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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짧게 친,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 머리칼.
다양한 각도에서 보아도 절대 성직자로는 보이지 않는, 칼자국으로 가득한 험상궂기 짝이 없는 얼굴.
그리고 십(十)자 모양을 한 오른눈의 동공까지.
……아무리 봐도 미러가 복제한 대상은 루스가 아니라 ‘스텔라 오브 던전’ 성기사 캐릭터 비스마르크였다.
‘설마?’
미러가 뜬금없이 자신이 아닌 비스마르크로 둔갑하는 걸 보고 처음엔 놀란 루스였으나.
원인을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마 비스마르크의 영혼이 나보다 먼저 싱크홀로 들어와서?’
미러는 싱크홀에 첫 번째로 들어온 대상을 복제한다.
녀석이 복제할 수 있는 대상엔 ‘종족’뿐만이 아니라, 아예 생물과 무생물의 여부까지 가리지 않는다.
영령처럼 물질계에 속하지 않는 존재라도, 생전의 외형을 재현하여 능력치까지 100% 카피할 수 있다.
즉.
미러가 지금 저렇게 된 건, 루스보다 비스마르크의 영혼이 먼저 싱크홀로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럼, 비스마르크의 영혼은 어디에……?’
[이제야 좀 쓸 만해 보이는 녀석이 찾아왔군. 500년 동안 이 안에서 나 혼자 따분해 죽는 줄 알았다.]
철컹!
루스가 석실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흑과 백이 적절히 어우러진 판금 갑옷을 입은 미러가 비스마르크의 목소리로 말했다.
놈은 호승심이 불타오르는 웃음을 씩 지으며 루스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기를 꺼내라, 도전자여. 부디 네놈이 그동안 쌓인 나의 권태로움을 달래 줄 만큼의 실력을 지녔기를 바-.]
“500년 전에 네놈이 복제했던 영혼은 지금 어디에 있지?”
[호오. 내가 복제했던 자가 영령이었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는데, 네놈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
“그만 떠들고 질문에 대답이나 빨리 해라.”
[…….]
미러는 활활 타오르던 전의가 살짝 식는 것을 느꼈다.
2연속으로 말이 끊겨서 불쾌하기는 해도, 딱히 대답 못해 줄 질문은 아니었기에 말해 주었다.
[파묻혀 있다.]
“……파묻혀 있다고?”
고개를 끄덕인 미러가 대뜸 손가락으로 석실의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엔 백금색 기류가 향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루스가 감각을 집중시켜 보니 확실히.
‘느껴진다. 그때 베로니카랑 싸울 때 몸속에서 밀려 들어왔던 그 기운이야.’
<흑수>에 짓눌려 죽을 뻔했을 때.
비스마르크가 힘을 빌려주면서 느껴졌던 것과 똑같은 기운이 저 기류에서 느껴졌다.
루스는 기류가 피어오르는 저 바닥에, 비스마르크의 나머지 영혼이 파묻혀 있다고 확신했다.
[상처투성이에다 영혼의 일부분은 처참히 뜯겨 나간 채 이곳에 봉인되더군. 나를 죽이러 온 도전자인 줄 알고 기대했는데 그냥 갈 길을 잃고 스러진 불쌍한 망혼(亡魂)이었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
[하지만 생전에 뭐 하던 녀석이었는지는 몰라도, 지닌 격 자체는 상당하더군. 심지어 영혼의 일부가 훼손되었음에도 말이야.]
화르륵-.
미러의 머리 위로 불덩어리 같은 아공간이 활짝 열리더니.
……쿵!!
곧 그 안에서, 웬만한 성인 남성의 키보다 크고 거대한 워해머가 떨어져 내렸다.
‘신물’ 등급에 속하는 성기사 캐릭터의 종결급 무기 중 하나- <성스러운 포식자>였다.
[드디어 이 뛰어난 육체를 시험해 볼 상대가 나타나서 매우 기쁘군. 자, 도전자여. 너의 모든 것을 내게-.]
‘신성력 계열 스킬의 위력 70% 증가. 공격할 때마다 3% 확률로 전용 스킬 <신벌> 발동.’
루스는 차분히 <성스러운 포식자>의 아이템 스펙을 떠올리느라 미러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 사실 별로 차분하지는 못했다.
지금부터 자신은 종결급 템 셋팅을 갖춘 적이랑 생사결을 벌어야 한다는 의미였으므로.
‘잠깐, <성스러운 포식자>는 착용 레벨이 분명 90…… 아니었나?’
다시 말하지만, 미러는 복제한 대상의 능력치까지 완벽히 복제한다.
<성스러운 포식자>를 들고 있다는 말은 그럼, 현재 저놈의 레벨이……?
루스의 등골이 오싹해지던 찰나.
[뭘 멍하니 넋 놓는 거냐! 얼른 무기를 들지 못할까!]
후웅-.
도약을 펼친 미러가 가공할 속도로 날아들었다.
신성력이 일렁이는 육중한 워해머가 무시무시한 풍압과 함께 루스의 전신 위로 떨어졌다.
루스는 그 즉시 <마광비로>를 밟아 일격을 피했다.
콰아아아아앙……!!
워해머가 석실 바닥을 강타하자 유성이 충돌한 듯한 충격파가 사위를 휩쓸었다.
카드드드득!!
<유혈성천>을 땅에 박아, 충격파에 휩쓸려 날아가던 몸을 저지한 루스가 이를 갈았다.
‘큰일인데……!’
-루스 님!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 널찍한 석실 전체를 뒤흔드는 파괴력에, 다프네가 경악했다.
그녀가 투지를 끌어올리며 가세하려던 순간, 루스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싸울 생각하지 마라! 넌 저놈을 못 이겨!”
-……!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던 다프네가 주인의 명을 듣고 굳었다.
<성스러운 포식자>를 다루고 있으니, 미러의 현재 레벨은 최소 90 이상일 터.
아니, 어쩌면 세 자릿수를 웃돌지도 모른다.
현재 미러는, 마황 레이드 때의 스펙을 지닌 비스마르크의 영혼을 고스란히 복제한 상태니까.
‘이거, 어떻게 보면 베로니카랑 싸웠을 때보다 더 답 없는 상황일지도 모르겠…….’
[컥……!!]
푸화악-!!
갑자기 핏물이 바닥을 한가득 적셨다.
미러가 병약한 환자처럼 위태롭게 비틀대며 각혈한 것이다.
놈은 다시 워해머를 휘두르지도 못한 채, 허리를 숙인 자세로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뭔…….”
지켜보던 루스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방금 죽을 뻔한 건 난데, 왜 네가……?
미러 또한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는지, 본인이 각혈해 놓고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아무 짓도 안 했다.”
혼자 토혈해 놓고 애먼 곳에다 성질이다.
화아악-!!
미러가 손가락을 이마와 가슴, 그리고 양쪽 어깨에 대자 환한 광채가 퍼져 나갔다. 그 어떤 상태 이상이나 저주든 단숨에 해주시키는 버프 스킬, <십자 성호>의 발현이었다.
애쓰는 그 모습을 본 루스는 왠지 억울해졌다.
‘아니 진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보았느냐! 네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든, 내겐 통하지 않는…… 구웨에엑!!]
아까보다 더욱 많은 양의 핏물이 미러의 입에서 흘러넘쳤다.
상태 이상 해주 스킬을 쓴 지 5초도 안 돼서 더 심한 각혈을 일으키자, 미러는 굉장히 혼란스러워졌다.
[어, 어째서…….]
그냥 얘기만 할 때는 멀쩡했건만.
어째서인지 공격이나 스킬 등의 행동을 할 때마다 반동이 돌아오는 건 어째서일까.
루스는 조금만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복제한 비스마르크의 영혼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잖아?’
붕괴하는 차원의 여파에 휘말려 조각조각이 난 상태.
미러는 그런 불완전하고 너덜너덜한 영혼을 토대로 복제 능력을 발동하여 육체를 구축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힘을 쓸 때마다 반작용이 일어나는 게 틀림없다.’
내실이 부실한 건물이 외관은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조금만 충격을 주며 쉽게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이치.
한마디로.
놈은 지금 그냥 레벨만 높은 허깨비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스릉-.
루스가 <유혈성천>을 휘돌리며 중얼거렸다.
“할 만하겠군.”
[이런 하등 쓸모없는 몸뚱이 같으니라고……!!]
그제야 미러도 자신이 허덕이고 있는 이유를 깨달았는지, 비스마르크의 몸을 내려다보며 욕했다.
레벨이 얼마가 됐든지 간에, 상대가 인간인 이상 목에 칼을 맞으면 즉사하는 법.
루스는 훤히 드러난 미러의 목을 노리며 벼락과도 같은 속도로 검격을 내질렀다.
그러나.
파지지지지직-!!
돌연 폭사한 샛노란 뇌광이 검을 뻗어오던 루스를 저만치 날려 보냈다.
“큭!”
이번엔 날아가는 몸을 바로잡을 새도 없이 벽면에 부딪힌 루스가 정면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엔.
절망적인 광경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이게 이 하찮은 몸뚱이가 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이더군.]
한 쌍의 빛을 날개를 활짝 펼친 미러가 저 높이 날아올라 루스를 굽어보았다.
마치 신의 사자가 강림한 듯한 장엄한 모습.
실제로도 저 광휘의 날개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신성력에선, 온몸이 우그러질 듯한 어마어마한 중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비스마르크의 종결급 무기가 <성스러운 포식자>라면.
종결급 스킬은 바로 저것, <고결한 천상의 심판>이었다.
[힘을 쓸 때마다 이 몸뚱이가 버텨 내지 못한다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강력한 공격 한 방을 네놈에게 퍼부어 주겠다.]
자잘한 스킬들로 체력이 갉히느니, 차라리 필살기 한 번 써서 단숨에 이 싸움을 끝내겠다는 요량.
그리고 복제 능력으로 흡수한 정보에 의하자면, 이 <고결한 천상의 심판>이란 스킬은.
미러가 판단하기에 한 번 발동해 버리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재난 그 자체였다.
펄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