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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많이도 모였구만.”
한중평야에 모여든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흥미진진한 눈빛을 한 사십 중반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당연한 일입니다. 어쩌면 오늘 한중의 주인이 바뀔지도 모르는데, 무인이건 상인이건 죄다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 올 수밖에요.”
“진평표국의 양승진 표두가 아니오? 오랜만이구려.”
“오랜만입니다, 길창주 상회주님. 나날이 발전하는 창승상회를 보니, 이 양모는 감탄을 금할 수 없군요.”
“껄껄껄, 과찬이오 양표두. 창승상회가 아무리 세를 키웠다 해도 진평표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게 가능했겠소이까.”
한중에서 이름깨나 날린다는 진평표국의 총표두 양승진과 제갈세가와 서문세가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한중 상계의 대상인 길창주의 만남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랬지요.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말입니다.”
“진평표국주님께서도 걱정이 크신 모양이오. 총표두님을 직접 한중평야로 보낼 정도면 말이오.”
“그야 어디 진평표국만 그렇겠습니까. 칼밥 먹고 사는 무인들은 물론이고, 한중에서 힘깨나 쓴다는 자들은 지금쯤 제갈세가에 줄을 댈지 서문세가에 줄을 댈지 골머리를 앓고 있지 않겠습니까.”
“서문세가가 언제고 일을 벌일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게 이토록 빠를 줄은 몰랐소. 게다가 정사지간의 위치에서 호시탐탐 정파 오대세가의 명예를 탐하더니 갑작스럽게 사혼교를 끌어들여 한중의 패자를 자처할 줄이야…….”
길창주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졌다. 상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사파보다는 정파의 인물들과 거래하는 편이 사업을 영위하는데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표국주님께서도 시름이 깊으십니다. 제갈세가와 서문세가가 서로를 견제했기 때문에 우리도 마음 편히 사업을 키울 수 있었는데, 이제 둘 중 한 곳이 한중의 패자가 된다면…….”
“승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요.”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산속에 두 마리 호랑이가 공존할 순 없지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승자의 편에 붙을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빠를수록 좋은 것이고 말이오.”
“그렇겠지요.”
제갈세가와 서문세가의 명운을 걸 결전을 보려 모여든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만은 그중에서도 진평표국과 창승상회는 유독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한중평야를 주시하던 양승진 총표두가 은근한 말투로 길창주에게 물었다.
“길창주 상회주님. 창승상회는 이번 제갈세가와 서문세가의 결전에서 누가 웃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쉽지 않은 질문이군요.”
눈가에 근육이 잔뜩 뭉쳐 긴장감을 드러내면서도 길창주 상회주의 눈동자는 공허했다.
“부탁드립니다 상회주님. 창승상회가 없다면 진평표국 역시 순망치한입니다.”
“양 총표두가 그렇게 까지 말씀하시니…….”
길창주 상회주는 마지못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개방과 하오문에 청탁을 넣어 제갈세가와 서문세가의 승부의 행방을 물어보았소.”
말이 청탁이지 정파 최고의 정보통이라 일컫는 개방과 사파 최고의 정보 문파인 하오문에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귀중한 정보였다.
“오오, 개방과 하오문 두 곳에 말입니까?”
양승진 총표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개방과 하오문은 모두 한 곳의 승리를 점쳤소.”
“그곳이 어디입니까? 누가 승자가 될 거라 하였습니까?”
양승진 총표두가 달뜬 얼굴로 다급하게 물었다. 개방과 하오문이 만장일치로 승리를 예견했다면 십중팔구, 아니 백에 백으로 이번 결전의 승자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크흠…….”
“죄송합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저도 모르게 그만…….”
양승진 총표두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길창주 상회주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아무리 본인 사정이 급하기로서니, 그토록 값비싼 정보를 아무 대가도 없이 재촉하는 추태에 대한 사과였다.
“괜찮소. 내가 총표두의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테니 말이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평표국은 결코 창승상회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개방과 하오문에서 말하길…….”
길창주 상회주는 한숨을 쉬며 한중평야로 고개를 돌렸다.
“서문세가가 승리한다 하였소.”
“서문세가가 말입니까? 제갈세가가 아니구요?”
“그렇소. 나는 당연히 제갈세가의 승리를 점쳤지만 개방의 한중 분타주와 하오문의 한중 지부장 둘 모두 입을 모아 서문세가의 승리를 예상하더구려.”
“어째서 그렇습니까? 사혼교 때문입니까? 아시다시피 일반적인 무림방파들과 달리 사혼교는 교주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사교 단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굉 부교주의 친위세력은 보잘것없지 않습니까? 기껏해야 백 명 남짓의 무사들뿐일 텐데요?”
“내 어찌 양 총표두의 말씀을 모르겠소이까. 나 역시 그리 생각했다오.”
길창주 상회주는 한중평야의 양쪽에서 서서히 평야의 중심부로 접근하는 제갈세가와 서문세가의 깃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갈세가의 전력을 아무리 낮게 평해도 서문세가보다 오 할 이상 강하지요. 말석이라지만 명색이 오대세가인데 이는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소.”
“그렇습니다. 사실 왜 제갈세가에서 삼 개월의 시간을 줬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게 다 저기 있는 저자 때문이오.”
길창주 상회주는 저 멀리 제갈세가의 선두에서 자신있는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태연자약한 표정의 젊은이를 가리켰다.
“저자는……?”
“제갈세가의 막내아들, 광룡(狂龍) 제갈운혁이오.”
“광룡이라…… 누가 지었는지 별호 한번 잘 지었군요.”
제갈운혁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저 천진해 보이는 얼굴로 서문경과 서문자충을 반병신으로 만들었다는 제갈운혁의 소문은 익히 알고 있는 양승진 총표두였다.
“제갈세가의 주력은 한중으로 접근하고 있는 사혼교의 본대를 견제하느냐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니, 아무리 와룡 제갈정혁 소가주가 뛰어난다 한들 후기지수들만으로 서문세가와 사혼교의 주굉 부교주를 막아 낼 순 없겠지요.”
“제갈세가가 외통수에 걸렸군요.”
“후우…… 나 역시 제갈세가가 승리하기를 바라오. 그 편이 우리에게 여러모로 유리할 테니 말이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더 늦기 전에 서문세가에 손을 내밀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설마, 제갈세가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소가주를 위험에 내던지겠습니까?”
“총표두의 바람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길창주 상회주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렵겠지요.”

* * *

제갈세가와 서문세가가 마주한 백 장의 거리.
“말은 필요 없겠지.”
서로를 향해 다가가던 무사들이 이동을 멈추고 전열을 가다듬는 긴장감 속에서, 서문자평의 나직한 목소리가 한중평야에 울려 퍼졌다.
“서문가주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에 화답하는 낭랑한 음성의 주인은 제갈세가의 소가주 제갈정혁이었다.
“많이 컸구나, 제갈정혁.”
서문세가의 진영이 좌우로 갈라지며 서문자평과 주굉의 모습이 드러났다. 옥빛의 무복을 입은 서문자평과 피처럼 붉은 도복에 제사의를 걸친 주굉의 기세가 제갈세가를 압박했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 한중의 패자를 자처하는 제갈세가의 소가주는 본 가주 앞에 나설 용기조차 없는가?”
“그럴 리가 있겠소.”
서문자평의 도발에 제갈정혁이 움직였다. 조철진 부대주를 위시한 신기창검대의 무사들이 제갈정혁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았고, 서문자평이 앞으로 나섬에 따라 제갈세가의 진형은 자연스럽게 품(品)자 형태를 취했다.
“역시, 아직은 어리구나 제갈정혁.”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스로의 무위를 과신하여 앞으로 나선 것이 네 실수다. 호위무사를 대동한다 한들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주장(主將)이 선봉에 섰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어리석은 건, 서문세가주님인 것 같군요. 이번 대전에서 제갈세가의 주장은 제가 아닌 막내 운혁입니다.”
“상관없다.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 목과 제갈세가의 소가주인 네 목이다. 전검대! 제갈정혁의 목을 가져오라!”
“충!”
서문자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리 준비하고 있던 서문세가의 이장로 서문흑이 이끄는 전검대(電劍隊)가 비호처럼 바닥을 박차며 제갈세가를 향해 쇄도했지만, 제갈정혁은 태연한 신색으로 오히려 서문자평을 비웃었다.
“선수필승(先手必勝). 병법의 기본이지요.”
어느새 백여 명의 금검대 무사들과 제갈정혁과의 거리가 오십 장까지 줄어들었다.
제갈정혁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검을 뽑으며 등에 비스듬히 메고 있던 단창 크기의 청룡언월도를 들었고, 신기창검대(神技槍劍隊)의 무사들 역시 양손에 검과 창을 들고 다가오는 전검대를 주시하며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나 서문세가는 언제나 병법에 있어서 제갈세가를 넘은 적이 없습니다. 안 그러냐, 운혁아?”
“물론입니다. 소가주님.”
제갈세가의 후미에서 신기운룡대의 부대주 조운평이 검을 높이 들었고, 어느새 검집의 끄트머리를 밟고 우뚝 선 제갈운혁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신기탄시(神技彈矢).”
신선처럼 고고하게 학창의를 휘날리며 제갈운혁의 부채가 달려오는 서문세가의 전검대를 가리켰다.
“종(從) 신기탄시(神技彈矢)!”
마치 서문세가의 움직임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제갈운혁의 명을 기다리던 신주비봉(神州飛鳳) 제갈수아의 활시위가 당겨졌다.
“어리석은. 무림인에게 활이라니. 하지만 그 역시 예상한 바다.”
제갈수아와 한 몸이 된 신기선궁대(神技扇弓隊)의 화살이 제갈정혁의 신기창검대를 넘어 달려오는 전검대를 향해 소나기처럼 쏟아졌지만 서문세가주 서문자평은 흔들리지 않았다.
“똑같이 되돌려 주어라.”
“충!”
저 정도 위력의 화살이라면 돌진하는 전검대에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서문자평은 무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서문세가의 무사들이 우렁차게 복명하며 화살을 꺼내 시위에 활을 먹여 반격하려는 순간, 한중평야에 모인 누구도 예상치 못 했던 일이 벌어졌다.
“크억!”
“화, 화살의 각도가?! 끄악.”
“이기어시란 말이냐?! 커어억.”
날아오는 화살을 향해 자신 있게 검을 휘두르던 전검대의 선두가 비바람에 무너지는 돌탑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신기선궁대의 화살은 전검대의 지척에 이르러 급격하게 각도를 꺾으며 사방팔방으로 비산했고, 평범한 화살이라 생각하며 검격을 가한 전검대의 틈을 파고들어 그들에게 방심의 대가를 안겨주었다.
“흥. 우리를 얕봤구나. 이기어시를 떠올릴 정도로 대단한 궁술기인 하지만 생각한 게 고작 이거냐? 그 정도로 전검대는 무너지지 않는다!”
예상밖의 놀라운 궁술로 생각지도 못한 피해를 입었지만 전검대의 서문흑 장로는 동요하지 않았다. 과연 험난한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의 노강호 다운 모습이었다.
“신경 쓰지 마라. 제갈정혁의 목을 노려라. 화살은 가주님께서 막아 주실 것이다.”
“충!”
서문흑의 생각대로 서문세가에서 발사한 수백 발의 화살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신기선궁대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제갈정혁과 신기창검대를 지원하기 위한 신기선궁대의 원거리 공격을 묶어놓고 서문흑 이장로와 전검대는 제갈정혁의 목을 노리는 한 수였다.
“신기선막(神技扇幕). 신기강시(神技剛矢).”
“종(從). 신기선막(神技扇幕).”
제갈운혁의 부채가 펼쳐지며 명이 하달되었고, 다시 한번 신기선궁대가 제갈수아의 지시에 따라 손에 굳은 살이 베기도록 연습한 운룡신기선법(雲龍神技扇法)과 풍룡신기궁술(風龍神技弓術)의 절초를 펼쳤다.
“이럴수가?!”
“세, 세상에…….”
신기선궁대의 손에서 활짝 펴친 부채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하늘로 날아올랐고, 부채들은 여섯 개씩 짝을 이뤄 마치 방패와 같은 형상을 이루며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서문세가의 화살 공격은 회전하는 부채를 뚫지 못하고 속절없이 튕겨 나갔고, 신기선궁대의 무사들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에 기를 가득 담은 화살을 걸었다.
“신기강시(神技剛矢).”
제갈수아의 명령에 일제히 활시위를 놓자 신기선궁대의 화살이 엄청난 속도로 발사됐고, 그 순간 허공을 누비며 회전하던 부채들이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추고 분리되며 신기선궁대의 화살길을 열어 주었다.
“뭐, 뭐야?!”
“크으윽!”
“끄윽!”
이번에 쏘아진 신기선궁대의 화살은 앞선 신기탄시의 화실과 달랐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움직임이 아닌 힘이 가득 실린 엄청난 위력의 화살이었고, 앞서 있던 전검대 무사의 몸을 관통하여 뒤의 있는 이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힐 정도의 가공할 만한 위력이었다.
“뒤에서 피해가 가지 않게 앞에서 막아! 전진을 멈추고 화살을 방어하라!”
전검대의 대주 서문흑이 다급하게 검을 뽑으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화려한 궤적으로 절반에 가까운 화살을 쳐 내며 수하들의 안전을 도모한 서문흑이었지만, 미처 쳐 내지 못한 화살은 그대로 전검대를 덮쳤다. 그리고 그 여파로 질풍처럼 나아가던 전검대의 움직임이 멈췄다.
“빠득…… 제갈세가에 저런 신묘한 궁술이 존재하다니…….”
당황하는 서문흑을 지켜보던 제갈운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놀라면 안 돼지.”
그리고 활짝 펼쳐진 그의 부채가 접히며 전검대를 가리켰고, 제갈운혁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한중평야에 울려 퍼졌다.
“연계기(聯繫技). 신기투선창(神技投扇槍).”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