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점소이는 며칠 전의 살벌한 기억을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우리 객잔에서 정파의 무림인 여섯 명과 사파의 무림인 열 명이 시비가 붙은 적이 있습니다.”
점소이는 혹시나 앞에 무림인이 성격 더러운 사파의 인물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폈다.
“그래? 정파와 사파가 서로 견원지간인 것은 맞지만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불문율인데 객잔에서 치고받고 싸운 거야? 나 같은 정파인은 도무지 사파인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나는 은근슬쩍 점소이에게 내 소속을 밝히고, 고개를 돌려 객잔을 둘러보았다. 꼼꼼히 객잔의 구석구석을 살펴 보았지만 무공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 정파의 협객이셨군요.”
“협객은 아니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점소이는 내 대답에 안심했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객잔에서 싸우진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조용히 술을 먹던 두 무리의 무림인들이 어느 순간 눈이 마주치더니 뭐라 뭐라 서로를 힐난 했습니다. 그러다가 서안의 혈사가 너희들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며 군유명과 자수…… 맥? 자수백? 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왔습니다.”
군유명과 자수백이라면 서안의 혈겁을 일으켰다고 추정되는 두 사람 중 한 명의 이름이었다.
“일촉즉발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두 무리는 밖에 나가자마자 칼과 도를 뽑아놓고 서로를 죽일 듯이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몸을 살피면서 싸우는 것 같더니 사파의 무리 중 한 명이 배에 칼을 맞고 쓰러졌고 그다음에는…….”
점소이의 앳된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더니, 잠시 말을 멈췄다. 점소이는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물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키고서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고함소리와 비명소리 그리고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반 시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그 소란 끝에 관에서 사람이 나왔고, 그제서야 무림인들은 싸움을 멈추고 도주하였습니다.”
“흠…….”
여기까지는 흔치 않은 일이지만 강호에서 심심찮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아무리 무림인이라 해도 관에 붙잡혀서 좋을 일이 없을 테니 당연히 관군이 왔다면 싸움을 멈추고 물러서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졸들에게 듣기로 사망자가 도합 일곱 명이나 나온 혈투였다고 했습니다.”
“혹시 시체는 남아 있었어?”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많은 비밀을 담고 있었다. 특히 무림인에게 죽은 시체는 어떤 무공에 죽었는지 대략적인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 법이었다.
“아니요. 시체는 없었습니다. 무림인들은 나졸들이 등장하자 싸움을 멈추고 동료의 시체를 둘러메고 재빨리 자리를 떴습니다. 나졸들이 그들을 추격하려 했지만 그들의 몸놀림이 원체 빨라서…….”
“놓쳤군.”
“예.”
이것만으로는 큰 성과가 없었다. 단지 서안의 혈사로 인해 정파와 사파의 적대감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몰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 외에 좀 특이한 건 없어?”
“아?! 그러고 보니, 정파의 무인 중 한 명이 도주 직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점소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되새기다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입을 열었다.
“낙일문이 군유명이란 혈마에게 멸문의 화를 입었을 때, 서안을 떠나 있어 겨우 화를 면한 내 친우 소자성이 죽었다. 낙일문의 소문주로서 독문무공 낙일신검(落日神劍)을 전수받고 문파의 명맥을 이어야 할 이가 죽었으니, 낙일문은 그 대가 끊겼다. 네놈들…… 이 원한은 잊지 않겠다. 자심문(自審門)의 대제자 방필정이 맹세한다. 반드시 내 친우 소자성의 원수를 갚겠다!”
오, 이건…… 낙일문의 소자성이란 고인에게는 안타깝지만, 불현듯 죽은 그를 이용하여 자수백과 군유명을 끌어낼 좋은 계책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이건 쓸모가 있겠어.”
“예?”
“아니에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이제 점소이에게 들을 수 있는 건 다 들었다. 남은 건 남궁연후와 팽무호가 돌아올 때까지 지금 떠오른 대책을 정리하고 계획을 구체화 시키는 일이었다.
“지필묵을 좀 쓸 수 있을까?”
“예, 대인.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점소이는 부리나케 달려가 지필묵을 가져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점소이는 재빨리 내 앞에 질 좋은 한지를 펼치더니 열심히 벼루에 묵을 갈고는 공손하게 내게 붓을 바쳤다.
-특급. 서고에서 서안성 보계현의 낙일문의 독문무공, 낙일신검에 대한 필사본을 최대한 신속하게 요청함. 파해법이 담긴 책이 아니어도 관계없음, 대략적인 초식의 형태만 있어도 무방함.
나는 일필휘지로 제갈세가의 암호문을 이용하여 서찰을 작성하고 서찰의 마지막에 나를 상징하는 표식을 남긴 뒤에 곱게 적어 밀봉했다. 제갈세가로 바로 보내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니 만전을 기해야겠지.
“여기서 가장 빠른 표국에 부탁해서 이 서찰을 한중 백은현의 보성객잔으로 보내 줘.”
나는 제갈세가의 숨겨진 사업채 중 한 곳인 보성객잔을 수신지로 정하고 점소이에게 서찰을 건넸다.
“보성객잔 말씀이십니까?”
“최대한 빨리 부탁해. 대신 은화 한 냥을 더 줄게.”
서안의 흉흉한 분위기를 감안할 때, 이 밤중에 점소이가 움직여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알겠습니다, 대인. 그렇게 하겠습니다.”
역시, 돈의 힘은 위대했다.

* * *

“교주님.”
피처럼 붉은빛이 인상적인 홍아주(紅?酒)주가 가득한 잔을 든 사혼미희(死魂媚姬) 주서희의 앞에 흑의로 몸을 가린 여인이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사혼교의 정보를 책임지는 비각의 각주였다.
“제갈운혁이 서안에 나타났습니다.”
“내가 아는 그 광룡이(狂龍)?”
“네, 제갈세가의 막내아들 제갈운혁이 맞습니다.”
“호호호호, 운혁이라. 제갈운혁.”
주서희는 교태로운 웃음을 흘리며 기분 좋게 술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앵두 같은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피처럼 붉은 홍아주가 묻었고, 촛불에 반사된 그녀의 입술이 요사스러운 빛을 띠었다.
“우리의 악연이 깊구나, 운혁아. 본녀가 팔문의 연으로 복건으로 떠나기 전날에 네가 오다니. 본녀가 네 얼굴을 볼 수 있겠구나. 안 그래요, 비각주?”
“모든 것은 교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연한 말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비각주.”
“네, 교주님.”
서주희의 짤막한 언질에 비각주라 불린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한시라도 빨리 사랑스러운 광룡의 비명을 듣고 싶은데, 그는 어디에 있나요?”
무림대전이 끝나고 사도팔문의 일좌로 그 명성을 사해에 떨치던 사혼교였다. 전대 사도맹주를 배출한 주소천의 문파인 모산파와 함께 그 세를 불려 나가던 사혼교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고, 서안의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데, 한중평야의 결전에서 사혼교의 부교주 주굉이 제갈세가의 막내아들에게 한쪽 팔이 잘리고 사냥개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겨우 목숨만 건져서 사혼교로 귀환했다. 이는 사혼교의 명성에 먹칠을 한 사건이었고, 주서희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한 마디로 제갈운혁은 현재 사혼교의 제일 주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원수가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주소희는 끓어오르는 살의와 복수심으로 살짝 몸을 떨었다.
“보계현의 객잔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혼자 왔나요?”
“처음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혼자였지만, 뒤이어 제갈운혁과 또래로 보이는 두 명의 일행이 객잔에 들어왔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그 두 사람의 정체는요?”
“지금 파악 중입니다. 하오문에서 파악 중이니 내일 아침까지 신원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어엿한 숙녀가 오밤중에 남정네를 찾아갈 수는 없으니, 내일 점심까지는 기다려 볼까요. 오호호호호.”
“감시조를 파견하겠습니다.”
비각주가 사혼교주 주서희를 모신 지 어느덧 이십 년의 성상이 흘렀다. 그랬기에, 그녀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제갈운혁이라는 아이도 곱게 죽기는 글렀구나. 교주님께 낙인이 찍혔으니 쯧쯧…….’
“제갈운혁의 신원을 확인한 자는 누구인가요?”
“하오문의 서안지부에서 제갈운혁이 머무는 객잔 주인에게 이방인에 대한 보고를 받았고, 서안의 분타주가 직접 제갈운혁의 초상화와 대조해 보았으니 틀림없을 겁니다.”
“제갈운혁의 초상화를 가져오세요.”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교주님.”
비각주는 곱게 접은 한지를 펼쳐서 공손하게 주서희에게 바쳤다.
“후훗, 기대했던 만큼 잘생긴 아이네요. 만나자마자 팔다리를 뽑아놓고 비명을 즐기려 했는데, 막상 초상화를 보니 본녀의 마음이 흔들리네요.”
주서희는 홍아주가 담긴 병을 들어 가볍게 목을 축이고서는 입술에 묻은 술 방울을 혀로 핥았다.
“하룻밤 쾌락을 선물하며 정기를 모조리 뽑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비각주의 생각은 어때요? 오호호호호호.”
“미천한 놈이 교주님의 은혜를 입을 가치가 있겠습니까.”
“호호호,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주굉 부교주의 오른팔을 자를 정도면 이화태양궁의 귀여운 소궁주 만큼 양기가 충만할 것 같은데, 그냥 죽이기는 조금 아까울지도…….”
“교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일 운혁이를 만날 걸 생각하니 몸이 뜨겁군요”
나른한 얼굴로 비단 침대에 반쯤 눕듯이 몸을 걸친 주서희는 걸치고 있던 흰색의 궁장을 풀어헤치고 속이 훤히 비치는 나삼마저 훌훌 벗어 던졌다.
“양기가 충만한 아이를 준비시키겠습니다, 교주님.”
비각주는 같은 여자가 봐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요염한 얼굴에 급격한 각도로 굴곡진 주서희의 몸매에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오늘 밤 교주에게 희생될 이름 모를 사내의 명복을 빌었다. 하긴, 사내로서 저런 여자와의 하룻밤을 거절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비록, 그 대가가 목숨이라 해도 말이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비각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은 숨결이 거칠어진 주서희의 피부가 붉은색으로 살짝 달아올랐다.
“산해진미가 눈앞에 있는데, 굿이 입맛을 버릴 필요가 있겠어요?”

* * *

“이게 다야?”
남궁연후가 개방의 서안분타주님에게 받아온 서류뭉치를 꼼꼼히 확인했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무림맹주님께 들었던 대략적인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군유명과 자수백이라 주장하는 흉수들의 범행 시기와 사용된 무공 그리고 그들에게 멸문당한 문파와 주요 인물들의 신상명세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걸 벌써 다 읽었다고? 족히 백 장은 넘을 것 같은 분량인데, 불과 반각만에?”
“허허, 그냥 한번 스윽 훑어본 것 같은데. 역시 제갈세가의 자제 답군.”
제갈세가 사람들의 평균적인 독해력이 일반인들에 비해서 월등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가문에서도 나와 비견될 만한 사람은 수아 누나와 아버지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들은 제갈세가에 대하여 굉장히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흐음…….”
나는 차를 한 모금 입에 담고 머릿속으로 개방의 보고서를 분석해 보았다. 피해 인물과 장소는 눈에 띄는 규칙도 특징도 없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것은 기본적으로 여섯 가지의 항목을 차근차근 밝혀내는 것이 효과가 좋았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였는가.
군유명과 자수백이라는 두 흉수가 범행을 벌일 때, 명확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범행 시간과 대상이었다. 특이하게도 군유명은 밤 시간에, 자수백은 낮 시간에 활동했는데 이 부분이 조금 이상했다. 군유명의 범행 대상은 철저하게 정파에 국한되어 있었고, 자수백의 범행 대상은 마치 군유명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이 사파의 무인들만을 노렸는데 이상하게 두 사람이 조우한 징조는 없었다.
“남궁연후.”
“응?”
“넌 지금부터 사파의 마두다.”
“뭐?”
“그리고 팽무호.”
“응.”
“너는 정파의 명숙이야.”
“크큭, 그래.”
“야, 팽가놈은 정파의 명숙이고 왜 나는 사파의 마두인데?”
남궁연후가 따지듯이 내게 물었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하고 둘에게 역할을 부여해 줬다.
“지금부터 너희가 자수백과 군유명이라고 생각하고 내 질문에 대답해 봐.”
“아니, 운혁아. 다 좋은데 천하의 남궁세가의 둘째 아들이 어떻게 사악한 마두의 생각을 추측할 수 있겠어? 어? 바꿔 줘, 바꿔 달라고.”
“하…….”
대부분의 제갈세가 사람들이라면 이런 경우에 차분히 연유를 설명하고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겠지만, 나는 대부분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억!”
나는 가볍게 손을 뻗어 남궁연후 녀석의 갈비뼈를 두 손가락으로 움켜 잡았다.
“야, 야…… 잠, 잠시만.”
거의 다 완치된 남궁연후의 갈비뼈였지만, 녀석은 지난 날의 고통이 떠올랐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 안 할거지?”
“그, 그럼!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