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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놀란 듯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차차후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수를 헤아리더니 이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건 최근에 찾아낸 열매인 차후.
“……역시 그렇구나.”
현재 수중에 있는 열매들은 도합 열 개다.
그중 초록 열매 세 개는 일찌감치, 열매가 말문을 닫기도 훨씬 전에 찾아낸 것들이다.
붉은 열매 네 개 역시 그렇다.
‘하지만 새로 발견한 세 개…… 이건 차차후가 말한, 열매가 말문을 닫았다고 언급한 이후 찾아낸 것들.’
딱 그 시기에 ‘신화의 타락’이 일어났다.
그리고 용왕 역시 신화.
그 신화가 말문을 닫아 버렸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열매를 도로 땅에서 꺼낸 후 가만히 살펴봤다.
여태 먹어 온 것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역시 뭔가 감이 좋지 않아.’
흔히 말하는 ‘감’이라는 것은 의외로 정확하다.
특히 그 감이 불길할 때는 더더욱.
게다가 내 입으로 말하긴 뭐 하지만, 나는 초인으로서 일류의 영역에 올랐던 몸이다.
수많은 초인 동료들과 함께 전투를 치러 왔고, 하나둘 사라지며 살아남은 건 현재의 동료를 포함해서 고작 ‘한 줌’뿐이다.
이미 스러져 간 사람들과 살아남은 자들.
그들의 차이점을 말하라면, 나는 단언컨대 ‘감’이라고 말할 것이다.
경험과 정보를 취합하고 요약하여 머릿속에서 비약(飛躍)시켜 찰나의 순간에 위험 유무를 판단하는 것.
이른바 ‘예측’과 ‘예지’를 닮은 감각.
이미 스러진 사람들은 그것을 지니지 못했으며, 살아남은 이들은 그것을 가졌다.
‘물론 그 감이 무조건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다. 게다가 거하게 다쳐서 은퇴했던 놈의 감이 정확하면 얼마나 정확하겠냐마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나중에 찾은 붉은 열매 세 개를 추려서 한곳에 모아 놨다.
“이게 나중에 찾은 거라는 건 확실해?”
-자, 장담할 수 있는 차후! 믿어 주시는 차후!
상황이 기묘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다른 차후들도 우르르 몰려와 따로 빼낸 열매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게 나중에 찾은 열매가 확실한 차후! 먼저 찾아낸 것들보다 색이 조금 더 옅은 차후!
-이 열매는 여기, 여기가 조금 더 둥그런 차후! 차후가 나중에 찾아낸 열매인 차후!
저마다 믿어 달라는 듯 방방 뛰며 열변을 토하는 차후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연히 믿지. 내가 너희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니.”
-주, 주인님 차후…….
감격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차후들.
‘애초에 나는 봐도 모른다고.’
신뢰를 떠나, 열매를 분간할 수 있는 건 결국 차후들뿐이니 믿는 수밖에 없다.
물론 신뢰를 논해도 충분히 믿을 수 있고.
‘아무튼, 나중에 찾은 붉은 열매들.’
결국 ‘감’은 최악의 최악을 가정하는 것이다.
만에 하나 이것이 ‘나쁜 수’라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를 가정하고 또 가정해 보자.
‘기존의 붉은 열매는 먹으면 마력 회로를 강화해 주고 부상에서 회복시켜 준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나쁜 방향으로 가게 된다면?’
순간 나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미친 초인.”
그들 스스로가 말하기를.
계시자, 혹은 구원자.
‘붉은 열매, 즉 용왕의 은혜가 초인에게 은혜를 내려 준다면, 신화가 타락한 지금은 오히려 광기를 부추기는 트리거가 되는…… 것이려나?’
물론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
하지만 여태 알아낸 것들을 조합해 봤을 때, 최악을 가정한다면 그 추측이 아주 허황된 것은 아니다.
‘결국 심증뿐이지.’
그 의심을 확신으로 굳히는 방법이 있긴 하다.
‘먹어 보거나, 먹여 보거나.’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먹을 거다.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도 절대 먹일 생각이 없다.
‘……짚이는 곳이 하나 있긴 하다만.’
협회 지하에서 푹 썩어 가고 있는 범죄 초인 새끼를 하나 붙잡고 먹여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리되면 결국 놈을 처분할 수밖에 없어질 거고, 놈의 형벌 역시 그걸로 끝난다.
‘그건 놈들에게 너무 자비로운 마지막이겠지.’
열매에 의해 미치는 것보다, 평생 태양을 만나지도 못하고 땅속에서 미쳐 가는 게 어울리는 놈들이다.
그렇다면 결국 답은 하나.
괜한 불안 요소는 안고 가는 게 아니다.
콰직-!
불안 요소를 발로 밟아서 뭉개 버린 순간.
-끄어어어어!!
뭉개진 열매에서 울려 퍼진 섬뜩한 절규.
내가 택한 ‘감’은 ‘정답’이었다.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흠, 나도 아직 안 죽었군.”
-주, 주인님. 방금 무슨 소리였던 차후?
-너무 무시무시했던 차후…….
파들파들 떠는 차후들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별거 아니야. 너희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시, 신경 안 쓸 수가 없는 차후.
차차후가 내 발을 가리켰다.
-지금 주인님 엄청 무서운 차후.
“엇.”
시뻘건 ‘열매였던 것’ 때문에 발이 온통 엉망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차후들이 보기에는 뭘 밟아 죽여 버린 것일 테니.
기상 조작으로 비를 끌어와 신발을 북북 씻고 내친김에 못된 열매가 묻은 흙도 밖으로 퍼낸 후, 차후들에게 당부했다.
“얘들아, 앞으로는 이런 열매를 찾을 필요 없어.”
-그, 그런 차후?
“그래. 그리고 앞으로 또 이런 것들이 발견되면 나한테 족족 말해 줘.”
몽땅 밟아 터뜨려 주지.
아무튼 당장의 불안감이었던 ‘나중에 찾은 열매’는 몽땅 처리했고.
‘신화의 타락을 알기 이전에 찾아낸 붉은 열매들이 네 개, 그리고 초록 열매가 세 개.’
그것들을 그러모아 찬찬히 살펴봤다.
아마 이것들은 안전할 것이다.
용왕이라는 신화가 말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서 남긴 것들일 테니.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사용할 일이 최대한 없도록 하는 게 최선이겠지.’
협회장도 막 뿌리고 다니지 말라고 당부했었고, 어차피 더 이상 줄 사람도 딱히 없다.
열매들을 소쿠리에 담으며 말했다.
“자, 열매들아. 집에 가자.”
김치냉장고 과일 보관 칸으로 가자꾸나.

* * *

백성곤, 제주도 도착.
‘아니…… 제주도 게이트 클리어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제주도야?’
투덜거리던 백성곤이 지면에 탁 내려섰다.
일단 서울에서 가장 거리가 멀기에, 누구보다 빠른 고속 이동 특성을 가진 그가 제주도로 오게 됐다.
제주도는 4레벨 게이트에 의해 잠식당했었지만, 어느새 이곳도 재건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딱히 거주하는 주민이 있는 게 아니라 한산하다.
‘……근데 뭐지, 이거?’
백성곤은 어느새 차가운 얼굴을 한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말했듯 제주도는 아직 재건 작업이 진행 중이라 딱히 거주하는 주민이 없다.
한데 주변에 널찍하게 펼쳐진 밭 등은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밭 등에 자라 있는 것은 ‘꽃’이었다.
무성하고 아름답게 자란 꽃들.
‘……저게 무슨 꽃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아닌 건 확실했다.
게다가 지금은 2월의 겨울이다.
아무리 제주도가 온후한 기후라지만 한겨울에 꽃이 무성하게 자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제주도 재건 작업이랍시고 꽃을 먼저 키우지도 않았을 거고.’
백성곤이 스르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 높이 떠 있는 공간의 균열.
뚜둑, 뚝-!
목을 푼 백성곤이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들어가 보면 알겠지.”
전신을 뇌전으로 변화시킨 백성곤이 게이트를 향해 돌진했다.

* * *

텃밭을 가꾸는 요령.
이번엔 이것도 심어 보고, 나중엔 저것도 심어서 작물에 질리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 내 텃밭에서 기르는 작물은 상추와 깻잎, 토마토와 부추가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