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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스님. 그런 분이 있으신지 확인한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미타불.”
소림의 승려는 대답을 대신하며 순순히 물러섰다. 스님을 응대한 점소이는 빼꼼히 열렸던 문을 닫고 이제는 영문의 주인이 된 유비설에게 다가가 물었다.
“들으신 대로 제갈운혁 공자님을 찾아온 자들입니다.”
“소림의 무승 같은데, 누군지 알 수 있나요?”
“예. 아주 유명한 무승이니까요. 하오문도라면 누구나 용모파기를 외울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자들입니다.”
점소이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서 말을 이었다.
“소림의 철장나한(鐵掌羅漢) 현각스님입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던 네 명의 승려는 철장나한의 사형제들인 소림의 사대금강이었습니다.”
“철장나한이라면 무당의 이절신검 윤평 도사와 함께 정파 최고의 후기지수라는 그 스님을 말씀하시는 거죠?”
“예, 맞습니다.”
점소이는 나를 슬쩍 곁눈질하면서 그가 알고 있는 바를 계속해서 설명했다.
“지금이야 제갈운혁 공자님께서 자타가 공인하는 강호 제일의 후기지수……. 아니 이제는 후기지수라고 할 수도 없겠군요. 강호의 최고수 반열에 드신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제갈운혁 공자님께서 강호에 출도하시기 전까지 언제나 정도 최고의 후기지수로 불리던 이가 바로 철장나한 현각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건 그는 단 한 번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소림의 경내에만 머물렀는데도 그 정도 평가를 받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소림의 최고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사대금강과 함께 오악루를 찾았다는 건…….”
“쓸데없는 걱정이야.”
나는 점소이의 말을 끊었다. 더 들을 필요가 없는 정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밖에 있는 현각은 내가 여기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왔고, 무엇보다 그의 기감이 오악루의 정문을 뚫고 확실하게 나를 포착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찾아온 손님을 피할 이유가 없지.”
“문을 열까요?”
유비설의 말에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나가도록 하지. 굳이 저들을 안으로 들일 필요는 없잖아.”
“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연스럽게 초진평을 위시한 풍운대정회의 동료들이 내 뒤를 따랐다.
“아미타불. 소림의 현각입니다. 제갈운혁 시주가 맞으시지요?”
“네.”
소림의 상징과도 같은 반장을 하며 내게 정체를 밝힌 현각의 눈빛에는 중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인자함 대신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이런 눈빛은 내게 낯설지 않았다. 서문경, 남궁연후, 윤평, 모용준 등 내게 호승심을 드러냈던 수많은 녀석이 보였던 그런 눈빛이었다.
“한데 뒤에 계신 분들은……”
“승려라면 스스로를 낮추는 게 먼저인데, 현각 스님부터 먼저 일행을 소개하는 게 순서가 아닙니까.”
“……운혁 시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소승이 결례를 범했습니다.”
현각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몸을 돌려 그의 일행을 소개했다.
“이분들은 소승의 사형들이십니다. 소림의 사대금강으로 현장, 현갑, 현화, 현수 스님이십니다.”
“아미타불.”
현각의 소개를 받은 사대금강은 한 사람이 움직이듯이 반장을 하며 불호를 읊었다.
“저와 동행중인 일행입니다. 초진평, 반극영, 유비설, 철요진 입니다.”
나는 간략하게 풍운대정회 동료들의 이름을 밝혔다.
“이화태양궁의 적양공자, 흑룡문의 탈명흑수, 하오문의 귀안신녀 그리고 광풍혈랑대의 혈풍마창 시주님들이시군요.”
“…….”
“…….”
“…….”
“맞아요.”
유비설을 제외한 나머지 삼 인은 현각의 말에 대꾸조차 없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했고, 유비설만이 그의 말에 답해 주었다.
“오악루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여, 방장스님께서 소승을 보내셨고, 오악루를 도우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소승에게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현각의 말을 듣고 슬쩍 고개를 돌려 유비설을 바라보았고, 유비설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아무 일 없었어요.”
“그럴 리가요. 개방의 시주님께 듣기로 오악루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인명을 중시하는 소림에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현각의 말에 유비설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리고 굳어진 유비설의 표정에 새롭게 떠오른 감정은 바로 분노였다.
“본루의 일입니다. 사상자가 발생했든 부상자가 나왔든 모두 오악루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니, 소림에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아미타불. 유 시주의 말씀은 잘못되었습니다.”
“뭐가 잘못됐다는 거죠?”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하남에서 말입니다. 불제자로서 어찌 그런 일을 좌시할 수 있겠습니까? “
“어떻게 하겠다는 말씀이시죠?”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 뒤는 저희가 다시 판단하겠습니다. 게다가…….”
현각의 시선이 이번에는 유비설의 뒤편에 있는 초진평과 반극영 그리고 철요진에게로 옮겨졌다.
“사파의 쟁쟁한 후기지수분들이 어째서 소림의 숭산을 눈앞에 둔 오악루까지 오셨는지에 대해서는 적절한 답변이 있으셔야 할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사파의 인물들이 오악루에 들어온 직후에 살인이 벌어졌으니, 이는 승려로서도 그리고 정파인으로서도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회주.”
현각의 말을 곰곰이 듣고 있던 초진평이 고개를 돌려 나를 불렀다.
“응?”
“저 땡중, 숯 더미로 만들어도 될까?”
“……되겠냐.”
“아쉽군. 회주가 안 된다고 하니 내가 참도록 하지.”
“안 물어보길 잘했군. 안 그래도 목을 몸통에서 분리시키고 싶었는데, 그것도 허락해 줄 리가 없겠지.”
“조용. 주군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초진평에 이어 반극영과 철요진이 한마디씩 거들었고, 그들의 말이 계속될수록 현각과 사대금강의 얼굴은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점점 일그러졌다.
“으휴……. 좀 가만히들 있어 봐요. 가뜩이나 머리 아픈데.”
유비설은 초진평을 위시한 두 녀석을 말리며 다시 한번 현각에게 말을 걸었다.
“소림의 걱정은 잘 알겠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으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유비설 시주.”
“예.”
“개방 역시 사파의 집결지에 분파를 두고 있으니 하오문이 오악루를 거점으로 활용한 것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하나, 적양공자와 탈명흑수 그리고 혈풍마창 시주는 다릅니다. 소림이 세 분 시주들의 지역을 침범하지 않은 만큼 세 분의 시주님들께서 하남까지 오신 연유를 밝혀 주시는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밝힐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어쩔 수 없지요. 이화태양궁과 흑룡문 그리고 광풍혈랑대에 기별을 보내어 그 연유를 묻고 그때까지는 세 분의 시주님을 소림에서 모시고 있을 수밖에요.”
“……거부한다면요?”
“그러지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유비설의 말에 현각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고, 그와 반대로 그의 뒤편에서 사대금강이라는 현각의 사형들은 은근슬쩍 기를 끌어올리며 위압감을 조성했다.
“현각 스님.”
“예, 제갈 시주.”
“스님은 저를 만나러 오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저를 찾은 목적을 말씀하시고 볼일을 보면 될 것이지, 왜 애꿎은 제 일행들을 핍박하십니까?”
“핍박이 아닙니다, 제갈 시주. 소승은 분명히 제갈 시주를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악루에 일이 생겼다길래 그것을 조사하기 위한 임무를 겸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막상 오악루에 와 보니 제갈 시주와 함께 사도의 쟁쟁한 후기지수들이 있는데, 저분들이 오악루에 나타난 뒤로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러니 어찌 이것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군요. 아무래도 제가 말을 실수한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지요.”
“스님께서는 제 일행을 핍박한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제갈세가의 삼공자님답게 제 뜻을 곡해하지 않으시는군요.”
“하하, 이렇게 스님과 제가 의견이 일치할 줄은 몰랐습니다. 안 그래도 조금 실례가 되는 말일 거 같아서 망설였는데 말입니다.”
“실례라니요.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소승은 제갈 시주의 말씀을 경청하겠습니다.”
현각은 인자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내게 답했다. 이 다음에 이어질 내 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예. 스님께서는 제 일행을 핍박한 게 아니라…….”
내가 살짝 말을 끌자 사대금강과 현각 그리고 풍운대정회 동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집중되었다.
현각과 사대금강은 승리를 만끽하는 승자의 표정이었고, 풍운대정회의 인물들은 뭔가 하나 터질 것 같다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은 얼굴이었다.
“시비를 걸러 오신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제갈 시주, 말씀이 조금 과하십니다.”
“이 정도면 예의는 충분히 차린 것 같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런 뜻이지.”
나는 품속에서 정도맹주님께 받은 무림맹 특별감찰대주의 현철패를 꺼내어 현각에게 보여 주었다.
“오악루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무림맹의 특별감찰대주인 나, 제갈운혁이 통제한다. 또한 본 대주의 신분은 극비에 부쳐야 하며, 소림의 방장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이의 있나?”
“있습니다.”
현각은 차분하게 내 말에 반박하며 반장하고 있던 손을 뒤로 물렸다.
“소승은 무림맹의 감찰대는 들어봤어도 특별감찰대주라는 직책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정도맹주님께서 그런 막강한 권한을 제갈 시주에게 부여했다는 것도 믿기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갈 시주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정도맹의 특별감찰대주이자, 제갈세가의 삼공자의 신분을 가지신 분이 사도의 후기지수들과 어울리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근묵자흑이라 했습니다. 사악한 것들을 멀리하십시오, 시주. 그리고 공정하게 오악루의 사건과 사파인들에 대한 처분을 소림에 일임하십시오. 그게 순리이고 법도입니다.”
“나 원…….”
나는 현철패를 품에 넣고서 현각에게 물었다.
“소림이 관아인가? 아니면 너희들이 나졸이라도 되는 건가?”
“시주, 모든 화는 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디 말씀을 가려서 하십시오.”
현각은 은근히 기세를 뿜어내며 나를 압박하려 했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올 뿐이었다.
“……음.”
“풉.”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냅둬라, 저놈도 곧 대가리가 깨지고 나면 알게 되겠지.”
현각의 기세에 풍운대정회의 동료들은 헛웃음을 지으며 현각을 비웃었고, 현각과 사대금강의 얼굴에 서서히 노기가 서리는 것이 보였다.
“소림의 제안은 거부한다.”
“시주, 부디 소승이 무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강호에서의 배분과 무공 그리고 명분까지. 소림은 그 무엇도 지금의 나를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니 돌아가라.”
“거절하겠습니다.”
현각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내 말을 거부했고, 나 역시 현각을 향해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강호의 법도대로 하자는 말인가?”

* * *

“아미타불. 소승은 분란을 원치 않지만 제갈 시주께서 원하신다면 그 또한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소림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럼 동의한 걸로 알겠다.”
나는 현각의 말을 받아들이며 유비설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비설. 오악루에 연무장이나 장원 같은 게 따로 있나?”
“네. 오악루의 뒷편에 큰 정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