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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총관은 몸을 살짝 숙이며 대단히 은밀한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유비설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래도 제갈운혁 왕야께서 큰 야망을 숨기고 있으신 걸로 추측됩니다.”
“야망이요?”
“예, 범부는 꿈도 못 꾸는 감히, 입에도 올리지 못하는 그런 야망 말입니다. 내밀원주께서 추측하시기를 제갈운혁 회주는 호북이 아닌 항산에 신왕부를 마련함으로써, 추후 신왕부를 기점으로 제갈세가의 세를 늘릴 가능성이 크다 하였습니다. 초월자들과의 싸움에서 제갈운혁 왕야가 이끄는 세력이 승리한다면 향후 강호는 그야말로 제갈세가의 천하가 될 것이고, 만에 하나 패한다 하더라도 무림의 제갈세가와 황궁을 등에 업은 번왕 제갈운혁으로서 초월자들에게 제갈세가의 안전과 세력을 보장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제갈세가는 살아남는 다는 말이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천년에 가까운 제갈세가의 역사를 살펴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답안입니다.”
“글쎄요……. 회주님이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요…….”
총관의 말에 유비설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유비설이 아는 제갈운혁은 앞뒤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 속은 모르는 법입니다. 이번에 영문의 문주가 살해당하고 전대 하오문주님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문주님 역시 환생…….”
“총관.”
화사한 봄날 같던 유비설의 표정이 매서운 북풍이 몰아치는 겨울처럼 변했다.
“죄, 죄송합니다.”
얼음 위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빙어처럼 혀를 놀리던 총관은 유비설의 한 마디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자고로 하오문에 위기가 닥칠 때는 반드시 혀를 잘못 놀린 자가 있는 법이니까요.”
“예…… 문주님. 말씀, 뼈에 새기겠습니다.”
“괜찮아요, 후후.”
어느 정도 총관에게 경고가 먹혔다고 생각한 유비설은 다시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 칸 위 계단 높이 단상에 설치된 자리에서 일어난 유비설은 총관에게 다가가 집무실 중앙에 있는 원형의 탁자에 앉았다.
“앉으세요.”
“예, 문주님.”
“오랜만에 바둑이나 한판 둘까요?”
유비설은 원탁 위에 있던 질 좋은 나무로 만든 바둑판을 총관과의 사이에 놓으며 자연스럽게 백돌을 잡았다.
“어익후~ 석 점은 양보해주셔야 합니다.”
“어머나~ 맞바둑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석 점이나요?”
“넉 점을 양보하셔도 부족합니다, 문주님.”
“후후, 다섯 점 드릴게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거절할 도리가 없지요. 은자 백 냥을 걸겠습니다.”
“호호호호, 두세요.”
다섯 점을 양보한 유비설에게 총관은 은자 백 냥의 내기를 제안했고, 유비설은 제갈운혁처럼 부채를 펼치며 입을 가렸다.
“선수를 취할 때, 우리 같은 범인들은 집을 만들기에 바빠 화점을 먼저 점하지요. 심지어 다섯 점을 먼저 깔아도 대부분의 사람은 화점을 기점으로 세를 늘려요.”
“예, 그게 정석이니까요.”
“하지만 말이에요.”
유비설은 백색의 바둑돌을 바둑판에 정중앙에 놓으며 말했다.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수가, 최선이 될 때도 있는 법이죠.”
“그렇습니까? 하지만 다섯 점을 먼저 깔았다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부와 명예는 물론이고 가문과 시기에 운까지 타고난 것과 다름이 없지요. 하니,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이 정석만을 고집하여도 실패할 리가 없습니다.”
“후후 그래요?”
유비설의 착수가 빨라졌고, 총관의 눈에 들어온 유비설의 한 수는 예리하고 과감했지만, 어디선가 허점이 보였다.
유비설의 속도에 맞춰서 자기도 점점 빨라지는 총관의 착수.
그리고, 어느덧 바둑이 중반쯤에 이르렀을 때,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하던 총관의 눈에 판도가 변하는 게 보였다.
“이, 이건?! 그리고 문주님……?”
빠른 속도로 흑돌을 놓던 총관은 뚫어져라 바둑판을 바라보다 신음을 흘렸고, 고개를 들어 유비설을 보았을 때,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유비설은 눈을 감고 돌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 맹기를? 게다가 눈을 감았음에도 착수에 실수가 없으시다니……?”
게다가 바둑이 종국을 향해 달려갈수록 유비설의 승리도 확실시 되고 있었다.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정석만을 고집하기에 뻔히 수가 예상되는 것이지요.”
유비설은 편안하게 눈을 감고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처럼 돌을 놓았지만, 총관은 정신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민하고 흑돌을 바둑판 위에 신중하게 두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늪에 빠진 사람처럼 총관의 형세가 나빠졌고, 패색이 짙어졌다.
“나름대로 머리 쓰는 데 자신이 있고, 바둑에는 더욱더 조예가 깊다고 스스로를 신뢰했죠. 하지만 저는 결코 제갈운혁 회주와는 바둑을 두지 않아요.”
“……왜 그렇습니까?”
“아홉 점을 깔아도 질 것 같았으니까요.”
“그, 그 정도입니까? 제갈운혁 왕야가……?”
유비설은 바둑판보다 훨씬 복잡한 제갈운혁의 환룡동경진의 전개도를 떠올리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제갈운혁 회주의 가장 무서운 점은 누구보다 머리 회전이 빠르면서도 동시에 서너 개, 아니 어쩌면 수십 가지의 경우의 수를 모조리 판단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최악의 상황은 피하는 수를 찾아내는 것이요. 최악을 피한다는 것, 그것은 적에게 있어서 최선은 없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계속하여 적이 최선의 수를 두지 못한다면…….”
유비설은 웅장한 청룡의 그림 속에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 넣듯이 백돌을 짚어, 흑돌 속의 급소를 찔렀다.
“적은 자멸하겠지요.”
“……졌습니다.”
백의 불계승.
굳이 계가하여 집을 헤아릴 필요조차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총관은 쓴웃음을 머금고 품속에서 백 냥짜리 전표 한 장을 꺼내 공손하게 유비설에게 건넸다.
“내밀원주가 범인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분석력을 지닌 재인이고, 하오문 내에서도 독보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란 걸 본 문주는 부정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밀원주의 추리와 행동은 예측이 가능한 수준이에요. 그러나, 제갈운혁 회주는 달라요.”
“……알겠습니다. 문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네, 우리는 지켜보고 그의 곁에 서 있으면 됩니다. 제가 아는 제갈운혁 회주는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책사처럼 영민하며 교활할 정도로 지모가 뛰어나지만, 그의 가슴은 무사예요. 결코 스스로 사람을 저버리는 소인배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예. 내밀원주께도 그리 전하겠습니다, 문주님.”
“네. 그리고 총관도 신왕부가 들어서는데 음지에서 하오문의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하세요. 제갈운혁 회주는 은혜를 입으면 두 배로, 원한은 네 배로 갚아주는 사람이니까요.”
총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비설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문주님. 본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갈왕야를 적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잊지 않겠습니다.”
“충분해요.”

* * *

“저…….”
“응? 왜?”
조운평은 어안이 벙벙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조운평의 눈동자는 벅찬 감정과 격동 그리고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를 의심하는 듯한 모습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게…….”
평소의 녀석답지 않게, 계속해서 머뭇거리며 말을 삼키는 조운평은 여전히 머뭇거리며 본론을 꺼내지 못했다.
“새로 태어날 상산조가의 가주가 될 사람이 속내도 못 밝히는 졸장부였나? 나는 그런 졸장부를 수하로 둔 적이 없는데…….”
“아닙니다, 주군. 다만,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과분한 은혜를 입어도 되나 싶어서 그랬습니다.”
족히 삼만은 넘어 보이는 관병과 관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넓은 공사판은 조운평뿐만 아니라 항주의 백성들 모두가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황제 폐하 아니, 주율오 형님의 배려 덕분인지 항주성에 파견된 성주 대행의 관리는 그들에게 넉넉한 수당을 지급해 주었고, 노역을 원하는 백성들 역시 가리지 않고 후한 품삯을 주며 일꾼으로 고용해 주었다.
-내 아우가 머물 곳이다. 재물을 아끼지 말라. 내 아우의 명성에 흠집이 생겨서는 아니 된다. 백성들의 칭송으로 신왕부의 터를 잡아라.
황명이 항주에 떨어졌고, 그 결과 신왕부가 들어설 항주의 경제는 전례 없는 호황을 맞이 하고 있었다.
후한 품삯을 주는 일자리를 찾아 불과 몇 주만에 중원 각지에서 백성들이 몰려 들어와 땀을 흘렸고, 자연스럽게 백성들이 머물 수 있는 객잔과 여관 그리고 민박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거기에 더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백성 중에서 요리 솜씨를 뽐내며 중원 곳곳의 일품요리는 만드는 식당이 우후죽순 개업을 했고, 식당에 자재를 공급할 상인들과 상인들의 짐수레와 공사도구 등을 만드는 대장간과 포목점도 하루가 다르게 개업을 알리는 현판을 걸었다.
“명예 따위는 관심 없다. 무인에게 있어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등선하신 유신 사부님과 같은 전인미답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 되는 것이다.”
“예, 주군.”
“지금은 명목상 신왕부의 현판을 달고 있지만, 이곳의 실질적인 주인은 너다 조운평. 초월자들과의 사건이 해결되면, 나는 신왕부를 과거 제갈세가가 있던 한중으로 옮기고 은거할 생각이다.”
“……주군.”
“응?”
조운평은 마치 명리에 초연한 스님이나 도사님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속내를 밝혔다.
“제가 주군을 모신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껏 성심을 다하여 주군의 명을 받들고 제갈세가를 위해 분골쇄신했다고 자부하지만, 이렇게까지 주군께 큰 선물을 받을 공을 세운 적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주군께 받은 것이 더욱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께서 어명으로 건축 중인 신왕부를 새로운 상산조가의 터전으로 삼으라고 하심은…….”
“과하다고?”
“……그렇습니다.”
조운평은 진심을 담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하지 않아. 네가 받은 것도, 앞으로 받을 것도 말이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제갈세가의 시조이신 제갈무후께서 가장 아끼던 장수도 조운 선사셨고, 그 옛날 상산조가의 선조들께서 모함으로 멸문의 화를 입었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지 못한 제갈세가의 빚을 갚는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외면할 때, 제갈세가에서는 저희를 숨겨 주지 않으셨습니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쫓기던 상산조가의 마지막 후손을 말입니다.”
“그래, 그랬지. 하지만 너희 편에 서서 싸워 주진 못했지.”
“주군…….”
조운평의 목소리가 슬픔과 감격으로 잠겼다.
“지난날 아버님께 말씀드렸지. 달라질 거라고, 제갈세가는 과거와 다를 거라고.”
“예, 저 역시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시끌벅적한 공사장을 뒤로하고 조운평과 함께 임시로 지어진 내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이건, 그 시작일 뿐이야.”

* * *

“주군…….”
조운평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조운평의 뇌리에 인상 깊게 각인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서문세가와의 대립이 극대화 되던 과거의 어느 날, 서문세가의 소가주를 피떡으로 만들어 놓은 제갈운혁은 순식간의 제갈세가에서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조운평이 기룡각에서 처음 제갈운혁을 보았을 때, 그는 제갈세가의 막내 도련님일 뿐이었다.
“제갈세가의 가주는 제가 아닌 정혁이 형입니다. 저는 제갈세가의 칼이 되어 제갈세가에 도전하는 자들을 무릎 꿇릴 것입니다. 제갈세가는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입니다. 다름 아닌 제가, 그리 만들 것입니다.”
제갈운혁이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건을 앞에 두고 당당하게 포부를 밝혔을 때였다.
조운평을 포함한 제갈세가의 가솔들과 식솔들의 대부분, 아니 전부가 치기 어린 막내 도련님의 희망사항이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비정한 강호의 물정을 맛보지 못한 어린아이의 장래희망 같은 꿈처럼 말이다.
그래도 좋았다. 가문의 복수와 비원을 이루기는커녕, 차라리 헛된 꿈이라도 이루려고 발버둥치는 주군의 당찬 포부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기룡각에서 제갈운혁의 지휘 아래 그의 사촌 형인 조철진과 함께 지금까지 배운 무공과 수련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며, 지옥 같은 수련을 통해 진정한 강호의 무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양패구상에 가까운 치명적인 피해를 각오한 서문세가와의 결전이 임박했을 때, 모두가 걱정이 가득한 전장의 한복판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시원한 승리를 경험했던 기억이 있었다.
“서문세가는 언제나 제갈세가를 넘은 적이 없습니다. 안 그러냐, 운혁아?”
이제 겨우 이십 중반인 제갈세가의 소가주 제갈정혁이 강호백대고수인 서문세가의 가주를 앞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제갈운혁의 듬직한 답변.
“물론입니다, 소가주님.”
그때부터였다. 조운평의 인생에 그리고 수백 년간 웅크리고 있던 제갈세가의 역사에 비상(砒上)이라는 두 글자와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는 상승(常勝)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것은 말이다.
“뭘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