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주, 죽은 거야. 저 녀석?”
“……이렇게 허무하게?”
“맙소사…… 진짜로 혼자서 다 쓸어버리셨잖아.”
무너진 역장 바깥에서 루스와 글라우코의 전투를 지켜보던 제국 병사들은 쉴 새 없이 온몸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세상 그 누구라도, 방금 루스가 펼쳤던 무위를 눈에 담는다면 똑같은 감상을 느꼈을 터.
글라우코는 분명 자신을 <암혈회>의 단장이라고 소개했다.
한데 루스는, 그런 글라우코를 무슨 어린애를 가지고 놀 듯 농락하며 가뿐하게 쓰러뜨렸다.
약하게 스친 상처 하나를 제외하면, 너무나도 멀쩡하게.
더군다나 적이 죽어 가는 순간까지 고통을 안겨주는 무자비한 손속.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 저 어린 나이에 그런 비정상적인 무력과 성정을 갖출 수 있는 걸까.
병사들은 달려가서 물어보고픈 심정을 겨우 억누르는 가운데.
“가만히 서 있지 마라, 다들. 마무리된 거 안 보이나? 얼른 여길 정리하고 복귀한다.”
“예, 옙!”
오직 뮬턴만이 침착한 표정으로 병사들에게 현장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니. 방금 그 장면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고?’
‘강자란 것들은 사고방식이 일반인이랑은 다른가?’
병사들은 방금 같은 말도 안 되는 싸움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도 태연한 뮬턴이 새삼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뮬턴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뿐만이 아니라 속으로도 태연했다.
‘여기 있는 게 내 기사단 녀석들이었다면, 저 정도로 크게 놀라진 않았을 테지.’
그 녀석들은 ‘질곡의 땅’에서 루스가 무슨 짓까지 해냈었는지 똑똑히 봤으니까.
루스는 그 오각수와의 사투에서도 끝내 승리한 강자다.
그에 비해, 고작 흑마법사 몇 마리 박멸하는 일? 루스에겐 일이라는 표현도 아깝다.
상념을 접은 뮬턴은 병사들을 이끌고 시체가 널브러진 현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툭. 훌륭한 싸움을 보여 준 루스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수고 많았네, 루스. 제국이 또 그대에게 빚을 졌군.”
“예.”
“이후의 일은 우리가 다 할 테니 그대는 쉬고 있게.”
“예.”
영혼 없는 목소리로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루스.
뮬턴은 어딘가 좀 멍해 보이는 그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그냥 그러려니 하고 피투성이가 된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감정 표현이 극히 적은 소년인지라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루스는 지금 정말로 살짝 멍한 상태였다.
2차 전직 퀘스트가 활성화했다는 메시지.
정확히는 그 메시지 아래로 새로이 나타난 시스템 창 때문이었다.

=====
<2차 전직 퀘스트 - 올마스터>
내용: 올마스터의 육체에 새로운 각성의 길이 열렸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들을 달성하여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손에 넣으십시오.
- 사방신수 중 일수(一獸) 처치: 미달성
- 악신 계통의 성좌 처치: 미달성
- 정점에 오른 자들로부터 인정받기: 미달성
보상: 2차 전직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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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타난 메시지는 퀘스트의 상세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읽은 루스의 반응은-.
‘뭔 미친…….’
그럴 수밖에.
2차 전직을 하려면 퀘스트가 요구하는 세 가지 업적을 모두 하는데…….
그 내용들 하나하나가 극악무도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사방신수에다가 성좌를 없애라고? 이게 지금 레벨 40짜리한테 요구할 퀘스트인가?’
40레벨이 아니라 80레벨이어도 성공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사방신수도 사방신수지만, 대신전에 오른 인간도 아닌 자신에게 성좌를 죽여 보라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인 걸까?
‘성공하라고 준 퀘스트가 맞는지 의심이 가는군.’
<왜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냐? 악신계 성좌라면 네놈도 전에 죽여 본 적이 있지 않더냐. 이 몸이 설계한 시련에서. 어디 보자, 그놈 이름이 발기우스였나?>
‘……벨기우스다. 그때는 상황이 특수했기에 죽일 수 있었지. 엔투르 네가 나한테 영력을 모두 몰아줘서 겨우 무찌를 수 있었어.’
루스는 전에도 ‘엔투르의 시련’에서 마르티에가 강신시킨 악신 성좌를 죽인 전적이 있었다.
그때와 같은 행운과 우연이 또다시 찾아오지 않는 이상.
아무리 최강의 잠재력을 지닌 올마스터라고 해도 성좌를 죽이는 건 불가능-.
‘……아니지. 퀘스트는 절대로 플레이어에게 불가능한 과업을 요구하지 않아.’
언뜻 불가능해 보여도 결국엔 성공할 길이 존재하는 시련을 제시한다.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저 요구 조건을 달성할 기회가 찾아오리라.
루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을 읽어 내려갔다.
‘근데 이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정점에 오른 자들로부터 인정받으라니…….’
비교적 내용이 직관적인 다른 두 조건에 비해, 이건 좀 모호하지 않나?
일단 ‘정점에 오른 존재’라는 부분부터가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뭐 어디 9성급 무인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성좌들을 말하는 건지…….
깊은 고민에 빠진 루스와는 달리, 엔투르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쾌활하게 외쳤다.
<에이 뭐야, 이거는 너무 쉽지 않더냐!>
‘뭐?’
<그냥 말 그대로 높은 곳까지 올라간 자에게 인정받기만 하면 끝나는 문제 아니더냐! 그렇다면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달성할 수 있지!>
‘여기 높은 곳까지 올라간 자가 누군데? 뮬턴?’
<아니!>
루스의 질문에, 엔투르가 뿌듯하게 콧김을 내쉬며 엄지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바로 이 몸!>
“…….”
<태고룡과 견줄 수 있는 용족의 정점! 아름답고도 위대한 고대룡이신 이 몸이 네놈을 인정하노라!>
루스는 하나도 기대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혹시나 해서 퀘스트 창을 힐끔거렸다.

- 정점에 오른 자들로부터 인정받기: 미달성

<어째서!>
절규와 함께 시스템 창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엔투르를 무시하며, 루스는 하던 고민을 마저 이어 나갔다.
‘정점에 오른 자들…… 복수형이군.’
개인이 아닌, 다수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말.
게다가 시스템이 대놓고 ‘정점’이라고 공언할 정도의 존재라면, 잘 생각해 보니 후보군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첫 번째 후보는. 생전에 희귀한 업을 쌓아, 죽어서 신과도 같은 위상을 갖춘 존재. 성좌.
그리고 두 번째 후보는.
‘<검림>의 영령들.’
오직 검술 하나에만 일생의 영혼을 불태워, 그 자체만으로도 위업으로 인정받아.
끝내는 ‘성좌와는 별개의 초월자들’로 취급받게 된 <검림>의 영령들.
‘어느 쪽이든 가능성이 있군.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인정받아야 할 쪽은…….’
두 번째 후보.
바로 <검림>의 영령들이었다.
그야, <검림>은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시작하기에 앞서 반드시 들러야 할 다음 행선지였으니까.
어차피 제국에서의 일만 마무리되면 바로 그곳으로 떠날 생각이긴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그래서…….’
루스의 눈길이 마지막, ‘보상’ 부분으로 내려갔다.
‘2차 전직을 하면 정확히 뭐가 좋은지는, 명시되지 않았군.’
아무래도 전직 퀘스트를 끝내야 알 수 있는 모양.
하지만 자세한 건 알 수 없어도, 이 ‘2차 전직’이란 것이 자신에게 이전엔 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으로 인도해 주리란 건 확실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스템에 적혀 있지 않은가.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힘을 손에 넣으라고.
‘아직 올라갈 곳이 많다. 고인물인 나도 모르는 새로운 영역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호기심. 그리고 기대감이 뒤섞이며 가슴이 뛰었다.
퀘스트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모두 달성할 날을 맞이하려면 한참 멀긴 했지만, 그래도 언젠간 때가 오리라.
그 사실이, 루스의 의욕을 뜨겁게 불태울 무렵.

[‘유혈성천’이 강력한 무구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유혈성천’이 ‘디케이 사이드’를 포식합니다!]

……꿀꺽! 꿀꺽!
루스가 열심히 2차 전직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유혈성천>은 열심히 식사를 즐기는 중이었다.
녀석이 글라우코가 쓰던 대낫의 흑마력을 허겁지겁 빨아들이기를 잠시.

[‘유혈성천’이 성장합니다!]
[‘유혈성천’에 새로운 특성이 추가됩니다!]

‘역시 귀물급 아이템.’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드는 소식이 나타났다.
귀물급 아이템이니, 이걸 포식하면 <유혈성천>이 성장하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일 줄이야.
루스는 어떤 특성인지 곧장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루스는 똑바로 본 게 맞는지 의심하듯이 눈을 감았다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