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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했더니 괴담이 돼 버렸다 3권
지은이│설탕후루
펴낸곳│로즈엔
투고메일│editor@ridi.com
ⓒ 설탕후루,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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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창문을 열어 놨더니 밖에서 말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근데 발음이 뭉개져서 뭐라 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았다. 돌아? 뭐 돌아가라는 소린가? 아, 마부한테 초대장이 없어서 그러나 보다. 헤나가 근위병을 불러 관심을 이쪽으로 돌렸다.
“초대장이라면 여기 있어요.”
“아니, 지금 초대장이 문제가 아니라, 마부, 마부의 목이…. 뭐지? 내가 잘못 봤나? 멀쩡하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헤나가 되묻자 근위병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초대장을 받았다. 그리고 초대장에 쓰인 로한슨 백작가의 가문 이름을 확인하고서 따지듯이 물었다.
“로한슨 백작가? 로한슨 백작님이라면 이미 들어가셨는데요.”
“로한슨 백작님께서는 먼저 출발하시고, 이 마차에는 오늘 데뷔당트를 치르실 로한슨 영애와 샤프롱이신 토텐 후작 부인이 타고 계시는 마차예요.”
“로한슨 영애…?”
근위병은 그 말을 의심하듯이 마차 안을 확인하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다. 웃으며 눈인사하려 했더니 근위병이 하얗게 질려서 고개를 넙죽 숙였다.
“실, 실, 실례했습니다!”
대체 에반젤린의 악명은 어디까지 퍼져 있는 거야? 이 정도면 수도에서 제일가는 악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오죽하면 날 보면서 벌벌 떨고 겁먹는 것도 이제 익숙해졌을까. 지금 저 근위병은 저택에 있는 하녀들처럼 고개를 바닥에 박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눈만 내리까는 거니까 차라리 양호한 수준이지.
검문이 통과되고 성문을 지나친 우리는 연회가 열리는 장소를 향해 나아갔다.
“화려하네.”
“그렇죠?”
그야말로 빛에 둘러싸인 성이었다. 황궁이 꼭 황금으로 지어진 건물 같았다. 강줄기로 빛이 번져 더욱 웅장해 보였다. 이 시대는 LED도 없을 텐데 어떻게 저런 조명을 해 둔 거지? 역시 마법인가?
그리고 마침내 마차가 멈췄다. 이번에 황태자의 생일 연회가 열리는 곳은 사자궁이라고 하더니 이름값 하듯이 사자 조각상이 무섭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헤나가 나를 에스코트해 주려고 먼저 내렸는데 불쑥 다른 손이 튀어나왔다. 길고 곧게 뻗은 손마디만 봐도 주인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예상대로, 고개를 들자 나와 전혀 다른 검푸른 색채가 보였다. 계속되는 장마로 요즘 푸른 하늘을 본 적이 없는데 가브리엘의 눈을 보니 날이 맑게 갠 것 같았다. 아, 진짜 비가 그치긴 했지.
“가브리엘 경.”
“좋은 밤입니다. 로한슨 영애님.”
저번에 안 좋게 헤어져서 그런지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꾸며서 그런지 몰라도 오늘따라 더욱 파격적인 외모였다. 머리도 보기 좋게 넘겨서 이목구비가 시원하게 드러나서 그런가? 여하튼 남주라서 그런지 더럽게 잘생겼다.
감탄하면서 가브리엘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입구라서 사람들도 많고 마차도 붐볐는데, 레드 카펫 밟는 것처럼 소란스럽게 주목받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오히려 죽은 듯이 조용한 것 같았다.
문득 데뷔당트 의상에는 무조건 흰 장갑을 착용해야 한다는 게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얇은 천 너머로 닿는 가브리엘의 손은 평소보다 차가웠다. 계속 밖에서 기다린 건가?
“오래 기다리셨나요?”
후작저에 들렀다 오느라 예고한 도착 시각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다. 계속 밖에서 기다리느라 몸이 이렇게 찬 건 아니겠지?
“멀리서 로한슨 가문의 길조가 보이길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길조는 무슨, 흉조겠지.
참고로 로한슨 백작가의 상징은 반으로 갈라져 데칼코마니처럼 된 불사조였다. 왜 두 마리가 아니라 갈라진 거냐면 불사조는 세상에 유일해서 그렇단다. 이것도 나의 예절 교사인 돌리네가 가르쳐 준 거였다.
“오늘은 더욱 눈부셔서 별이 떨어진 줄 알았습니다.”
미샤한테 배운 찬양을 여기에 써먹네. 고백한 걸 내쳐서 의기소침할 줄 알았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능글맞아? 가브리엘은 진짜 넉살도 좋다. 내가 자기랑 사귈 맘은 없고 어디까지나 어장이라고 못을 박은 것 같은데 그래도 좋나 보다.
“저번의 제 말은 잘 기억하시죠?”
우리는 그냥 썸만 타는 거다. 알지?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무엇보다 신전의 사람들은 제가 영애를 사모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뭐? 그걸 소문내고 다녔어? 진짜 가브리엘도 가끔 보면 내일이 없다니까. 이 액셀밖에 모르는 남자야….
하긴 애초에 나한테 있는 험한 소문들을 조금 중화시키고 신전의 의심도 피하려고 가브리엘이랑 붙어 다니기로 한 거긴 했다. 겸사겸사 내가 정령 친화력이 바닥인 걸 이용해서 내 소환 진을 무단으로 훔쳐 쓴 놈들도 잡아내고.
“그럼 저도 기꺼이 맞춰 드리죠.”
저번에 밀었으니 오늘은 당길 차례다. 적당히 밀당을 해야 어장 속 가브리엘이 도망가지 않고 잘 붙어 있지. 돌리네한테 받은 특훈을 이용할 때다. 그리고 내 묵은 로판 지식들이 진가를 발할 때고.
눈을 휘며 활짝 웃었다. 저번에 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충격받길래 이틀 동안 거울 보면서 웃는 연습 좀 빡세게 했다. 데이지한테 에반젤린이랑 닮게 웃는 것 같냐고 물어봤는데, 데이지가 머뭇거리면서 자기는 아가씨가 웃는 모습을 못 봤단다. 악녀라서 안 웃고 다닌 건가? 그러니 얼굴 근육이 이렇게 굳어 있지.
에반젤린의 얼굴을 좋아하는 가브리엘한테는 충격적으로 예뻤는지, 가브리엘이 굳어서 말을 잃었다. 아이고, 이 얼빠야. 정신 차리라고 팔을 툭툭 치면서 내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리는 토텐 부인을 가리켰다.
“경, 토텐 부인이 오셨어요.”
가브리엘은 내 뒤에 바로 내리는 토텐 부인을 보며 놀라지도 않고 반갑게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토텐 부인. 연락이 없으셔서 걱정했습니다.”
“미안해요. 사정이 있어서….”
가브리엘은 토텐 부인을 배려하려는 듯 굳이 사정을 캐묻지는 않았다. 아니면 내 여자한테만 따뜻하다는 설정상 진짜 토텐 부인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관심이 없는 걸 수도 있고.
“이제 토텐 부인이 오셨으니 마리크 주교님의 도움은 받지 않아도 되겠어요.”
토텐 부인이랑 같이 왔으니까 이제 엑소시스트랑 위험한 동행을 하면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거지? 나는 로판 빙의자라서 멜렉 같은 귀신이 빙의한 경우와 다르긴 할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가설이니까. 안심하고 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물리적으로 구마당할까 봐 무섭다고.
“마리크 주교님은 연회장 안에 계시나요?”
“아니요. 영애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다고요?”
“예. 대주교님께서 부르신 듯합니다. 영애님은 샤프롱과 함께 올 테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함께하자고 하셨고요.”
“…마리크 주교님은 토텐 부인이 샤프롱으로 오신다는 걸 알고 계셨나 보네요.”
그래서 가브리엘이 토텐 부인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구나.
마리크 주교는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나한테 감시를 붙여 놨다더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근데 젤리랑 푸딩이 저택에 이상한 사람들이 붙은 족족 전부 치워 버리던데…. 둘의 감시망을 뚫고 어떻게 전해 들은 건지 모르겠다. 역시 엑소시스트는 안심할 수 없다.
어쩌면 내 쪽이 아니라 토텐 부인 쪽에 감시를 붙였을 수도 있겠다. 토텐 부인의 칩거를 꿰뚫고 있었다고 했고, 부인이 내 샤프롱으로 흔쾌히 나서 준 것 역시 알았고.
“마리크 주교…?”
토텐 부인이 이름을 조용히 읊었다. 토텐 부인이랑 아는 사이인가? 그럼 감시가 아니라 서로 연락해서 아신 걸 수도 있겠네.
“안면이 있나요?”
“그렇다마다요. 내게 성수를 팔지 말라 지시한 게 그 여자니까요.”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르게 토텐 부인은 적의를 가감 없이 내비쳤다. 도끼 들고 설치던 디에스한테도 이렇게 매섭게 분노하지는 않으셨는데 마리크 주교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마리크 주교님이 성수를 금지했어요?”
“네. 라이더에 대한 나쁜 소문이 퍼지자마자 세간의 시선도 있고, 저주받은 자에게는 더는 성수를 줄 수 없다면서요.”
일전에 가브리엘한테도 간단하게 들은 이야기였다. 성수의 유통을 막은 사람이 마리크 주교였구나. 역시 마리크 주교는 내가 캐릭터 분석을 했던 것처럼 의심 많고 삿된 존재에게 가차 없는 엑소시스트가 맞았다.
토텐 부인이 마리크 주교의 이름만 들어도 진절머리를 내는 게 십분 이해 갔다. 저택에 장식되어 있던 온갖 형태의 성물들만 봐도 토텐 부인이 얼마나 태양신을 믿고 있는지가 보이던데, 태양신의 주교라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진실을 밝히고 해명하기는커녕 사실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소문이 진실인 양 ‘저주받은 아이’라고 낙인을 찍어 버렸으니까.
“성수가 통하지 않으니 어차피 필요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마리크 주교의 선택이 맞았던 것 같네요. 라이더는 결국….”
토텐 부인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한탄하다가 무의식적으로 라이더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퍼뜩 놀라며 가브리엘의 눈치를 살폈다. 성수가 더는 필요가 없다는 말은 라이더의 죽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말실수해서 그런 것 같았다.
“라이더는 결국 성수가 필요 없을 정도로 건강해질 테니까요. 그렇죠?”
“네, 네…. 그럴 거예요.”
내가 서둘러서 말을 덧붙여 실수를 수습하자 토텐 부인이 맞장구를 쳤다.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조율해 봤는데 라이더의 사망 소식이 퍼지면 안 될 것 같아서 가브리엘한테도 비밀로 하기로 했다.
솔직히 잠깐 가브리엘한테는 이야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하기는 했는데 토텐 부인은 진실을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적었으면 하는 것 같아서 그냥 숨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가브리엘은 성기사였고, 귀신이 어린애한테 빙의했다는 이야기를 마냥 좋게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아서…. 가브리엘의 푸른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잠잠했다. 침묵을 유지하던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라이더는….”
“회복했어요!”
토텐 부인이 드물게 목소리를 높여 가며 가브리엘의 말을 잘랐다. 그러곤 나를 향해 구원의 눈길을 보내길래 나도 얼른 고개를 끄덕여 줬다.
가브리엘이 나한테는 한눈에 반했으니까 예외로 둔다 치고 멜렉한테는 얄짤없을 거 아니야. 아무리 의도가 나쁘지 않고, 토텐 부인을 도와주기 위한 거라고 해도 시체를 부리는 건 상식적으로 용납 불가하지.
토텐 부인은 방문객을 반기지 않기도 했고, 가브리엘도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멜렉이랑은 만날 일 없을 테니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다.
가브리엘은 깨닫지 못한 건지 아니면 배려의 차원에서 모르는 척해 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말꼬리도 잡지 않았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매끄럽게 웃는 모습에 문득 알아차린 건가 의문이 생겼다.
토텐 부인과 가브리엘이 어색하게 눈치만 보고 있어서 잠깐 적막이 맴도는 가운데 가브리엘과 같은 정복을 갖춘 기사가 침묵을 깨고 끼어들었다.
“단장님, 해후하는 중에 실례합니다만 로한슨 영애님과 토텐 부인의 소지품도 검사해야 합니다.”
“유리엘.”
전에 신전에서 내 호위를 해 줬던 유리엘이라는 기사님이었다.
가브리엘의 기사단이 지원을 나왔다더니 연회장에 입장하기 전에 소지품 검사까지 도맡아 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자가 주최한 탄신 연회인 만큼 검문이 까다로울 만했다. 시대 배경을 미루어 보아 암살 시도 같은 게 있을 수가 있으니까. 게다가 오늘 참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황태자에게 줄 생일 선물을 지참했을 테니 그것도 확인해야겠지.
“실례하겠습니다, 로한슨 영애님. 오늘도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유리엘이 칼에 찔려도 미동이 없을 것 같은 무표정으로 뻔뻔하게 아부를 내뱉었다. 오늘 내가 좀 예쁘긴 한데… 무슨 칭찬을 주입식으로 교육받은 사람처럼 고저 없이 하니.
이렇게 보니 기사들도 진짜 서비스직이 따로 없었다. 주 수입도 귀족들 상대로 성수 팔아먹는 거던데 이 정도면 그냥 고급스러운 생수 판매업자 아니냐? 이건 너무 불경한 생각인가? 응, 아니다. 나는 빙의자니까 괜찮아.
황태자에게 줄 선물은 다른 기사들이 확인하고, 나와 토텐 부인의 몸은 성별이 같은 유리엘이 간단하게 훑어 확인했다. 그동안 가브리엘은 몸을 돌려서 등을 지고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플러팅은 엄청 남발하면서 이런 데서는 은근 고지식하네….
슬쩍 주변을 보니까 다른 귀족들도 아무런 반항 없이 얌전히 신체검사를 받고 있었다. 한 명 정도는 자길 의심하는 거냐고, 생사람 잡지 말라며 검사를 거부하는 빌런이 있을 법한데 다들 얌전히 응수하는 게 신기했다. 아, 혹시 그 어그로를 끄는 빌런 역할을 원래 에반젤린이 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단장님, 전부 확인했습니다.”
유리엘이 검사가 끝났다면서 가브리엘을 불렀다.
“무기 같은 건 없으시네요?”
유리엘이 뭔가 아쉬워하는 것처럼 말했다. 왜 실망하는 거래? 내게 무기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내가 또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밖에 없지.
“무기라면 따로 가져왔거든요.”
“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놀리듯이 음흉하게 말했더니 유리엘이 무기를 지참했다는 말에 당황하며 되물었다. 악녀 연기에 재미 들인 나는 말없이 손을 들어 유리엘의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한창 황태자에게 진상할 선물을 뜯어보며 검사하는 중이었다. 헤나가 챙긴 고급스러운 상자를 열자 안에서 화려한 단검이 나왔다.
“거… 검?”
선물 상자를 열어 본 기사가 검을 보고서는 몹시 당황한 듯이 손을 떨어 댔다.
“단장님 이걸 어떻게 해야…?”
기사가 가브리엘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가 가브리엘과 딱 붙어 있는 나를 보고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우리를 번갈아 봤다. 상관에게 보고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상관이 내 파트너니까 ‘이걸 어쩌지?’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게 뻔히 보였다.
“영애님께서 그냥 농을 하신 거다. 날이 없는 장식용이니 반입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가브리엘이 재빠르게 실드를 쳐 줬다. 나도 열심히 연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가요? 한번 뽑아 보겠습니다.”
기사가 내 눈치를 보면서 심호흡을 하며 검을 뽑았다. 가브리엘이 설명했던 것처럼 검은 날이 없고, 손잡이랑 검집만 있었다. 날 부분에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한 기사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검을 상자에 넣었다.
“네. 말씀하신 것처럼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토텐 부인의 물건도요.”
토텐 부인은 황태자한테 줄 선물로 고급스러운 커프스를 가져오셨다. 보통 저런 커프스 같은 장식품들이 제일 무난한 선물이라고 하더라.
나는 백작이 황태자한테 주면 딱 맞겠다고 검을 가져다줘서 따로 준비하기도 귀찮으니까 그냥 들고 온 것뿐이었고.
제국이 세워지기 한참 전에 망한 왕국의 유물이라고 하던데, 날이 있는 검도 아니었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장식품이니까 검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기지도 않을 것 같아서 선물로 적당하다 싶었다. 혹시 몰라서 가브리엘한테 미리 물어봐서 사전 검수도 끝낸 상황이었다.
“유리엘 경도 놀라셨나요?”
“네. 심장이 철렁했습니다.”
유리엘도 진짜 무표정의 극치다. 저렇게 평온한 얼굴로 심장이 철렁했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 검사가 끝난 선물은 헤나가 아니라 황실의 하인이 챙겼다. 헤나는 하녀들이 대기하는 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유리엘이 헤나를 안내해 준다고 나서 줘서 안심이었다.
“저는 먼저 입장할게요.”
“네. 들어가서 뵈어요, 토텐 부인.”
샤프롱이라고 해도 같이 입장할 수는 없으므로 토텐 부인이 먼저 연회장에 발을 디뎠다. 명부를 확인한 시종이 목청 크게 토텐 부인의 이름을 외쳤다.
“토텐 후작가의 킨더 토텐 부인 드십니다!”
헐, 어떻게! 이제 저렇게 이름을 불러 주면서 입장하는 거야? 크으. 뭐냐고, 이거 완전 로판 같아! 아, 맞아. 여기 로판 속이었지.
“이제 그만 들어가실까요?”
우리도 이제 들어가나 보다. 가브리엘이 머뭇거리며 에스코트를 위해서 손을 내밀었다.
약간 시선을 내리깔자 물기를 머금은 듯 길고 촉촉한 속눈썹이 파들거리며 떨었다. 처음에는 능글맞게 무슨 별 같다는 칭찬을 하길래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 역시 가브리엘은 오늘따라 유독 긴장한 게 맞았다. 내가 꾸미고 나와서 긴장한 건가? 하긴, 풀 세팅을 끝내고 보니까 역시 악녀답게 더럽게 예쁘긴 하더라.
그런데 가브리엘은 그런 의미로 긴장한 게 아니었나 보다.
“저와 닿는 게 불쾌하시겠지만… 제게 맞출 거라 하셨으니 오늘만큼은 부디 참고 견뎌 주시길 바랍니다.”
짓눌리듯이 내뱉어진 말에 공명하듯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혼자서 로맨스를 찍느라 긴장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가브리엘은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을 기억하며 주의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평소처럼 적당히 어울려 달라고 해서, 전에 했던 것처럼 칭찬했고,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던 거다.
지난번에 헤어지면서 가브리엘이 작별 인사를 할 때 손을 내어 주지 않았는데 그것 때문에 자기랑 접촉하는 게 불쾌해할 거라고 지레짐작했나 보다.
얘 자존감 누가 다 깎아 먹었어! 응, 나지. 가브리엘이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니까 죄책감에 양심이 찔렸다. 가브리엘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벅찬데 문어 다리로 어장 치면서 사는 사람들은 양심이 어떻게 돼먹은 거래? 어장 관리하면서 밀당하기 너무 힘들어요….
“불쾌하지 않아요. 오히려 경이 마음에 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달래듯이 가브리엘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어 살짝 힘을 주어 잡았다. 솔직히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사이에 심정에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가브리엘한테 너무 매몰차게 대했다고 반성하기는 했다.
가브리엘은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너도 내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게 이해가 안 가지? 그런데 원래 어장 관리라는 게 밀당하면서 거리를 적당히 재야 하는 거야. 네가 이해해라.
“그건 제가 제 주제를 알기 때문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