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어?”
“…….”
<암혈회>와 빌르옥트의 마법사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불길에 휩싸인 채 추락하던 ‘먹구름’ 다섯 척이 어두운 마해 속으로 침몰했다.
그것은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루스가 소환한 정령이 힘을 한 번 발한 것만으로, 빌르옥트의 결전 병기가 불붙은 휴지 쪼가리처럼 허무하게 파괴된 것이다.
“아, 아니. 잠깐만. 진짜?”
“내, 내가 뭘 잘못 본 건가?”
“X됐다…….”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광경 앞에 <암혈회>와 마법사들이 당황했다.
앞서 ‘먹구름’의 위력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그들이기에, 경악은 더욱더 크게 다가왔다.
특히 이사벨은 온몸에 핏기가 싹 사라진 사람처럼 낯빛이 새파래져 있었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던 방금 전과는 180도 다른 모습.
‘잠깐만, 일이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는데……?’
워릭 빌르옥트로부터 대여받은 ‘먹구름’은 루스 프리드를 죽일 비장의 한 수였다.
아무리 기욤 나딜란을 혼자서 죽인 괴물 같은 꼬맹이라고 해도.
작정하면 하루 만에 제국 하나를 멸절시킬 수 있는 마도 공학의 결정체를 홀로 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기에.
설령 단원들이랑 마법사들이 전부 당하는 사태가 벌어져도 ‘먹구름’만 무사하면 루스 프리드 따윈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그러한 판단하에 100%의 승리를 장담하고 이곳에 왔건만.
“이러면 안 된다고!”
설마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먹구름’을 잃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야말로 최악이라는 표현도 부족한 사태.
“선조시여…….”
“아아!”
지독한 절망에 빠진 <암혈회>와 마법사들과는 달리, ‘칼날 늑대’의 부족원들은 눈물을 흘리며 탄성을 터뜨렸다.
모든 걸 내려놓는 순간 기적이 찾아왔으니 당연한 반응.
바에로크 또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엉엉 울었다.
절망과 고통의 눈물이 아닌, 어둠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을 발견한 희망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쉼 없이 흘러내렸다.
‘헤, 헤일로……. 정말로 천뢰여왕과 계약하셨구나.’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루스가 선조의 환생이라지만, 이미 500년이나 자취를 감춘 정령왕이 그와 함께해 줄지.
하지만 루스는 그런 자신의 걱정을 비웃듯 천뢰여왕과 계약하여 또다시 부족을 구원했다.
두근, 두근, 두근-.
바에로크는 도무지 심장의 두근거림이 멎지를 않았다.
옛날이야기로만 접해 온 전설 속 정령을 실제로 마주하게 됐다는 영광보다, 그런 정령을 다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루스에게 더 큰 전율과 경악을 느꼈다.
‘역시 저분은…… 카라 님의 환생이 맞으시다!’
안 그래도 100% 확신하고 있었지만, 이로써 500% 확신하게 된 바에로크였다.
-명하신 대로 떨어뜨렸어요, 주인님.
헤일로가 날개 위로 난폭한 뇌전을 불태우며 <암혈회>와 마법사들을 곁눈질했다.
-저놈들도 튀겨 버릴까요?
“아니.”
루스는 손을 들어 헤일로를 말렸다.
의욕 과다인 건 좋지만, 이렇게 적과 부족원들이 뒤엉킨 상태에서 벼락을 떨어뜨렸다가는 휘말리면 안 될 이들까지 휘말릴 위험성이 컸으니까.
게다가 헤일로는 그 가공할 전투력만큼이나 한 번 능력을 쓸 때마다 주인인 루스에게 어마어마한 정신력을 요구했다.
엔투르가 냉기 마법을 쓸 때마다 느끼는 가벼운 현기증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방금도 ‘먹구름’을 격침할 때 루스 본인까지 벼락에 맞은 듯한 강한 두통을 느꼈다. 강하지만 여러모로 해로운 새였다.
“저놈들은 내가 튀길 거야.”
<암혈회> 떨거지랑 마법사 나부랭이 몇 마리 상대하는 건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다.
루스의 여유만만한 태도가 이사벨의 심기를 자극했다.
“죽여……!”
터질 것처럼 굵은 힘줄이 이사벨의 이마 위로 불거졌다.
“뭐 하냐고, 이 새끼들아! 당장 죽이라고!”
부단장인 그녀의 외침에도 <암혈회>의 단원들은 좀처럼 나서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루스 프리드는 자기들 조직 보스를 단신으로 죽인 데다, 빌르옥트의 결전 병기를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처박은 괴물이다.
그런데 과연 자신들이 한꺼번에 덤빈다고 해서 저 괴물을 상대할 수나 있을까?
그 정도 계산도 못할 만큼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기다리다 잠들겠네. 대체 언제 올 거냐?”
루스는 얼빠진 얼굴로 서로 눈치만 살피는 단원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 오면 내가 먼저 간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콰아아아아앙-!!
루스는 장검의 형태를 갖춘 <유혈성천>을 내질렀다.
<참격의 길>을 따라 뻗어 나간 핏빛 검격에, 서른 명의 단원들이 한꺼번에 분쇄되며 날아갔다.
“끄어억…….”
“으, 으아아……!”
“미, 미친…….”
일검에 동료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광경에, 곳곳에서 경악성이 난무했다.
그렇지 않아도 겁에 질린 단원들은, 이제는 아예 전의를 상실한 상태.
쾅!
물론 적이 전의를 잃든 말든 사정을 봐줄 루스가 아니었다. <마광비로>를 펼치며 진각을 밟아, 운 좋게 살아남은 놈들과 거리를 좁히던 찰나.
화르륵-!!
흑적색 불길에 휩싸인 채찍과 화살들이 양쪽에서 날아왔다.
검을 회전시켜 맹공을 막아 낸 루스의 앞으로, 일반 단원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세를 품은 남자와 여자가 다가왔다.
“말단 새끼들은 몰라도, 간부인 우리까지 쫄면 안 되지.”
“회주님의 복수를 해 주마!”
으르렁거리는 그 둘을 이어, 다섯 명의 남자가 추가로 루스를 에워쌌다.
<암혈회>에는 총 여덟 개의 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루스가 얼마 전에 죽였던 글라우코와 같은 조직 내 간부들이었다.
포위당한 루스가 무심한 눈길로 일곱 명의 간부를 훑어보던 그때.
콰아아아아-!!
지면을 녹이며 올라온 시커먼 줄기들이 루스의 전신을 칭칭 휘감았다.
“지금이야! 공격해!”
‘독사의 단’의 조장 도노반이 간부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그가 펼친 것은 <다크 스탬>. 검은 줄기에 사로잡힌 상대를 일시적으로 경직시키는 사특한 흑마법이었다.
상대를 무조건 속박시킨다는 장점이 존재하는 대신, 시전 시간이 길고 본인도 움직임에 제한이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 또한 존재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무의미한 단점이었다. 자신이 루스를 붙드는 동안 나머지 간부들이 그를 죽이면 그만이니까.
“<다크 스탬>! 잘했다, 도노반!”
“크하하! 이걸 못 죽이면 병신이지!”
여섯 명의 간부가 동시에 루스를 향해 집중포화를 쏟아 냈다. 흑마력에 뒤덮인 채찍과 화살, 검은 벼락 다발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루스에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기욤 나딜란이 대단한 거였군.”
촤아아악-!!
몸에 힘을 주어 아무렇지도 않게 줄기를 찢어 낸 루스가 <서리 이빨>의 네 번째 초식인 <풍설>을 펼쳤다.
“간부들조차 이렇게 병신인데, 용케도 조직을 대륙 최고의 규모로 키워 냈잖아.”
쩌저적-. 콰직-!!
나선을 그리며 휘몰아친 백색의 참격이 다섯 간부의 합공을 순식간에 깨부수고 그들의 몸뚱이까지 일격에 반 토막 냈다.
툭, 투둑-!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핏물들 사이로 싸늘한 안광을 빛내는 루스의 눈이 도노반을 향했다.
“안 그래?”
“어, 어떻게 <다크 스탬>에서 벗어난 거냐……!”
도노반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턱을 덜덜 떨었다.
<다크 스탬>에 한 번 속박당하면 적어도 30초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해야 할 텐데.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답은 간단했다.
모든 공격에 저항력을 갖추게 하는 ‘철혈’ 스탯.
그리고 흑마법에 한정해선 무적에 가까운 방어력을 끌어내는 성기사 스킬, <은혜>의 콜라보였다.
하지만 그 정답을, 이제 곧 이승 하직할 놈한테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궁금하면 저승사자한테 물어봐.”
촤악-!!
루스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도노반의 머리통을 절반으로 시원하게 갈랐다.
대륙 최악의 암흑 조직의 간부 전원이 3분도 안 되어서 전멸당하는 순간이었다.
<두 살짜리 갓난아기도 네놈보다는 성장 속도가 느릴 것이니라.>
뒤통수에 깍지를 낀 채 눈앞의 학살쇼를 느긋하게 구경하던 엔투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간부 한 명도 진지하게 싸워서 겨우 이긴 게 엊그제 같은데. 대체 그동안 얼마나 좋은 것들을 많이 처먹었으면 간부 여섯을 한꺼번에 상대하는데도 땀방울 하나 안 흘린단 말이냐.>
“칭찬은 고마운데 너는 왜 아까부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
<어차피 이 몸이 나서지 않아도, 네놈 혼자서 다 쓰러뜨릴 수 있으니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린 루스는 속으로 엔투르의 평가를 다시 서당 개 미만으로 떨어뜨렸다.
그때.
콰아아아아아앙-!!
뒤에서 날아든 거대한 불덩어리가 루스를 강타했다.
빌르옥트의 마법사들이 날린 기습, <블레이즈 캐논>이었다.
‘됐다!’
‘정통으로 맞았어!’
불덩어리가 정확히 루스를 집어삼키는 모습을 확인하고 마법사들이 쾌재를 불렀다.
<블레이즈 캐논>은 웬만한 드래곤 브레스에도 뒤지지 않는 위력을 지닌 고등급 살상 마법이다.
그것을 어떠한 기운도 두르지 않은 채 맨몸뚱이로 맞은 이상, 놈이 살아있을 확률은 티끌만큼도 없다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