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3장
14장
15장
외전
13장
게워 낸 음식에 피가 섞여 나온 지 이틀이 지났다. 로아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처음엔 평정을 유지하던 사하의 표정은 하루가 다르게 불안으로 흔들렸다.
엘제는 건조하게 부르튼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입안에서도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물로 입 안을 헹구어 내고 불안한 얼굴의 사하를 바라보았다.
“……겁내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겁내지 마세요.”
계속 사하에게 시선을 주면서 속으로도 중얼거렸다. 겁내지 마, 하고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이 사하를 안심시키려는 말인지,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멈칫한 사하가 그녀를 침대에 누이면서 씩씩하게 말했다.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그저 하루빨리 엘제 님이 회복되길 바라고 있을 뿐이에요.”
수분이 빠져나간 몸은 가볍게 느껴지기는커녕 무겁고 무거웠다. 육체를 가진 게 새삼 불편하고 거슬렸다. 엘제는 고통만 주는 몸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잠결에 사하가 침실 문을 살짝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보쥬가 무어라 그녀를 설득하는 소리도 들렸다. 사하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앙되어 침대까지 가닿았다.
“아직은 괜찮아, 괜찮으시다고. 그러니 제발 그런 식으로 행동하려 들지 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사하. 감정적으로 굴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야.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는 것뿐이라고.”
보쥬의 착잡한 목소리가 사라진 다음 날에는, 주교가 찾아왔다. 그녀에게 세례를 어느 교구에서 받았는지 물었다. 태어날 때부터 외부와 격리되어 지냈기에 세례를 받은 적이 없었다.
겨우 고개를 젓자, 주교는 그녀의 상태를 배려해 약식으로 세례 의식을 진행했다. 이제 그녀는 설령 눈을 감게 된다더라도 병자 성사를 받을 수 있었고, 궁궐에 마련된 묘지에 안치될 수 있었다.
엘제의 표정은 전날보다 평온했다. 홀로 남을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제가 할 일들을 해나가는 보쥬를 확인하자 안심이 되었다.
그날 주교가 떠난 뒤에는, 포샤가 침실 문 앞까지 찾아왔다.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 사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른들은 푸릇한 자연을 보고 있으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대요. 그래서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온실에서 꽃을 꺾어 왔어요. 엘제 님께 전해 주세요…….”
“……그래, 엘제 님도 분명 기뻐하실 거야.”
따뜻한 마음씨 덕분에 그녀의 머리맡에는 활짝 핀 꽃들이 놓였다. 포샤의 품에 안긴 강아지가 끙끙거리면서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가려고 했다. 결국 강아지를 그녀의 옆자리에 둘 수밖에 없었다. 어린 포샤는 침실에 들어올 수 없어 한참을 바깥에서 서성이다가 돌아갔다.
강아지는 똑똑했다. 그녀를 귀찮게 하지도 않았고, 이따금 걱정하지 말라는 듯 코를 비빌 뿐이었다. 아프지 않게 그녀를 살살 쓰다듬어 주고 싶은 것 같았다. 그녀는 가물가물한 시야에 강아지를 담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켈타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강아지가 요즘 애교가 늘었어요. 저한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날이 갈수록 켈타를 닮아 가는 것 같아요.
?네가 이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인가 보군. 그래서 온종일 널 느끼면서 안심하고 싶은 거야, 나처럼.
그는 자신이 강아지 같다는 그녀의 생각에도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순순히 동의했다. 그러고는 한참 심각한 얼굴로 강아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덤덤한 목소리가 들렸다.
?있잖아, 엘제. 사실 처음엔 네가 날 빗대는 것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가령 겁쟁이 오우거라거나, 그런 우스꽝스러운…….
?그건…….
?알아.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는 거. 그렇지만 나는 너한테만큼은 언제나 괜찮은 모습으로만 비치고 싶었다고.
그가 퉁명스럽게 답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문득, 오목조목한 얼굴을 뜯어보았다. 무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가 집중하는 행동을 방해할 수 없어서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체념에 가까운 어조로 말했다.
?……매번 그 뜻을 단념할 수밖에 없어. 너에 비하면, 내가 가진 것들은 너무 초라하니까. 매일 널 들여다보면서 생각해 봤지만, 역시나 네 앞에서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어. 여전히 볼품없는 사람이지.
그때의 그녀는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었다. 자신이 이런 귀한 대우를 받아도 되는 사람인가, 끝없이 자격을 의심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아. 아니, 사실은 마음에 들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그러니 언제든 이렇게 널 볼 수 있게 해 줘. 네가 없으면 내가 무슨 수로 좋은 사람이 되겠어.
그녀에게는 뺨을 쓰다듬는 커다란 손이 과분한 사랑이었으므로 끝없이 제 자격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건 또 후회뿐이다. 그를 배웅하던 날까지 눈앞에 아른거렸다. 확실하지도 않은 의혹들에 휩쓸려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불행의 희미한 예감 때문에, 정작 눈앞에 다가온 확실한 행복은 마음껏 누리지 못했다. 소중해서 제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야 할 감정들은 뒤로 미루기만 했고, 결국에는 소중한 사람마저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 우습고 무모한 짓이었다. 내가 바보였다. 그녀는 미련이 속수무책으로 차올라서, 이대로 눈을 감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엘제 님, 보쥬가 전령을 보냈어요. 지금부터 축일까지는 잠시 추위가 누그러져요.”
사하가 후회로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손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그러니 전령이 평소보다 더 수월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요. 곧 폐하께서 돌아오실 거예요. 그날까지 엘제 님은 건강을 보살피고 있으면 돼요, 알겠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아닐지 알 수 없었다. 보고 싶다는 말을 두서없이 계속하고 싶을 정도로 그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매번 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멀리 떠나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절망스럽기도 했다.
* * *
“약초가…… 이게 전부입니까?”
“식물학자가 연구 목적으로 챙겨 온 약초들입니다.”
의원의 어두운 목소리에 로아가 덤덤히 말했다. 매끈했던 로아의 피부는 매서운 바람을 오래 맞았기 때문인지 바짝 메말라 있었다. 궁으로 곧장 도착한 터라 그의 호흡도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사하가 잠시 입술을 축이다가 막연하게 물었다.
“……그래서요?”
“다량의 약초를 제국까지 가져와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원정에서 탔던 선박까지 샅샅이 뒤져서 겨우 마련해 온 겁니다.”
사실을 전달하는 로아의 표정이 무뚝뚝했다. 엘제는 축축하게 가라앉는 분위기가 싫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보다 더 축 늘어진 몸을 가눌 수 없어 겨우 눈동자만 움직였다.
눈알을 굴리다가 로아와 시선이 스쳤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던 시선이 그녀를 마주하고는 약간의 희망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저 슬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다시 바라볼 용기가 없어서 눈을 감았다.
“그곳에 부하들을 남겨 두고 왔습니다. 그러니 아직 발견하지 못한 약초를 찾아내면 부하들이 제게 서신을 보낼 겁니다. 일단은 제가 가지고 온 약초를 사용해서…….”
로아가 그답지 않게 말끝을 떨었다. 한동안 잘못한 아이처럼 손을 비비고 서 있다가 자리를 벗어났다. 침실이 조용했다.
겨울에는 선박들이 바다로 나아갈 수 없었다. 설령 어떻게든 배를 띄워 식물학자가 말한 약초를 가져온다더라도, 이미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일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니 모두 생각을 멈추고 각자 할 수 있는 일들에만 집중했다. 의원은 식물학자가 동봉한 서신을 읽은 뒤, 설명에 따라 약을 제조했다.
“테베 사람들은 고열이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멍울이 아니라. 일단 저희도 열을 우선적으로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좋겠습니다.”
약을 복용했으나, 다음 날부터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꿈을 꾸었다. 켈타와 손을 잡고 길을 걸었다. 그를 배웅하기 전의 일이었다.
그가 떠나기 전, 손수건을 다시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날카롭고 강인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절제가 밴 듯한 어두운 색감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상과 달리 그의 마음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래서 밝은 색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예쁘게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고민하느라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그가 가엾게 느껴져서 탄탄한 몸을 껴안았다. 따뜻하고 커다란 빛줄기가 제 몸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땐 늦은 밤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움직여 침실을 밝힌 초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시야가 어룽거리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듯한 통증이 믿기지 않아 팔을 들어보았다. 잠옷 소매를 어깨까지 올린 터라 앙상한 팔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멍울 위에 올려 둔 젖은 헝겊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하얀 헝겊은 멍울에서 빠져나온 진물 때문에 탁한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
놀란 엘제가 제 상태를 자세히 확인하고 싶어서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침대에 엎드린 자세로 앉아 있는 사하가 보였다.
피로가 만만치 않게 쌓였는지 사하는 기척을 느끼지도 못하고 깊은 숨소리를 내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가 손으로 제 이마를 짚어 보았다. 미열이 느껴졌다. 언제 상태가 다시 악화할지 몰랐다. 지금이 제가 몸을 가눌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하가 깨지 않게 조심히 몸을 일으키곤 침실을 나갔다.
엘제는 어머니가 머무는 침실을 향해 걸음을 움직였다. 당연한 목적지였다. 제가 누워 있는 동안 홀로 있을 어머니도 켈타만큼이나 안쓰러워서 가슴이 탔으니까. 숄을 꼼꼼히 두르고 있었으나, 식은땀 때문인지 이가 딱딱 부딪혔다.
어떻게든 한기를 버텨 내려고 어깨에 힘을 실은 채로 걷고 있는데,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깊은 밤이었다. 조용해야 할 집무실에서 소리가 들리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공작님, 지금이라도 엘제 님께 여쭤봐야 합니다.”
“무슨 수로 여쭤볼 겁니까.”
“어떻게든 의식을 차릴 수 있게, 아니, 잠깐 의식이 돌아오실 때…….”
보쥬가 로아의 물음에 답을 찾지 못하겠다는 듯 횡설수설했다. 그녀는 보쥬의 한숨 소리에 스며든 어두운 감정을 눈치채고 문 앞까지 바짝 다가섰다. 숄을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는 손이 까닭 없이 떨렸다.
“어떻게든 의식을 차릴 수 있게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상황에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이대로 엘제 님이 눈을 감으신다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자는 말입니까? 제국으로 떠났던 날, 이미 어머니는 숨을 거둔 상태였다고. 왕이 지금까지 그런 사람의 숨을 주술로 붙들고 있었다고요.”
로아의 언성이 짜증스럽게 높아졌다.
“그저 왕에게 이용당하기만 한 것뿐이다, 처음부터 할 수 있었던 건 없었다, 그러니 어머니의 일에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하면서 시궁창 같은 위로를 건네라는 말입니까? 시들어 가는 그 얼굴을 보면서.”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엘제 님이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 이후로는 어떻게 할 거냐고요.”
“그건…….”
“우리도 왕처럼 주술의 힘을 빌려 영혼이 없는 어머니를 억지로 붙들고 있어야 합니까, 평생? 아니면, 어머니도 엘제 님의 곁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우리가 숨을 끊어 드려야 하는 겁니까?”
매사 쉽게 동요하지 않는 보쥬도 이번 일에서만큼은 언성을 높였다. 그는 흥분한 숨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다가, 맥이 풀린 듯 잦아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판단하고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이건…….”
숨을 크게 들이켠 엘제가 낭패한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처음엔 멍하게 있었다. 나중엔 왜 하필, 제가 제국으로 떠나는 날에 그녀가 눈을 감았는지, 오래 생각했다.
차라리 제가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던 때에 숨을 거두었다면 떠나는 길이 쓸쓸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럴 거면, 차라리 더 일찍 눈을 감았어야지……. 왜, 자신이 이런 식으로 어머니를 탓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노랗고 작은 새를 보면 네가 떠올라. 사랑스러운 내 아가씨가. ……있지, 어느 날에는 부모 품을 떠나 이곳에 도착한 새가 너무 작고 연약해 보이지 뭐니. 그래서 둥지처럼 치마를 접은 채로 손짓해 봤단다. 보기와 다르게 겁이 없는지, 내 치마폭으로 쏙 들어오더라고.
?정말 새가 어머니 품에 들어왔어요?
?그럼. 그런데 문득…… 치마 바깥으로 펼쳐진 풍경이 너무 거칠게 느껴졌어. 새가 다칠까 봐 겁이 나서 새를 더욱 끌어안았어. 삐익, 삑,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어. 아마 많이 갑갑했을 테야. 그런데도 차마 움직일 수가 없었어. 그래서 미안하다고 중얼거리기만 했지.
문득, 병석에 누워서도 밝은 얼굴로 이야기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동자에 어리던 우수도 함께 떠올랐다.
?한참 뒤에야…… 새를 지키려 버티는 내 모습이 감옥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마음이 아려서 그 자리에서 아이처럼 울었어, 부끄럽게도 말이야.
?……그래서요?
?……결국은 풀어 줄 수밖에 없었어. 울음이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씩씩하게 날갯짓하면서 날아가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단다. 그제야 나는……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조금씩 깨달을 수 있었어. 응, 이제는 알아, 엘제. 이제야 알겠어…….
어머니의 고요한 중얼거림이 귓가에 맴돌았다. 어쩌면 어머니는 제가 타리스를 떠나던 날,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제 존재가 딸아이의 발목을 잡을까 봐 겁이 나서, 먼 곳으로 급하게 떠났을지도 몰랐다. 결과적으로는 눈을 감은 뒤에도 왕에게 철저히 이용당했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행동이 제 마음을 잔인하게 베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끝까지 버티던 그녀는 어머니가 안겨준 슬픔 때문에 결국 주저앉았다. 그러니 그녀가 어찌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흐으…….”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서 두 무릎을 적셨다. 그녀는 참다 못해 울음을 크게 터뜨리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까닭 없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복도를 울리는 울음소리에 놀란 듯이 문이 열렸다. 로아가 눈이 벌겋게 충혈된 그녀를 보고 낭패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자책하는 것처럼 움츠러드는 그의 어깨를 확인하곤 공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것처럼.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왜, 말하지 않았어요? 제게 말해 줬어야죠. 마음껏 나를 비난했어야죠. 처음부터 내가 잘못해서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고.”
“…….”
“그럼…… 그럼, 저도 마음 편히 화를 낼 수 있잖아요. 왜,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냐고, 상황이 내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데,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였냐고, 따져 물을 수 있잖아요.”
그녀조차 제가 어떤 마음으로 그에게 이런 원망을 내뱉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신열이 올라 그녀의 얼굴에 열꽃이 피었다. 떳떳한 목소리와 달리 작은 몸은 더욱 작게 움츠러들었다. 한참 뒤에야, 저도 몰랐던 진심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아무도 나를 원망하지 않으니까, 내가 날 변호할 수조차 없게 되잖아요……. 어머니뿐만 아니라, 다들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니까…… 도리어 나한테 미안해하는 그 행동들 때문에, 내가 가장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요. 너무 미안해져서 감당할 수가 없잖아요, 내가…….”
로아가 길 잃은 아이처럼 위태롭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녀의 어깨에 올려진 손에 힘이 들어갔다. 끌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것처럼. 그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쓸어 주었다.
* * *
그녀는 몸에 생긴 멍울이 사라지고도 며칠을 더 앓았다.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어머니의 죽음이 실감 나서 울다가 문득, 실감이 나지 않아서 말똥하게 눈을 깜박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는 어머니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던 경험 때문이었다.
만약 제가 깨어나지 못했다면, 어머니는 어떻게 됐을까……. 불현듯, 어머니의 장례조차 제 손으로 치르지 못하고 떠나는 일만큼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어머니를 배웅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또다시 몸살 기운이 돌았다.
“……이래서는 안 돼.”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또 죽음이 제게로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서 겁이 났다. 그래서 더는 미루지 못했다. 어머니를 보내 주기로 결심했다.
식은땀 때문에 몸에서 시큼한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일단 어머니에게 가기 전에, 제 몸을 씻었다. 사하가 머리를 빗겨 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엘제 님, 열이 나요. 조금만 더 쉬는 게 어떠세요. 이렇게 무리하시다가 또다시…….”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목소리가 끊겼다. 엘제는 평소와 달리 또렷한 눈으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에게는 자신밖에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을 책임질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긴 복도를 걷는 동안, 몇 번이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럴 때마다 몸을 꼿꼿하게 세우려 노력했다. 침실로 들어가자, 치료사로 위장했던 주술사의 모습이 보였다.
엘제가 사경을 헤맬 동안, 주술사에 대한 처벌은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 전까지는 주술사가 어머니의 곁에 남아 숨을 붙들어 놓아야 했으니까.
“……오셨어요.”
주술사가 푸석한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주술사의 표정은 덤덤했다. 거짓말이 얼마 가지 못하고 들통날 걸 이미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
엘제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죽이고 싶었다. 주술사뿐만 아니라 타리스 사람들 모두. 그러나 엘제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어머니의 곁에 앉았다.
천을 따뜻한 물로 적셔 어머니의 몸을 닦아 주었다. 어머니의 눈가를 오래오래 쓸어 주었다. 아무리 오래도록 바라보아도 텅 빈 눈에는 제가 담기지 않았다. 마음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있어야만 했다.
“……엉킨 머리카락도 풀어 드려야겠어요. 손톱도 다시 깎아 드리고…….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 해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정말. 아니, 하여튼 미안해요, 어머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횡설수설했다. 주술사가 침실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는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숨이 가늘어졌다. 그때만큼은 표정이 없어 무섭기만 했던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구김살 없는 표정을 보자, 마지막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외로웠을 어머니의 마지막 기억을 지워주고 싶어서, 앙상한 손을 종일 마주 잡았다. 따뜻하게. 어머니의 손이 제 손안에 들어왔다. 야윈 손이 그녀의 손을 가득 채워 주었다. 연약하지만 강인한 손이었다.
어머니의 장례는 절차대로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세례를 받은 교구가 달랐지만, 큰 어려움 없이 병자 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엘제가 제 감정을 추스르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 보쥬 덕분이었다. 어머니의 관은 잠시 기도실에 안치되었다.
“기도할 시간입니다.”
사제는 정해진 시간이 돌아올 때마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때면 사람들 모두가 어머니를 좋은 곳으로 배웅하기 위해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기도 시간이 끝나면 사람들은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 주었다. 그녀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관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기만 했다. 관이 묘지에 묻힐 때까지 울지 않았다.
사람들이 관 위에 꽃을 두는 모습이 느리게 보였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 누구도 울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 무서워요…….”
어린 포샤도 사하를 찾기만 할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이었으나, 엄숙한 분위기 탓에 포샤의 눈은 감정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위축되어 있었다.
엘제는 신발 앞코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코가 시큰거려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관 위로 흙이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외면하고 싶어서 고개를 더욱 옆으로 비틀었다.
문득, 로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보였다. 그 시선이 마음을 옥죄는 것 같기도 하고 무방비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어쩌지 못하고 망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왜…….”
“……저도, 저도 모르겠습니다.”
로아도 자기 모습에 놀랐는지 눈가를 비비다가 고개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그것으로 부족한지 고개를 푹 숙이기까지 했다. 잠시 뒤, 그의 입술에서 꾹꾹 눌러 담았던 말이 나왔다.
“……저는 어떤 비난도 위로도 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하지 못합니다. 엘제 님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엘제 님이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그는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럼에도 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의 마음을 제 것처럼 고스란히 느꼈으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인 듯했다.
그녀는 그를 보면서, 그제야 제 슬픔을 발견했다. 어쩔 수 없이 울었다. 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붉어진 눈을 바라보았고, 붉어진 제 눈으로 대신 답했다.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지친 얼굴로 무덤에 세워진 비석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데, 멀리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자, 보쥬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곤란한 낯빛으로 어떤 남자를 가로막고 있었다.
“어째서, 아버지가 딸을 만나지 못한다는 겁니까?”
“무턱대고 남작의 말만 믿고 이곳에 들여보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되도록 엘제 님의 가까이에 혼란을 두고 싶지 않으니까요. 지금 상황에선 더더욱.”
“딸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타리스로 떠났다가 뒤늦게 소식을 들었습니다. 딸아이가 전쟁 포로가 되어 이미 제국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말입니다. 딸아이를 만나기 위해 20년을 기다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