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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1장


“흑룡회 건은 어떻게 됐나요?”
“아가씨를 직접 만나 뵙고 판단하겠답니다.”
“그럼 미팅 일정을 잡아 주세요.”
드레이크 스팅레이 회장을 만난 이후, 칼리아는 좀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나친 스트레스 탓에 그녀의 눈 아래가 약간 거뭇했다.
물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그러한 흠이 될 만한 요소마저도 새로운 부류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어쨌건 그녀가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직 모든 게 부족해요…….’
그녀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스팅레이 그룹의 차기 회장이 될 수만 있다면 되고 싶었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만 있다면 독차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 세상일이라는 게 제 맘대로 되는 것이던가.
안타깝게도 그녀에게는 능력이 좋으면서 에고가 엄청나게 강한 두 오라비가 있었고, 그 아래에서 숨죽인 채 살아야만 했다.
아론 스팅레이.
명실상부한 뉴 발할라 시티 최강의 무력.
종종 영화에서 주인공의 강함을 묘사할 때 ‘연필 하나를 갖고 사람 셋을 죽이고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라는 식의 허풍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원 맨 아미(One Man Army).
웬만한 적응자 부대 하나를 혼자서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이 그에게는 있었고, 그 힘을 휘두르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베네딕트 스팅레이.
맏형인 아론 스팅레이에 비해서는 다소 저평가되곤 하지만, 그 역시 천재였다. 겨우 20대에 스팅레이 기술부에서도 가장 요직인 ‘모듈연구원장’을 맡았던 적이 있으며, 그의 손 아래에서 새롭고 강력한 모듈들이 속속들이 탄생하곤 했었다.
아론 스팅레이가 ‘본인이 강하다’는 느낌이라면, 베네딕트는 새로운 모듈과 무기로 다른 누군가를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만약 그에게 성격적인 하자가 없었다면 얼마든지 아론 스팅레이를 넘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두 오라버니의 그림자 뒤에서, 칼리아는 계속 숨죽여 왔다. 앞서 말했지만 딱히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인간을 잘 이해했다.
아론 스팅레이와 베네딕트 스팅레이가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그것으로 어떤 짓을 벌일 수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가진 무기로는 두 명의 미치광이 형제와 정면에서 대등하게 맞설 수 없음을 알기에, 숨을 죽이고 기다려 왔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건 알았지만…….’
그게 이때가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조금 더 느긋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대를 설정하려고 했다. 아론 스팅레이라는 괴물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를 길들이고, 그 괴물 자체를 자신의 새로운 무기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 그럴 수 없다.
스팅레이 회장은 언제까지고 그녀가 어둠 속에 숨어서 단검을 날카롭게 벼리기만을 원치 않았다. 충분히 기다려 왔으니, 슬슬 그것을 빼 들고 경쟁자들의 급소를 찌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갑자기 등 떠밀려 무대 앞으로 나서게 된 셈이었다. 예리하지만 짤막한 단검 하나만을 들고, 아론 스팅레이라는 ‘괴물’을 무너뜨려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때문에 그는 아론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부단히 ‘인간’들을 만나고 다녔다. 자신과 함께 ‘괴물 사냥’에 동참해 줄만한 동료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은요?”
“본사 임원들과의 미팅은 내달 1일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스팅레이 재단 측 인사들과는 3일, 아카데미 운영회 측과는…….”
“전부 최대한 일정을 앞당겨 주세요. 또 가급적 직접 대면하는 방향으로.”
“하지만 사장님께선 지금도 무리하게 일정을 소화하고 계십니다.”
“상관없어요.”
무리해서라도 움직여야 한다.
여유를 부리다가 ‘괴물’이 눈치채기라도 했다가는 통한의 실수가 될 수 있다. 최대한 많은 ‘사냥꾼’들을 모아서 단번에 그를 덮쳐야만 피해를 최소화하고 괴물의 수급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준비해도 칼리아는 걱정스러웠다.
‘오라버니가 날뛰기 시작하면 큰일이에요.’
괴물 사냥에 비유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룰이었다.
자신의 편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같은 목적 아래에 ‘아론 스팅레이’라는 인간이 지닌 지위와 권력을 박탈하는 방식. 스팅레이 그룹의 차기 회장, 황태자의 자리를 빼앗는 과정.
하지만 아론 스팅레이가 궁지에 몰려서, ‘전쟁’을 일으키기를 각오한다면 그때는 진짜 재앙이 펼쳐질 것이다. 그 재앙에서 살아남아 승리한다고 해도 자신이 얻게 되는 것은 불타고 황폐해진 뉴 발할라 시티가 되겠지.
아니, 차라리 그러면 다행이지.
잿더미로 변해 버린 왕국을, 밀레테크를 비롯한 다른 왕국들이 노리고 쳐들어올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은 망국의 왕녀로서 쓸쓸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야겠지.
그것이 최악의 상황이었다.
‘고레벨 적응자들을 더 끌어모아야 해요.’
더 많은 물리적인 힘이 필요했다.
설령 괴물이 본격적으로 날뛴다고 해도 곧장 제압할 힘. 게임체인저급 모듈은 게임체인저급 모듈로 막아야 할 테니, 그것을 보유한 고레벨 적응자들을 더욱 포섭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심해질수록 칼리아는 신경질적인 증상들이 심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괴물과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 *

바닥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던 로봇청소기가 대뜸 제자리에서 멈추었다. 로봇청소기의 상단부에는 어째서인가 고양이귀가 달려 있었고, 후면부에는 꼬리까지 달려 있었다.
로봇의 몸을 갖고 있어서 그런가, 시엘은 그 움직임에서 묘한 기색을 감지했다.
설마 자신이 몰래 붙여 놓은 파츠를 블라디미르에게 들킨 것일까? 아니, 그럴 일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전부 이 방에 전신거울 같은 건 없으니까. 기껏해야 화장실에 있는 스마트거울 정도인데, 블라디미르의 로봇청소기 기체로는 자신의 몸을 비출 만한 각도가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러세요, 블라디미르 님~?”
[나한테 메일이 왔다.]
“그 몸으로 메일 받을 수 있었어요~?”
[얼마 전에 아론 스팅레이가 데리고 다니는 그 모듈러 꼬맹이가 메일 기능을 달아 주더군.]
거봐, 안 들켰다니까.
그렇게 판단한 시엘은 한창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던 학습지를 내려놓고, 블라디미르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응, 역시 귀여워.
내심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시엘이었다.
근데 왜 고양이 귀냐고?
말하자면 일종의 복수심이었다.
허니컴 시티에서 복귀한 이후, 블라디미르는 시엘의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아론 스팅레이에게 ‘나 혼자 지내겠다’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의 몸으로는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많았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고용해서 그를 돌보게 하자니 굉장히 상황이 이상했다. 또 돈을 받고 일하는 녀석들은 믿을 수가 없는 법이고.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몸’이 완성될 때까지 그는 시엘의 돌봄을 받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블라디미르는 안드로이드의 인권 따위는 믿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것은 설령 아론의 동료이자 자아를 깨우친 시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시엘은 그가 잠시 ‘대기상태’에 들어갔을 때, 즉, 잠자고 있을 때 몰래 고양이귀와 닮은 파츠들을 붙여 놓았다. 그나마 그것들이 있으면 성격이 개차반 같은 블라디미르 청소기도 조금은 귀엽게 느껴지곤 했으니까.
“무슨 메일이기에 그러세요~?”
[칼리아 스팅레이로부터 연락이 왔군.]
“칼리아라면…….”
[스팅레이 가문의 막내딸이지. 몇 번인가…… 아니, 꽤 자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왜 나를?]
“아론 님과 관련된 것 아닐까요~?”
[음…….]
그렇게 보는 편이 타당하겠지.
어쩌면 베네딕트 스팅레이가 얼마 전 허니컴 시티에서 죽은 것과도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밀레테크의 유일한 후계자인 자신과 달리, 아론 스팅레이에게는 경쟁자가 하나 더 있었으니까.
그 자식도 꽤 골치 아프겠군.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일단 이 건은 무시하려고 한다.]
딱히 아론 스팅레이를 친구처럼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지금 이 타이밍에 그를 배신하는 것은 여러모로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이런 몸으로는 제대로 만나지도 못할 테고.
[이번 건은 그놈한테 말해 놔라.]
“알겠습니다~”
그렇게 활기차게 대답하는 시엘을 보면서, 블라디미르는 다시금 방바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 *

칼리아에게 비밀 메일을 받은 것은 블라디미르뿐만이 아니었다. 적색의 해결사라 불리는 카라에게도 비슷한 메일이 도착했다.
“해결사님?”
“미안하군. 잠시만 기다려라.”
한창 도시정부 측 의뢰인과 논의 중이던 그녀는 메일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다시 메일함에서 눈을 떼고 다시 의뢰인에게로 눈을 돌렸다.
“됐다.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지.”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카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괴물들의 싸움에는 끼지 않는 게 상책이지.”

* * *

마침내.
만났다.
만나고야 말았다.
그런 생각이 든 직후, 나는 내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은 먹구름이 드리운 것처럼 다소 어두웠고, 바람 한 점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게 멈추었다.
공기의 흐름, 태양의 움직임.
머리 위에 앉아 있던 에반젤린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마치 나 혼자만 똑 잘라 내어 이 공간에 데려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한 존재가 나타났다.
선하고 순박한 인상의 남자였다.
털실로 짠 갈색 폴라티와 청바지.
검은 뿔테 안경, 곱슬머리.
거북목 초기인지 등이 살짝 굽어 있었고, 체형은 약간 마른 편이었다. 어딜 봐도 특별할 것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이런 식으로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반인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작가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CRyStaliAn]이라는 필명이었다. 크리스타리안이라고 읽곤 했었다.
무엇을 말해야 좋을까.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어떻게.
백짓장처럼 새하얘진 뇌를 간신히 쥐어짜내어 입을 열려던 찰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