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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사어가 여기 있다는 건 파룸도 여기 있다는 말인데?’
대륙 사방위의 극지(極地)에 한 마리씩 서식하는 최강의 포식자, 사방신수.
‘갉아먹는 파룸’은 그중 동부에 군림하는 신수였다.
……그런데 ‘회오리 동굴’은 남쪽 지역에 있는 마경.
동부 끝에 서식해야 할 ‘갉아먹는 파룸’이 여기에 있을 만한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
‘외신의 알’에 관한 단서만 얻고 조용히 거인들이랑 작별할 계획이었던 루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으며 탄식했다.
온 주변에서 사어가 괴성을 내지르며 날뛰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그는 한탄을 금치 못했다.
이건 뭐, 잊을 만하면 게임 지식을 거스르는 변수가 툭툭 튀어나오니, 이쯤 되면 ‘스오던’이 아니라 다른 게임에 빙의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씨발. 벌써 사방신수랑 싸우게 생겼네.’
사방신수 퇴치도 계획 중 일부이긴 했으나, 이렇게 빨리 싸울 생각은 없었다.
심지어 ‘갉아먹는 파룸’은 그가 없애고자 했던 놈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놈은 네 마리 신수 중에서도 공격 패턴이 특히나 까다로운 축에 속하므로.
원래는 비교적 약한 편인, ‘통곡하는 아미그라’를 사냥하려고 했는데…….
“이런 빌어먹을 물고기 새끼들! 그만 좀 기어 나와라, 제발!”
“크아아아악!!”
그사이, ‘검은 외뿔’의 거인들은 끊임없이 낭떠러지 밑에서 올라오는 사어들과 맹렬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저마다 곤봉과 도끼를 마구 휘두르며 사어들의 격멸에 열을 올렸다.
……아니, ‘격멸’이라는 표현에는 다소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콰직! 콰즈즉-!!
“꺼, 꺼어억……!”
“아아아악!!”
딱 봐도 전황은 명백히 거인들이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하늘을 유영하는 사어들이 피를 발견한 피라냐 떼처럼 거인들의 몸뚱이를 참혹히 뜯어먹었고.
온 사방에서 피 분수와 비명이 난무하며 목숨을 잃는 거인들이 속출했다.
“역겨운 생선 새끼들……!”
처참히 죽어 가는 부족원들을 본 가르몬이 분노했다.
부웅-!
오러가 열화처럼 일렁이는 대형 도끼가 사어들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텅-!
‘검은 외뿔’의 우두머리인 가르몬이 전력을 실어 가한 공격에도, 사어들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기껏해야 비늘에 흠집 몇 줄 새겨졌을 뿐.
“빌어먹을, 난 이래서 이 새끼들이 싫어!”
“생긴 건 잡어 같은 것들이 더럽게 단단해서는……!”
사어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거인들의 입에선 앓는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물론, 거인들이 가하는 데미지가 아예 없지는 않았기에 계속 때리다 보면 몇 마리는 몸뚱이를 축 늘어뜨리며 숨통이 끊어졌다.
하지만 거인들이 열 대 넘게 타격을 가해야 겨우 한 마리를 잡을 동안.
사어들은 그냥 거인들에게 들러붙어 그들의 살점을 이빨로 파먹으면 그만이었다.
이러니 명백히 거인 쪽의 손실이 훨씬 클 수밖에.
“대체 어쩌다 이딴 새끼들이 튀어나와서는-.”
그 짧은 사이에 온몸이 뜯어먹힌 자국으로 가득해진 가르몬이 숨을 몰아쉴 무렵.
저벅-.
자그마한 인간의 발소리가 가르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루스가 사어들이 활개 치는 수라장 사이로 난입하면서 낸 발소리였다.
가르몬이 성가시다는 듯이 루스를 쏘아보며 호통쳤다.
“루스 프리드! 네놈은 그냥 구석에 숨어 있어라! 거인인 우리도 상대하기 버거운 놈들인데, 네까짓 게 도와 줘 봤자……!”
퍼어어어어어엉-!!
굉음이 울렸다.
나선을 그리며 전방으로 내뻗친 폭풍이, 사어들을 갈가리 찢어발기면서 일어난 굉음.
-키에에엑…….
-켜어어어억…….
거인들이 온 힘을 다해 가한 공격도 버텼던 사어들이,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지면에 툭, 툭 떨어졌다.
어느덧 양손에 건틀릿을 장착한 루스가, 권풍(拳風)을 내쏘아 놈들을 초살한 것이다.
휘오오오오오-!!
루스가 착용한 <미완성된 지벌> 위에는, 녹색의 선풍이 휘감긴 상태였다.
‘평범한 물리 공격으로는 사어를 쉽게 잡을 수 없지.’
사어는 ‘특정 기운’에 취약한 개체이므로.
그리고 놈들에게 상극이 되는 기운은 바람.
풍(風) 속성이었다.
퍼어어어어엉-!!
<만상 횃불>로 풍 속성의 힘을 건틀릿에 인챈트 한 루스는, 사방팔방으로 권풍을 내쏘아 사어들을 휩쓸었다.
굳이 <유혈성천>이 아니라 <미완성된 지벌>을 택한 이유는, 단단한 외피로 둘러싸인 놈들의 특성상 타격계 무기가 훨씬 잘 먹히기 때문이었다.
띠링!

[<미완성된 지벌>의 완성도가 상승합니다!]
[완성도: 95.48%]

거기에 흉악한 파괴력이 깃든 녹색 질풍이 사어들을 연달아 찢을 때마다 시스템 메시지가 쉴 새 없이 허공을 수놓았다.
빠르게 올라가는 수치를 본 루스는, 이참에 여기서 최대한 완성도를 높여야겠다고 결심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키이이이이이……!
급작스레 전세가 역전되자 사어들이 몸서리치며 루스로부터 거리를 벌렸으나.

[스킬, ‘검령 소환’이 발동됩니다!]

콰즈즈즉-!!
헛된 발악이었다.
루스의 등 뒤로 나타난 ‘검령’이 공격 범위를 폭발적으로 넓히며, 도망치는 사어들을 후려갈겼기 때문이다.
루스가 권풍을 한 번 내지르면, 후방의 ‘검령’ 또한 똑같이 권풍을 쏘아낸다.
한 번의 주먹질에, 두 갈래의 폭풍이 휘몰아치며 사어들을 집어삼키는 격이다.
그에 더해.
꽈르르르르르릉-!!
이따금 1% 확률로 건틀릿에서 터지는 뇌전이 전방위로 뻗어 나가며 사각에서 덤벼들던 사어들을 통구이로 만들었다.
수백 마리가 넘는 사어들이, 고작 인간 한 명에 의해 속절없이 쓸려 나간다.
마치 송사리만 가득한 바다에 상어가 난입한 것처럼.
“왜, 왜 저 녀석이 하는 공격엔 꼼짝도 하지 못하는 거지?”
“설마 저 인간이 거인인 우리보다 강하다는 건가?”
“하위종이? 그,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한편, 거인들은 넋이 나간 표정이 되어 루스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족장인 가르몬도 곤욕을 치러야 했던 사어들을, 무슨 지렁이 죽이듯 가뿐하게 죽여 나가는 루스의 모습에 머리가 하얘졌다.
가르몬 또한 턱을 바르르 떨며 굳어 있다가, 고개를 휘젓고선 용맹하게 외쳤다.
“멍하니 구경만 하지 말고, 가세하라!”
“가세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루스의 단호한 으름장에 가르몬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0.1%라도 완성도를 높여야 했던 루스로선 도움도 안 되는 것들이 방해하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 * *

그렇게 루스가 사어들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처리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어들의 괴성으로 가득했던 동굴 내부에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거인들은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참혹한 광경이었지만, 루스가 없었더라면 시신을 수습하는 거인보다 수습당하는 시신들이 훨씬 많았으리라.
“네게 감사를 표한다, 루스 프리드. 네가 있어서 그나마 이 정도 선에서 끝날 수 있었어.”
가르몬이 몸 곳곳에 붕대를 감은 모습으로 루스에게 다가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루스는 그 말에 뭐라 화답하는 대신, 바닥에 널브러진 사어 시체를 발로 툭 차더니 한숨을 흘렸다.
“……‘심층’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이유가 이 녀석들 때문이었군요.”
“그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동쪽에 있어야 할 파룸이 갑자기 1년 전에 공간을 찢고 ‘심층’에 나타났다. 보겠나?”
가르몬은 그렇게 말하더니 몸에 걸친 가죽 갑옷의 품속에서 야명주 하나를 꺼냈다.
새하얀 형광을 빛내는 구슬 너머로 ‘심층’의 풍경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것은 루스가 기억하는 ‘심층’의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씨발. 진짜 파룸이네.’
곳곳에 은은한 빛을 발하는 수정석이 박힌 공동의 중심에.
사어를 수백 배로 확대한 것처럼 거대한 인면어(人面魚)가 떠다니고 있었으니까.
‘갉아먹는 파룸’이었다.
“저놈이 외부의 접근을 막는 역장을 ‘심층’에 설치한 탓에, 우린 벌써 1년째 거신께 제사도 못 드리고 있다네.”
“…….”
“게다가 오늘처럼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파룸이 제 새끼들을 우리 쪽으로 쏟아 내느라 여긴 지옥이나 다를 바가 없어졌어.”
“역장이 ‘심층’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다면, ‘파룸’을 직접 처리하는 것도 불가능하겠군요.”
“그래.”
가르몬은 침통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답했다.
대화가 끊기자 루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파룸’이 ‘심층’에 나타나든 말든 루스가 알 바는 아니었다.
물론, <인페르노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사방신수를 모두 죽여야 하는 건 사실이다.
놈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대륙에 강림한 마황이 사방신수를 병기처럼 써먹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