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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로군.]
쿵-.
자욱한 운무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흑현귀가 지상에 내려섰다.
과연 최상급의 악마답게 거인보다도 거대한 몸뚱이. 루스가 머리를 최대한 들어도 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 아아…….”
흑현귀가 본모습을 전부 드러내는 순간, 레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었다.
마치 지옥의 한복판으로 떨어진 듯한 오싹한 마기가 끊임없이 공포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저건 못 이겨…….’
저 흑현귀라는 악마의 머리 위에 돋아난 뿔의 개수는 무려 여덟 개.
그것은 악마 중에서도 흑현귀가 최고위의 무력을 지녔다는 의미다.
아무리 단신으로 엘프들을 몰살했던 루스라도 저런 괴물까지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너는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인간이냐? 저 멍청한 계집이랑은 무슨 관계지?]
흑현귀가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레이를 가리키며 루스에게 물었다.
흑현귀에게 있어서 루스는 실로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분명 아무도 몰라야 할 내막뿐만이 아니라, 단 한 번도 인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자신의 이름까지 훤히 알고 있었으니.
죽일 땐 죽이더라도 이 빨간 머리 인간 놈의 정체만큼은 알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닥치고 얼른 시작하기나 하자고.”
스릉-.
질문에 순순히 대답할 의무는 없다는 듯, 루스는 진홍빛 검광이 번들거리는 ‘유혈성천’을 들어 올리며 그리 말했다.
거대한 숲이 모조리 시들 만큼 막대한 마기 속에서도, 루스에겐 그 어떤 안색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난 너랑 잡담이나 나누려고 지금 여기 있는 게 아니거든.”
[……재밌는 녀석이군.]
흥미를 내비친 흑현귀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비틀렸다.
그의 마기는 같은 악마들조차 무릎 꿇게 하는 위압감을 지녔건만.
이 어린 인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투지를 불태우며 싸움을 걸어왔다.
[나 또한 악마이기 이전에 한 명의 전사다. 그래서 난 너처럼 건방진 녀석이 별로 싫지는 않아.]
“…….”
[그런 의미에서 제안을 하나 하도록 하지. 지금이라도 저 계집을 나한테 순순히 넘기면, 최소한 고통 없이-.]
흑현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혈성천’이 내뻗어졌다.

[흑광신검 오의]
[흑뢰섬]

빠지지지지지직-!!
고막을 할퀴는 벽력과 함께, 검붉은 광선이 흑현귀의 심장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현명한 놈인 줄 알았더니.]
기습적으로 펼친 선공이었지만, 흑현귀는 여유롭게 몸을 틀어 흑뢰섬을 피했다.
[머리를 굴릴 줄 모르는 애새끼였군. 편히 죽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다니.]
“신기하단 말이지.”
[……?]
대뜸 뜬금없는 대답이 돌아오자, 흑현귀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신기하다고?]
“꼭 죽을 예정인 놈들이 항상 너처럼 말하더라고. 내 세계에선 그걸 ‘클리셰’라고 하지.”
[…….]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소리인지라 흑현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역시 네놈은 그냥 죽여서는 안 되겠어. 그 얼굴로 울고불고 짜는 꼴을 봐야겠군.]
쿠구구구구구-!!
흑현귀의 전신에 일렁이던 마기가 한층 더 난폭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안 그래도 어두웠던 주변이 이제는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시꺼멓게 물들었다.
루스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게 시작되리라는 직감을 느꼈다.
[내가 왜 마족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제라고 불리는지, 지금부터 보여 주도록 하마!]
둥-!
수천 개의 종이 동시에 울린 듯한 굉음과 함께, 온 사방에 시뻘건 핏줄이 도드라진 ‘눈동자’들이 나타났다.
그뿐이었다.
눈동자들은 딱히 물리적인 위해를 가해 오진 않았다. 그저 부릅뜬 채 서늘한 안광을 빛내기만 할 뿐.
한데 그 순간.
“아, 아아…….”
레이는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털썩 쓰러졌다.
사방에 나타난 저 눈동자들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오싹함이 전신을 덮쳤다.
‘뭐, 뭐, 뭐지?’
이빨을 딱딱 부딪치는 레이의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분명 물리적인 데미지는 없었는데, 몸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단두대 아래에 선 기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둔 것만 같은 무력감 때문에 손발이 덜덜 떨렸다.
[‘두려움’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감정이지.]
섬뜩한 안광을 빛내는 눈동자들 속에서, 웃음 섞인 흑현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나는 그 두려움을 극한까지 증폭시킨다. 정신력이 강철처럼 단단하지 않은 이상에야, 그 누구도 내 능력에서 벗어날 수는……?!]
그때.
자신만만하게 떠들던 흑현귀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네놈, 어떻게……?]
무슨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선 루스를 발견했으니까.
흑현귀의 능력에 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사방에 나타난 저 눈동자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쉽게 말해 눈을 감으면 된다는 의미.
한데 루스는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시퍼렇게 두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두 발로 서 있었다.
두려움에 잡아먹힌 낌새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내 능력에서 벗어난 거냐!]
“딱히 벗어날 생각도 없었는데.”
애당초 루스에겐 먹힐 리가 없는 능력이었으니까.
‘철혈심’이 있는 그에게 두려움이란 감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루스가 지닌 ‘철혈심’은,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
정신 공격을 반사하는 효과.
본래 루스가 느꼈어야 할 두려움은 고스란히 흑현귀에게 되돌아왔다.
생애 처음으로 느껴지는 압도적인 공포심이 흑현귀의 몸을 비틀거리게 했다.
[이런 빌어먹……!]
흑현귀는 황급히 능력을 해제했다. 사방에 나타났던 눈동자들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거기서 빈틈이 나타났고, 루스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빠지지지지직-!!
루스가 ‘유혈성천’을 내뻗어, 비틀거리는 흑현귀를 향해 두 번째 ‘흑뢰섬’을 날렸다.
흑현귀가 뒤늦게 아까처럼 몸을 비틀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콰즉……!!
[크악!]
섬전처럼 날아든 ‘흑뢰섬’이 흑현귀의 오른쪽 옆구리와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시커먼 핏물이 흩뿌려지며 흑현귀의 몸이 열 걸음도 넘게 뒤로 밀려났다.
[좋다…….]
고오오오-!!
마기를 일으켜 재빠르게 상처를 회복한 흑현귀가 살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어지간한 수법엔 당하지 않는다 이거지! 그렇다면 내 손으로 직접 네놈의 몸뚱이를 갈라내 주마!]
화르륵-!!
흑현귀가 손을 뻗자 시커먼 화마가 뒤덮인 채찍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은 오늘 나를 만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세찬 노성과 동시에, 검은 채찍이 날카로운 파공성을 터뜨리며 휘둘러졌다.
채찍은 마치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복잡한 궤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정확히 루스의 목을 노렸다.
“다 보여.”
루스는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선 채찍을 향해 ‘유혈성천’을 휘둘렀다.
카아아아앙-!!
머리 위로 떨어지던 검은 채찍이 진홍빛 검신과 충돌하며 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 틈에 루스는 ‘참격의 길’을 발동했다. 최적의 검로를 알려 주는 붉은색 선을 따라, 미끄러지듯이 지면을 질주하며 검격을 쏟아부었다.
아니, 쏟아부으려고 했다.
[네놈은 내 몸에 흠집 하나 낼 수 없을 거다!]
휘리릭-!!
흑현귀가 채찍을 쥔 오른손을 뒤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옆으로 튕겨 나갔던 채찍이 물리적으로 가능할 수가 없는 궤적을 그리며 루스의 측면을 노렸다.
“쯧.”
루스는 혀를 차고선 쇄도를 멈추고 채찍을 막았다.
까가가가강-!!
길쭉한 채찍이 검신을 긁자 시뻘건 불똥이 튀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기의 화염으로 뒤덮인 채찍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마구잡이로 맹공을 퍼부어 왔다.
카강! 캉!! 카가가각-!!
루스가 아슬아슬하게 채찍을 쳐낼 때마다 그 충격으로 주변의 지면이 으깨지고 불똥이 눈발처럼 흩날렸다.
‘……맙소사. 저 악마랑 대등하게 싸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