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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반갑습니다. 운혁 시주.”
맹주님과의 면담을 마치고 건물을 나섰을 때, 일반적인 무당의 제자들과 달리 백색의 도복을 차려입은 내 또래의 젊은 도사가 내게 손짓했다.
“무당의 윤평입니다. 장문인의 명을 받아 운혁 시주를 모시러 왔습니다.”
윤평이라는 도명. 아니 도명인지 이름인지는 아직까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분명히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난다.
“제갈세가의 삼남, 제갈운혁입니다.”
“후후, 어떠십니까?”
자신을 윤평이라 밝힌 도사는 몸을 돌려 앞장서 걸어가며 툭 하고 내게 질문을 던졌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주어를 생략하고 어떠냐고 물어봤으니, 나 역시 질문으로 되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별거 아닙니다. 무당파는 처음이시지 않습니까?”
“예, 처음입니다. 듣던 대로 도가의 본산이라 불릴 만하군요.”
“그렇…… 습니까?”
“예.”
내게 무슨 대답을 바라고 질문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다만, 윤평 도사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과연, 듣던 대로 운혁 시주는 남다른 것 같습니다.”
앞장서서 걷던 윤평 도사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사실 운혁 시주와의 만남을 무척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저를요?”
“예, 운혁 시주도 저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했을 것 같은데, 아닙니까?”
내게 뭘 기대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윤평 도사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뚜껑을 열어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지금의 그는 남궁연후나 팽무호 정도의 수준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별생각이 없었습니다.”
“하하, 그렇게 마음을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윤평 도사의 걸음이 멈췄다.
“스승님께서 제게 운혁 시주를 안내하라 명하셨습니다. 스승님께서 그리 말씀하신 속뜻은 앞으로 좋은 친구이자 호적수가 될지도 모르는 운혁 시주를 미리 봐두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참, 어떻게 저런 결론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무당파에 들이닥친 인파가 너무 엄청나니까 너도 가서 한 손 보태라 정도로 윤평 도사의 스승이란 분이 말씀하신 듯한데, 어떻게 저런 자기 위주의 해석을 할 수 있지? 아무래도 이 사람은 반듯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모든 세상이 본인 위주로 돌아간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닌 것 같습니다.”
“끝까지 숨기실 겁니까?”
윤평 도사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가며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운혁 시주도 무룡 태사조님의 절기를 얻기 위해 무당에 오신 거 아닙니까? 당금 무림에서 오대세가의 후예 중 독보적인 명성을 얻고, 한중의 광룡이라 불린다지요?”
“최근 들어 광룡이라는 별호를 얻은 것은 맞지만, 무룡 어르신의 절기를 노리고 무당에 온 것은 아닙니다.”
“……시주는 저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아니요, 잘 모릅니다.”
“정파의 후기지수들 중 가장 뛰어난 두 명의 후기지수를 일장일검(一掌一劍)이라 부릅니다. 일장은 소림의 철장나한(鐵掌羅漢) 현각스님의 별호에서 따왔으며, 일검은 제 별호인 이절신검(二絶神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셨군요.”
스스로를 상당히 높이 추켜세우는 면이 강했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굳이 반대의견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피곤한 스타일이고, 나는 병신과는 세 마디 이상 하지 않는 신조가 있었기에, 굳이 그의 말에 토를 달진 않았다.
아, 물론 윤평 도사가 병신이란 뜻은 아니다. 나름대로 무공도 강해 보이고, 무엇보다 무당의 적전제자인데 병신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단지, 스스로를 낮추고 진중한 무당의 대외적인 성향과 다르게 조금 자아도취가 강한 사람이라 생각될 뿐이었다.
“솔직히 많이 기대했습니다. 저의 스승이자 무당의 장문인인 단중진인께서도 말입니다.”
“뭘 기대하고 계셨습니까?”
지금까지 서론이 상당히 길었지만, 슬슬 본론이 나올 것 같았다.
“스승님은 물론이고 사조님들 그리고 그 위의 항렬의 사조님들까지 누구도 무룡 태사조님의 절기를 전수받지 못 했습니다.”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당의 입장에서, 그리고 제 입장에서는 그 부분이 너무도 아쉬웠습니다. 무당의 유구한 역사에서도 무당의 대종사이신 장삼봉진인과 더불어 가장 큰 업적을 남기신 무룡 태사조님의 절기가 이대로 사장되는 것은 무당은 물론 강호 전체에 있어서도 큰 손실이니까요.”
“그 부분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래서,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무룡 태사조님의 절기를 이어받을 사람은 외부의 인물이 아닌, 무당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음, 결국은 무룡 유신의 절기를 절대 외부에는 넘길 수 없다는 말인데.
이해는 된다. 나 같아도 제갈세가에 절세의 무공이 있다면, 그걸 제가세가의 인물이 이어받아야지 일면식도 없는 자에게 절기가 넘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무룡 어르신쯤 되는 분이 그런 걸 모르실 리는 없고, 이렇게 출신성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자격만 된다면 자신의 절기를 전수하시겠다고 공언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윤평 도사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운혁 시주께서 꼭 비무대회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비무대회요?”
“조금 전 맹주님과의 면담에서 아무 말씀도 듣지 못하신 겁니까?”
“글쎄요. 후기지수들이 참여하는 비무대회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요. 그다지 배울 것도 없구요.”
계속 들어 주자니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적당히 윤평 도사의 말을 끊었다.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진심을 담은 말이기도 했다. 내가 볼 때 윤평 도사는 아직 덜 익은 애송이였다. 그러니 굳이 내가 시간을 낭비하며 이런 녀석과 손을 섞을 필요성을 느낄 수 없었다.
“후후후후.”
윤평 도사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걸고서 낮게 웃었다.
“운혁 시주라면 당연히 비무의 본선까지 진출하는 것이 어렵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운혁 시주가 선전하기를 바랍니다. 아니, 결승에서 운혁 시주와 마주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 새끼는 아니, 아니지. 그래도 무당의 도사님인데. 이 사람은 지금까지 내 말을 귓등으로 들은 건가, 아니면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들은 건가. 무당파 장문인의 적전 제자라서 그런가 윤평 도사는 생각보다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쯤 되니까 나도 슬슬 생각이 바뀐다. 웬만하면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와 제갈세가를 위해서 그리고 무당파를 위해서도 이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녀석은 한 번쯤 지르밟아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소림의 철장나한은 무당파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정파에서 가장 큰 명성을 떨치고 있는 후기지수는 누가 뭐래도 운혁 시주입니다. 사마외도의 무리에게 정도의 기세가 꺾이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운혁 시주는 저와 함께 정도의 기치를 높이고, 결승에서 멋진 승부를 펼쳤으면 합니다.”
“아니, 저는 진심으로 당신을 호적수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과 저는 수준이 다릅니다.”
“하하, 아직도 그 소리입니까. 그렇게 겸손하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운혁 시주를 충분히 인정하니까요.”
아니, 착각도 정도껏 해야지. 너는 나를 인정하겠지만 나는 네가 눈에 차지도 않는데 왜 이러는 걸까. 아직까지 한 번도 임자를 만난 적이 없어서 그런가?
“저는 말입니다, 운혁 시주.”
윤평도사는 어느 정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는지,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직까지 도호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당의 모든 도사님이 말끝마다 빈도가 어쩌고, 노도가 어쩌고 하는 단어를 붙이는데 윤평 도사는 그래서 무량수불이라는 도호도 빈도라는 칭호도 쓰지 않았던 거구나.
“지금까지 도호를 받지 않고, 무당의 진산절기를 전수받은 사람은 저를 포함해서 단 두 명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닌 다른 한 분이 바로 무룡 유신 태사조님이십니다.”
결론은 스스로가 제 2의 무룡 유신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직까지 무룡 어르신을 뵙지는 못했지만 윤평 도사의 자질로는 결코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이제 다 왔군요.”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걷기만 했음에도 윤평 도사는 계속해서 자신의 포부와 계획을 은근히 돌려 말하며, 이번에 열릴 비무대회에서 우승하여 당당하게 무룡의 절기를 이어받을 거라는 말을 반복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예.”
나는 짤막하게 윤평 도사에게 포권하고 그가 안내해 준 숙소를 들어섰다. 대부분의 인원이 접객당에 머물거나 임시로 마련된 천막 같은 허름한 곳에서 억지로 잠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내게 배정된 숙소는 아주 훌륭했다.
오대세가처럼 값비싼 도자기나 장신구로 치장된 넓은 방은 아니었지만, 자단목을 깎아 만든 조그마한 암자는 도가의 향취가 묻어났고 깔끔하게 정돈된 실내의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가볍게 저녁을 먹고 몸을 씻으며 윤평 도사로 인해 피곤해진 심신을 달래려 침대에 누웠을 때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안에 있지?”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역시나 남궁연후였다.
“들어와.”
그런데 왜 팽무호는 안 보이고 이 녀석 혼자 나를 찾은 걸까?
“이야~ 여기는 아주 대궐이네. 이 넓은 곳을 너 혼자 쓰냐?”
남궁연후 녀석은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탁자 위에 마련된 물병을 들고서 시원하게 목부터 축였다.
“지금 있는 곳이 불편하면 무호랑 함께 여기서 지내던가.”
“고맙지만 사양할게. 어차피 내일부터는 맘 편히 잘 수도 없을 것 같으니까.”
“응? 무슨 소리야?”
“네가 맹주님과 면담을 하는 동안, 무당파 곳곳에 방이 붙었어.”
“그래?”
“응. 선대 맹주님들의 절기를 원하는 자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모였으니, 이제 슬슬 옥석을 가려내는 작업을 시작한다는 뜻이지.”
“그렇군. 열심히 해 봐.”
“그래, 열심히 할…… 뭐?”
남궁연후는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열심히 하라니, 너 왜 남의 일처럼 그래.”
“남의 일이지, 내일이냐. 안 그래도 윤평이란 사람 때문에 피곤해 죽겠는데 너까지 왜 그래.”
“윤평? 무당의 이절신검 윤평을 만났어?”
“응.”
나는 지금까지 윤평 도사와 있었던 일을 남궁연후에게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너 윤평이 누군 줄 알면서도 그랬다고?”
“알아야 되냐? 내가 볼 때는 윤평이나 너나 거기서 거긴데.”
“칭찬인지 욕인지…….”
남궁연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난 비무대회니 선대 맹주님들의 절기니 하는 건 관심 없어. 그냥 절대의 경지를 개척한 위대한 무인을 한번 보고 싶을 뿐이야.”
“네가 비무대회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그분들을 보려면 무당파에는 머물러야 할 거 아니야.”
“그렇지. 그냥 비무대회를 구경이나 하다가 우승자가 정해지면 선대 맹주님들이 나타나실 테니까.”
“후우~. 근데 그게 어려울 것 같다, 운혁아.”
남궁연후는 한숨을 푹 쉬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싫든 좋든 너도 내일부터 칼부림을 해야 될 거야.”

* * *

“내가 왜?”
“예선전에 참가하지 않는 후기지수는 내일 아침에 무당파를 떠나라는 방이 붙었으니까.”
“흐음…… 그렇군. 어쩔 수 없지, 본선은 기권을 하더라도 예선을 치를 수밖에.”
“……너 때문에 잠도 못 자고 고생하는 우리가 불쌍하지도 않냐?”
남궁연후는 가슴을 쿵쿵 치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 때문에? 그게 왜 나 때문인데?”
“지금 왜 무호가 여기 없을까?”
“글쎄? 운기조식이라도 하고 있는 거 아니야?”
“후우~ 모든 사람이 너처럼 다른 이에게 무관심하다면 세상이 평화로울 텐데 말이야. 그치 운혁아?”
남궁연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난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게 아니야.”
“그럼?”
“내 관심을 끄는 이의 숫자가 극히 적을 뿐이지.”
“……다른 놈이 너처럼 말했다면 뒤통수를 후려갈겼을 텐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네.”
“그럼, 제갈세가는 선비의 가문. 결코 허언을 입에 담지 않아.”
“잘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