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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사, ‘사면의 인’이 어째서 그대에게……?!」
사정없이 떨리는 1급 집행관의 눈빛이, 저 천칭 위에 우두커니 선 루스를 올려다보았다.
같은 성좌들조차 감히 눈도 못 마주치는 존재인 1급 집행관을, 한낱 하계종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모양새였지만…….
집행관은 그에 대해 별다른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겨우 그딴 걸 신경 쓰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동산>의 천사들이 그대에게 ‘사면의 인’을 준 건가? 아니, 하지만. 일평생 선업을 쌓지 않은 이상에야 그들도 함부로 하계종에게 ‘사면의 인’을 선사하지는 않을 텐데, 도대체…….」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
“집행관님께서는 방금 정당한 절차조차도 무시한 섣부른 판결로, 면죄부를 가진 인간을 심판하려고 했습니다.”
1급 집행관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성칭’이 저 인간의 무죄를 증명한 이상, 이쪽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황의 주도권이 완전히 루스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사과하라는 요구는 안 하겠습니다. 그 대신, 아까 저랑 한 약속은 지키셔야지요.”
굴종의 반지.
루스가 죄가 없음이 인정되면 건네주기로 약속했던 내기의 보상.
빠득!
어금니를 사납게 깨무는 소리와 함께, 황금 가면 너머로 드러난 집행관의 눈에 독기가 바짝 올랐다.
<굴종의 반지>는 집행부가 소유한 마도구 중, 값어치로만 따지면 거의 최상급에 속한 아이템이었으니까.
근데 그걸 하계종한테 넘겨야 한다니. 1급 집행관으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알겠…… 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약속은 약속인 것을.
루스 혼자만 있다면 모를까, 이곳에는 데미안이랑 비스마르크까지 있었다.
지금 와서 약속을 어기면 그게 더 명예를 구기는 짓일 터.
치이이잉-!
집행관의 옆으로 자그마한 차원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루비처럼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 하나가 소환되었다.
반지는 저절로 허공으로 둥실 떠올라 루스에게 날아갔다.
빠르게 손을 뻗어 <굴종의 반지>를 낚아챈 루스가 시스템으로 아이템 정보를 감정했다.

=====
【굴종의 반지】
등급: 신물
-대신전 집행부의 최상급 마도구.
-반지에 힘을 불어넣을 경우, 반지에 내장된 ‘굴종의 인’이 발동합니다.
-‘굴종의 인’은 최대 다섯 명에게까지 새길 수 있으며, 각인된 대상들은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20% 하락합니다.
=====

똑같은 시스템 창을 바라보던 엔투르가 깜짝 놀랐다는 듯이 입을 쩍 벌렸다.
고대룡인 그녀로선, <굴종의 반지>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마도구인지 루스보다 잘 알면 알았지, 모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것도 아니고, 영구적으로 적들의 힘을 약화한다고? 뭔 이 쥐똥 크기만 한 반지에 그딴 사기 같은 저주 능력이 깃들어 있느냐!>
‘그러니까 저 집행관 놈이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 아니겠냐.’
그냥 반지에 약간의 혈기를 주입하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굴종의 인’이 발동하는 데다가, 지속 시간마저 영구적이다.
앞으로 루스가 미친 드래곤이랑 싸우든, 7대 거악이랑 싸우든, 마황이랑 싸우든지 간에.
무조건 상대방의 능력치를 먼저 너프시키고 전투를 시작할 수 있다는 말.
‘목숨값에 부합하는 아이템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만약 ‘사면의 인’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꼼짝없이 집행관에 의해 영혼이 찢기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으리라.
그걸 따지면 <굴종의 반지> 같은 사기 아이템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사면의 인’을 썼으니 넘어가겠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해라. 무슨 일이든지 간에 하계종이 대신전에 깊숙이 관여하는 건 별로 현명하지 못한 행위이니.」
1급 집행관은 그런 말을 남기고서는, 처음 현신했을 때 사용했던 차원문을 다시 소환했다.
이내 활짝 열리는 차원문을 넘어 모습을 감추는 1급 집행관.
그가 소환했던 ‘성칭’도 빛의 입자로 쪼개지며 소멸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끝까지 안 하는군. 빌어먹을 놈이로다.>
‘뭐, 됐어. 뜯어낼 건 전부 뜯어냈으니까. 그보다…….’
루스는 <파르키온의 유산>을 장착하지 않은 손가락인, 오른손의 약지 쪽에 <굴종의 반지>를 끼우며 시선을 돌렸다.
가장 급한 불은 어찌어찌 해결했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바로 루스를 처리하기 위해 달려온 골렘들.
고오오오-.
데미안과 비스마르크도 아직 골렘 군단이라는 고비가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죽다 살아난 루스에게 괜찮냐고 묻는 대신, 신력을 끌어올리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산 넘어 산이로군요. 비스마르크랑 제가 어떻게든 막아 보겠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께서는-.」
데미안의 말에 마침표가 찍히기도 전에.
쿵-! 쿵-! 쿵-!
갑자기, 황금 골렘들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두 눈에 발하던 적색 안광을 꺼뜨리면서.
결사 항전을 각오했던 데미안과 비스마르크가 의아해하기를 잠시.
그 둘은 곧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아악-.
온통 황금으로 치장된 방 안이, 물이 빠지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금빛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성역에 흐르는 신력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채색이 되어 버린 공간을 둘러보며, 비스마르크가 중얼거렸다.
루스는 마찬가지로 색을 잃고 기동을 멈춘 골렘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주시자가 죽고 시간이 지나면서, 놈의 성역 자체가 힘을 잃은 건가.”
「골렘들이 쓰러진 이유도 알겠군요. 각 성역의 파수꾼들은, 해당 성역으로부터 생명력을 얻으니까요.」
데미안이 쓰러진 골렘의 몸뚱이를 발로 툭 찼다.
「집행관이 나타난 게 오히려 시간 벌이가 되어 준 셈이군요. 아무튼, 여기서 빨리 벗어나시죠. 아버지.」
“기다려 봐라. 챙길 것들이 있으니까.”
파수꾼도 전부 무력화되었겠다, 딱히 급하게 여길 벗어나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갈 땐 가더라도 챙길 건 챙겨야 하는 법.
루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를 잠시, 그는 무채색의 방 한편에 마련된 거대한 문 하나를 발견했다.
‘주시자의 보고(寶庫).’
<만리의 주시자>는 세계 각지를 관측할 수 있는 ‘주시의 권능’을 지녔다.
그런 그가 대륙 곳곳의 보물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노릇.
저 보고에는, 그렇게 주시자가 지금껏 수집해 왔던 보물들이 한가득 보관되어 있었다.
‘만왕전’의 우승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 또한, 저 보고가 출처였고.
‘원래는 주시자의 신력이 자물쇠 역할을 하지만…….’
성역이 힘을 상실한 지금, 보고 또한 제 기능을 잃고 무채색이 된 상태였다.
콰직-!!
루스가 주먹을 날리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철문이 굉음을 내며 으깨졌다.
그리고 자욱하게 피는 먼지구름 너머로, 온갖 화려하고 신비로운 아이템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광경이 드러났다.
다른 이들이 봤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장면이었지만…….
덤덤한 눈빛을 한 루스의 관심은 오로지, 산더미 같은 아이템들 사이로 덩그러니 놓인 금색 돌덩이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루스가 다가가서 돌덩이를 집어 들자, 엔투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그 돌쪼가리가 네놈의 선택은 아니겠지?>
‘맞다. 왜냐하면 이게 만왕전에서 1등 한 참가자한테 주어지는 보상이거든.’
<엥? 이게? 어째서?>
루스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며 돌멩이의 정보를 활성화했다.

=====
【금신석】
-밤에만 1% 확률로 나타나는 환상의 관상, ‘사카레이온’의 심층에 매장된 광물입니다.
-정밀한 솜씨로 세공할 경우, 광물 속에 봉인된 ‘룬 마법’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룬 마법’이 적용된 아이템은 기존보다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억…….>
<금신석>의 쓰임새를 알게 된 엔투르는, 이제는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템 효과도 아니고 아예 ‘등급’ 그 자체를 올려 주는 광물이라니.
등급이 오르면 자연히 기존 아이템 효과들도 더욱 업그레이드될 테고.
어쩌면 아예 새로운 아이템 능력이 생길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과연, ‘만왕전’의 최종 우승자에게 어울리는 보상이 아닐 수가 없다.
‘이걸 어디다 쓸지는, 이미 결정했지.’
루스가 보유한 ‘신물’급 아이템 중 가장 많이 애용하는 아이템은 하나뿐이잖은가.
유혈성천.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언제쯤 벗어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이 오기까지, 루스는 본인이 <유혈성천> 말고 다른 무기를 쓸 것 같지는 않았다.
‘<유혈성천> 이상으로 무한한 잠재력과 사기적인 능력을 지닌 무기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거기에 <금신석>만 있다면.
안 그래도 이미 과할 정도로 사기적인 무기의 한계를, 한층 더 높은 단계로 초월할 수 있다.
‘신물의 다음 레벨이자 히든 등급인, 「규격 외」로 진화시킬 수 있어.’
두근, 두근-.
루스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지금도 이미 미친 아이템인데, 여기서 더 미쳐버린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물론, 금신석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완벽한 세공 작업을 거쳐야 하지만, 그것도 문제없지.’
이 세계에서 최고로 솜씨가 뛰어난 대장장이를 알고 있으니까.
<금신석>을 챙겼으니, 여기서 더는 볼일이 없다.
혹시나 몰라 다른 아이템들도 살펴봤지만, 죄다 가지고 있어 봤자 쓸 일도 없고 ‘홀 포켓’만 무거워지는 물건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