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계 속 공주님 (합본)
결계 속 공주님 (합본)
결계 속 공주님 (합본)





1권
결계 속 공주님 (합본)
- 목 차 -


1화
2화
3화
4화
5화
6화
7화
결계 속 공주님 (합본)
1화



“흑기사님.”
“왜 그러지?”

꿈속의 여인은 서글픈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절 데리러 와줘요.”

얇고 기다란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내민 손은 자칫 잘못하면 으스러질 수도 있는 가녀린 꽃잎과도 같았으니.

난 그 손을 조심스럽게 잡은 다음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약속하지. 그대와 현실에서 만나는 날을 고대하고 있어.”
“고마워요. 말이라도 그렇게 해줘서.”
“다임하트 제국 황자의 말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게 좋아. 난 약속한 건 뭐가 됐든 반드시 지키거든.”

다음 순간 난 눈이 부신 햇살 탓에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가 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밖에서 들려오는 고성방가와 함께 현실로 돌아왔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

“반항하는 녀석들은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감히 다임하트 황실에 칼을 꽂은 배은망덕한 데르데로스 녀석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란 말이다!”

데르데로스 왕국.

대륙의 남부에 위치한 왕국으로 다양한 식물들을 재배하는 따스한 날씨와 비옥한 토양으로 유명한 나라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 좋은 날씨 환경에 만족하지 않았으니.

대륙의 패자인 다임하트 제국 아래에서 통제를 받는 국가는 본인들의 의지로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할 권리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 살려줘. 우리는 모르는 일이야. 전부 데르데로스 왕실에서 독단적으로 꾸민 일이란 말이야. 우린 관련 없는 무고한 시민들이라고.”
“반항하지 않는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 얌전히 우리의 뒤를 따라 제국의 노예로서 삶을 연명할 테냐?”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비통한 목소리로 목숨을 구걸하는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죄목은 하나.

대륙의 건너편 동방 제국과 몰래 동맹을 맺으며 제국의 뒤통수를 친 것이었다.

“어이, 패악질 부리는 것도 적당히 해. 곧 황자 전하께서 행차하신다.”
“이미 수도의 거리가 피로 물들었다고.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길바닥에 먼지 한 톨 더 묻는다고 티가 나겠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황자 전하께서는 이미 선봉에 서서 수많은 반역자 무리를 직접 처단하셨다고.”

친구를 타이르는 병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황자의 존재.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속에 있는 동경심을 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에서 황자의 존재감이 얼마나 거대하고 찬란한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뒤처리가 지저분한 걸 제일 싫어하시지. 너도 직접 봐서 알잖아. 포로로 잡은 여자를 겁탈하려다가 걸린 병사에게 황자 전하가 어떤 처분을 내렸는지 말이야. 앞으로도 남자구실을 하고 싶다면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마.”

친구의 진지한 조언에 깃든 진심이 전달되어서일까.

아니면 황자의 눈에 거슬렸을 때 맞이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서일까.

힘겹게 몸을 가누던 남자의 머리카락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황제 폐하의 등에 칼을 꽂으려던 놈들이야. 신사적으로 대할 필요 없다고.”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해. 하지만 황자 전하께서는 투항하는 이들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었지. 그걸 기억해 두라는 거야.”
“에휴, 너 잘났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나한테 고마워하는 거지?”
“네네.”

병사 둘은 이곳이 전쟁터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처럼 가벼운 농담까지 섞어가며 대화를 나눴다.

바닥에 쓰러진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패전국 신분의 사람들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역시나 진전 없는 공성이 지속되는 건 병사들의 사기에 좋지 않습니다.”
“신관이 도착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전령이 제국에 무사히 당도했을 테니 곧 저희를 가로막는 저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겠죠.”

레무스 다임하트.

황자의 신분으로 제국의 기사단장까지 연임하는 독특한 인물이다.

게다가 몸소 정복 전쟁에 참여한 것도 모자라서 최전선에서 활약을 이어 나가고 있었으니.

제국군의 깃발 아래 데르데로스 왕국의 깃발은 무참히 짓밟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으니.

레무스의 보좌관인 조빈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왕성에 진로를 방해하는 거대한 장벽이 생성된 것이었다.

“얇고 투명해 보이는 벽인데도 창과 칼도 들어먹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형성된 결계이니. 쉽게 부술 수 있을 리 없지.”
“도대체 누가 저런 짓을.”

조빈은 분하다는 듯 길바닥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를 있는 힘껏 발로 차며 괜한 화풀이를 했다.

“전하?”
“왜 그러지?”
“아뇨, 갑자기 생각에 잠겨 보이셔서요.”

레무스는 매캐한 공기가 가득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달콤한 꿈의 여운에 잠시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전하?”

레무스의 발걸음은 무의식적으로 장벽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전하!”

충성스러운 보좌관의 외침도 그의 귀에 닿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지켜보던 병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는 필시 좋은 신호가 아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