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안 피하면, 목에 구멍 난다.”
시작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남궁연후는 그에게 쇄도하며 검을 뻗어 유주호의 목젖을 노렸고, 유주호는 직도양단의 기세로 있는 힘껏 박도를 내리그었다. 이대로 피하지 않는다면 남궁연후의 몸이 깔끔하게 두 쪽으로 갈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남궁연후는 유주호의 도격을 전혀 피할 생각이 없이 방어를 도외시하고 마주쳐 갔으며, 아주 살짝 고개를 틀어 왼쪽 팔을 내주겠다는 각오로 지근거리에서 최속의 발검술로 유주호의 목을 노렸다.
“이, 이런 미친놈이?!”
유주호는, 자신이 내일 죽을 강호의 노고수도 아니고, 앞날이 구만리 같은 창창한 인생인데 여기서 남궁연후의 한쪽 팔을 가져가는 대가로 목을 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길.”
유주호는 어쩔 수 없이 남궁연후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던 박도의 방향을 틀어 남궁연후의 검을 쳐 내기 위해 움직였고, 그 순간 남궁연후의 검은 나뭇잎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힘없이 흐느적거리며 교묘하게 유주호의 박도를 피했다.
“크윽?!”
가뜩이나 전력을 다해 내리치던 도격의 방향을 바꿔서 균형이 깨져 곤란한 유주호였지만, 남궁연후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어깨로 훤히 열린 유주호의 가슴을 들이박았고, 유주호는 뒤로 넘어지는 와중에도 다급하게 박도를 역수로 쥐고 남궁연후의 등을 꿰뚫으려 하였다.
“어림없지.”
남궁연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손을 등 뒤로 꺾어 검날로 유주호의 도를 막아내고서는 남은 한 손으로 유주호의 멱살을 움켜쥐고, 그대로 머리로 유주호의 코를 들이박았다.
“커억!”
“엄살은, 이제 시작이다.”
빠직, 빠악!
남궁연후는 새가 모이를 쪼듯이 엄청난 속도로 연거푸 유주호의 얼굴을 들이박았고, 유주호는 얼굴이 피범벅이 된 채로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결(結).”
유주호가 쓰러지는 순간 단중진인이 비무대 위로 몸을 날려 비무를 중지할 것을 선언했고, 남궁연후는 축 늘어진 유주호의 멱살을 놓았다.
“남궁연후, 승(勝).”

* * *

“운혁아…….”
“…….”
“운혁아, 운혁아.”
낯선 듯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으음…….”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무거움과 불쾌감이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온몸이 쇳덩이처럼 무거웠고, 쏟아지는 졸음과 피곤함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괜찮니?”
“아……. 스승님.”
힘겹게 눈을 떴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물에 젖은 흰 천을 한 손에 쥐고, 내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아 주는 주소천 스승님의 얼굴이었다.
“괜, 찮습니다.”
“누워 있거라.”
주소천 스승님은 억지로 일어나려는 나를 만류하며, 내 이마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밀어서 다시 눕히셨다.
“상공, 운혁이가 일어났답니다.”
주소천 스승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벼운 미풍이 불어왔고, 어느새 유신 사부님이 나타나셨다.
“무량수불, 다행히 정신을 차렸구나.”
“운혁이, 사부님을 뵙습니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유신 사부님께 예의를 갖췄고, 이번에는 주소천 사모님도 나를 말리지 않으셨다.
“눕거라.”
“이제는 괜찮습니다.”
“아니다, 편히 있거라. 그게 내게도 더 편하니까.”
유신 사부님의 말과 동시에 내 몸은 부드러운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침상에 눕혀졌다. 유신 사부님은 품속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셨고, 그 속에는 영롱한 색이 감도는 영단 세 알이 들어 있었다.
“그건…….”
“별거 아니다. 기력이 많이 쇠했기에, 가져왔을 뿐이다.”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사부님.
두 개는 태청단과 자소단 그리고 대환단이지 않습니까.
“편히 쉬거라.”
“괘, 괜찮…….”
유신 사부님은 내 기도를 열고 세 알의 영단을 넣어 주시며, 수혈을 짚었고 나는 내 몸속으로 파고드는 영단의 기운과 유신 사부님의 진기가 내 몸을 파고드는 것을 느끼면서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상공,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단이 얼마나 많은데, 겨우 세 알만 가져오신 거예요? 영단 같은 걸 운혁이에게 아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주소천의 눈길이 새침하게 변했다. 하나뿐인 제자인데 영단 같은 게 뭐가 아깝냐는 무언의 시위였다. 사실, 유신과 주소천 정도 되는 강자들에게는 영단이란 게 큰 의미가 없다.
영단은 재료가 되는 것이 순수한 자연의 기를 간직한 영물이나 약초 따위를 특수한 방법으로 인위적으로 가공한 물품이었다.
일반적으로 대환단이나 태청단 같은 영단은 무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심한 경우에는 무공의 경지를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주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영단보다 더욱 순수한 자연의 기를 단전에 담은 이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영단이라 할지라도 불순한 기운이 뭉쳐 있는 부산물일 뿐이었으니까.
“허허, 세 알이면 충분합니다. 남은 것도 결국은 운혁이에게 남겨줄 텐데, 굳이 과하게 영단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이까.”
“……상공께서 그렇다면야…….”
주소천은 유신에 말에 수긍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많이 걱정했고 기대한 것도 사실이지만…….”
기절한 듯이 잠들어 있는 제갈운혁을 보는 주소천의 눈빛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바라보는 것처럼 애틋하게 변했다.
“설마, 운혁이가 천혼강림술의 부분 소환에 성공할지는 몰랐어요. 그리고 그 대가로 수명이 깎인 것도, 폐인이 된 것도 아니에요. 기력이 많이 소진되긴 했지만, 진원지기에 손상이 있는 것도 아니니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천운이오. 운혁이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말이오.”
유신은 가볍게 정신을 잃은 제갈운혁의 몸을 공중에 띄우고서는 영약이 유신의 몸으로 잘 흡수될 수 있도록 허공을 격하고 차력도인의 수법을 시전하며 말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운혁이는 화안금정의 눈으로 세상의 이치를 보았고 나와 당신의 몸을 관조할 수 있었소. 어쩌면 말이오. 운혁이가…….”
어느새 차력도인의 수법으로 제갈운혁의 전신에 영단의 기운을 골고루 분배한 유신은, 조심스럽게 제갈운혁의 몸을 눕히고서 말을 이었다.
“온전히 내 무공을 전수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아니, 어쩌면 나를 넘어 강호 역사상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한 전인미답의 경지에 발을 디디길 바란다오.”
“저도, 상공의 마음과 같아요.”
주소천이 지금까지 전인을 찾지 못한 이유가 상단전이 완벽하게 개방되고, 비상한 머리를 가졌으되 그녀가 강신술로 불러올 신격들의 인정도 받을 수 있는 이를 발견하지 못해서였다면, 유신은 조금 다른 이유가 있었다.
유신의 무공을 완벽하게 전수 받기 위해선 아주 특별한 조건이 필요했는데 수백 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그 실마리를 제갈운혁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고맙소, 소천.”

* * *

“……제갈세가의 광룡이랑 같이 다니더니, 남궁세가의 미친개가 되었구나. 광룡은 못되어도 그 정도면 충분히 광견(狂犬)이라 불릴 만하다.”
“너나 잘해. 사파에서 아예 네 별호를 비정독사(非情毒士)라고 만들어 준 것만 봐도, 너보다는 내가 낫지.”
첫날의 비무대회가 끝나고, 다시 모인 남궁연후와 당길우의 첫 마디였다.
“둘 다 그만들 하게.”
그리고 그 둘의 등 뒤에서 팽무호가 한심한 얼굴로 혀를 차며 둘 사이를 벌려 놓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셋 다 팔 강에 무사히 진출했고, 우리가 경계하는 대상들 역시 마찬가질세.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대책은 무슨, 이전에 말한 대로 하면 돼. 상황이 변한 것도 아닌데, 우리도 우왕좌왕할 필요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달라질 건 없다.”
남궁연후와 팽무호의 의견이 갈렸고, 한동안 티격태격하던 둘 사이에 당길우가 끼어들었다.
“제갈운혁이 없다 보니, 의견 조율이 안 되는군. 운혁이는 도대체 이 군상들을 어떻게 다룬 거지?”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이보게 길우. 말이 좀 심한 거 아닌가.”
“됐고, 쓸데없이 힘 빼지 마라. 우리가 힘을 써야 할 상대는 따로 있으니까. 그리고 내 생각도 연후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당길우는 남궁연후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며 자신의 생각을 보탰다.
“아쉽지만 연후 말대로 지금은 별다른 수가 없어. 최악의 경우엔 우리끼리 팔 강에서 맞붙을 수도 있어.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이번 비무대회의 진행방식은 좀 독특해. 팔 강에 오른 인물들이 오늘처럼 다시 무작위로 번호표를 뽑아서 상대를 정하는 방식이니까.”
“내 솔직히 말하겠네.”
팽무호는 허리춤에 메고 있던 대도(大刀)를 쿵 소리 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운혁이나 자네들처럼 머리를 쓰는 데 익숙하지 않다네. 솔직한 심정으로는 팔 강의 상대가 누가 되든 아무런 후회가 남지 않도록 있는 힘껏 도를 휘두르고 싶은 마음이 크다네. 심지어, 자네들이 내 상대로 정해진다고 해도 말일세. 그게 내가 배운 무사의 도리이고, 하북팽가의 가르침이니까.”
“이 자식이……. 지난번 잠룡대회 때 그 난리를 쳤으면 이제는 좀 알아먹어야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
“하지만.”
팽무호는 막 발작을 일으키려는 남궁연후를 손을 뻗어 제지하고,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그따위 호승심 따위는 말끔하게 접을 수 있네. 명성? 명예? 그런 것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네. 그래서 자네들에게 묻는걸세.”
“호오~”
“오…….”
우직한 곰 같은 팽무호의 변화에 남궁연후와 당길우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의 변화 자체로도 놀라움이 있었지만, 이 자리에 없는 제갈운혁에 대한 감탄이 포함되어 있었다.
강자와의 대결을 갈망하는 호승심 만큼은 강호제일로 통하는 하북팽가의 소가주, 고집불통의 팽무호가 이렇게까지 변한 것에는 분명히 제갈운혁의 영향이 지대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말해 주게. 내가 어찌하면 되겠는가? 정과 사의 후기지수들을 가리지 않고, 자네들이 상대가 아니라면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기권을 하란 말인가?”
“팽무호, 오해해서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조금 생각을 바꾸겠다.”
“괜찮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을 바꾸겠다는 말인가?”
“네 말을 듣고 보니, 운혁이 놈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을 좀 해 봤다. 그리고 내가 요근래 운혁이를 따라다니면서 좀 배운 게 있는데 말이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지만, 부득이하게 싸움이 벌어졌을 때 운혁이라면…….”
남궁연후는 땅에 박혀 있던 팽무호의 도를 뽑아서 당길우를 겨눴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이용하여 다른 오랑캐를 제압한다.)와 차도살인(借刀殺人: 다른 사람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의 계책을 썼을 거야.”
“그거 좋은 생각이군.”
당길우는 남궁연후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남궁연후의 손에 들린 도를 뺏어 팽무호에게 넘겨주었다.
“네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다, 무호야.”

* * *

“…….”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유신 사부님께서 대환단과 태청단 그리고 자소단까지 내게 주셨고, 영약의 기운이 내 몸속에 골고루 퍼질 수 있도록 손수 차력도인의 수법으로 활공을 도와주셨다.
그런데 왜 내공의 증가량이 이토록 미미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일어났니?”
“예, 스승님.”
정신을 차리고 와공(臥功)으로 기를 일주천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주소천 스승님께서 내게 다가오셨다.
“다행이구나. 걱정이 많았단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괜찮다. 위험을 감수한 만큼 얻는 게 있었으니 다행이지 않니. 상공께서 기다리고 계신단다. 어서 가 보렴.”
“예.”
몸을 움직이고 본격적으로 경공을 펼치는 순간, 몸속에 무엇인가가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내공의 양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도록 몸이 가벼웠고 경공의 속도 또한 정신을 잃기 전보다 훨씬 빨랐다. 마치, 처음으로 상단전을 개방하고 무공을 펼쳤을 때처럼 말이다.
“사부님께, 인사드립니다.”
“가벼워 보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