
마력이 속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속성이 마력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탐화]가 가진 성질이 더욱 크게 부풀려졌고, 녀석은 놈들의 육체에 둘러진 붉은 마력마저 집어삼켜 연료로 삼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탐화(貪火)’에 걸맞는 원리인 셈이다.
이 불꽃을 잠재우려면, 준이 쏟아붓고 있는 마력보다 더욱 강력한 힘으로 찍어 눌러야 할 터.
당장 눈앞에 있는 천인대장의 깃발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불꽃이 저 너머에서 강력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놈을 자극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