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빛이 너무 강했다.

눈이 따갑도록 쏟아지는 전등빛 아래, 그녀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정신이 들어요?”

걱정을 담은 목소리가 제법 따스했다. 뻣뻣한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려 했으나 지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름을 말해 볼래요?”

꽉 잠긴 목소리가 말이 되지 못했다. 연거푸 같은 질문이 더해졌다. 까슬한 입술이 부딪히며 간신히 단어 하나를 만들어 냈다.

“한… 희정.”

겨우 뱉어낸 이름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그래요. 희정 씨. 대답 잘했어요.”

정답을 말했는지 인자한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이 묻어났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흐릿했던 시야가 훨씬 또렷해졌다.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선한 인상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희정 씨,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남자가 거듭 질문을 던졌으나 대답이 빨리 나오지 않았다. 몽롱한 머릿속이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치면 다시 깨지 못할 깊은 잠으로 빠져버릴 것 같았다.

“스물… 여섯….”

“주소는요?”

희정이 꺼져가는 음성으로 반쯤 주소를 불렀을 때, 낯선 그림자가 그녀를 덮었다.

“박사님… 제발….”

감정을 억누른 듯한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에 병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을 더 해봐야 합니다.”

박사라는 사람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이런 지긋지긋한 검사를 언제까지 하실 생각입니까? 희정이 병명이 무엇인지 이미 짐작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하지만….”

청량한 머스크 향을 가진 남자의 음성은 위협에 가까웠다. 희정은 지겹게 이어지던 박사의 질문을 단번에 끊어 준 남자를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후….”

힘겨운 숨을 간신히 뱉어낸 희정은 지금 병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넓은 등이 빛을 막아주었기에 시리던 눈이 시원해졌다. 덕분에 간신히 들어 올리고 있던 눈꺼풀이 안심하듯 가라앉았다.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고맙다 인사라도 하고 싶어졌다.

“충분히 괴롭고 힘든 사람입니다. 지금은 그냥 쉴 수 있게 배려해 주십시오.”

남자의 굵고 나지막한 음성에 기대며 희정은 그대로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희정이가 제 곁을 벗어나야 살 수 있는 거라면….”

울음 같은 남자의 마지막 말은 희정의 귓가에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그라졌다.

***

성준은 올이 나간 방충망 사이에 손가락 하나를 끼워놓고 계속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하필 아침 내도록 손님이 없어 희정의 기분이 착 가라앉은 게 문제였다.

“희정아. 방충망 구멍이 더 커졌어. 이거 갈아야 하지 않을까?”

“….”

한마디 대꾸 없는 희정은 표정 하나 없이 침착했다. 무안한 마음에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옆자리에 있는 회전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기대었다.

“어이구, 의자가 삐그덕 거리는 것이 딱 봐도 바꿀 때가 지났네.”

그는 몸을 앞뒤로 움직여 듣기 싫은 쇳소리를 계속 만들어냈다.

“….”

무슨 짓을 해도 희정이 돌아봐 주지 않자 성준은 작전을 바꿨다.

“희정아 매달 삼백만원씩 생기면 정말 좋을 것 같지 않아? 일 년에 열두 달이니까 어휴 일 년이면 삼천육백만원이네. 대단하다. 그치?”

희정을 힐끔거리는 성준의 목소리가 애절하다 못해 비굴했다. 하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은 희정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싫어요.”

그녀의 손끝에서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커졌다.

“희정아. 이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이 정도 표현했으면 그만둘 법도 한데 그는 오늘따라 집요했다.

“눈 딱 감고 하루에 몇 시간씩, 글만 쓰면 되는 거잖아. 너 지금 아르바이트 비 얼마 받냐. 그 돈 모아서 생활이 되냐? 대출 이자 또 올라간다고 난리던데….”

그는 그녀의 자존심을 살살 건드렸다. 그것이 그의 작전이라면 드디어 성공했다. 키보드 소리가 딱 멈췄다.

“삼촌!”

배 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진, 울분에 찬 고함이 다 쓰러져 가는 사무실 벽을 울렸다.

“그러는 삼촌은 이번 달 사무실 월세 마련하셨어요? 제가 건물주 할아버지 뵐 면목이 없어요. 허구한 날 밀린 월세 다 모았으면 빌딩을 올렸겠어요.”

많이 참았다는 듯 그녀의 말에는 한치의 막힘도 없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지 희정은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일해야지. 희정아 제발 나 좀 도와줘라.”

고작 여덟 살 차이 나는 삼촌은 순한 댕댕이 같은 눈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꼬리를 흔들었다. 희정의 눈꼬리가 끝 간 데를 모르고 확 올라갔다.

“혹시 저 몰래 그 여자에게 돈 받으셨어요?”

쉬지 않고 떠들어대던 삼촌의 시선이 갈 바를 잃고 바닥을 더듬었다. 그저 찔러보는 말이었는데 사실이었나 보다. 희정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대책 없는 그의 행동에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삼촌은 그 여자가 이상하지도 않아요?”

“뭐가 이상하냐.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두른 것이 아주 완벽했어. 우리도 이제 돈줄을 잡은 거야.”

우리의 철없는 사장님은 그저 꿈에 부풀어 있었다.

사흘 전, 삼촌의 사무실로 한 여자가 찾아왔었다. 한눈에 봐도 변두리 망해가는 심부름센터를 이용할 만한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가능성은 딱 두 가지였다. 남들 몰래 불법적인 일을 의뢰하고 싶거나, 아니면 진짜 돈이 없거나. 하지만 그녀가 낡은 소파에 내려놓은 가방은 사무실 일 년 치 월세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었다.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모르지만 저희는 불법적인 일은 하지 않습니다. 보시다시피 얘랑 저, 둘밖에 없어서 위험한 일은 어렵습니다.”

아끼던 커피믹스를 종이컵에 탈탈 털어 넣는 희정에게 사장이 대뜸 손가락질을 했다. 눈을 뱁새처럼 뜨고 째려봤으나 그의 관심은 오로지 앞에 앉은 여자였다.

“글을 써 줄 사람이 필요해요.”

“글이요?”

여자는 다리를 꼬아 앉으며 고작 한마디를 뱉었다. 앞뒤 다 잘라 먹은 무심한 말에 사장은 살짝 짜증이 났다.

“제가 이해력이 좀 딸리나 봅니다. 무슨 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희정 씨 이번 공모전에 당선된 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이번에 시작하는 자서전 프로젝트에 희정 씨가 참여해 주면 좋겠어요.”

불빛에 반짝이는 손톱 끝에서 빳빳한 명함 한 장이 툭 떨어졌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사장은 두 손으로 얼른 그것을 받쳐 들었다.

희정은 뜨거운 종이컵을 여자 앞으로 내밀다 손을 도로 물렸다. 화려한 그녀의 차림새에 어울리는 대단한 명함이 희정의 마음을 쭈그러들게 했다.

“지역 신문에 조그맣게 난, 글 한 토막을 읽고 저를 찾아오셨다는 건가요?”

희정은 여자의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허리를 더 꼿꼿하게 세우며 물었다. 왜 다른 우수한 작가가 아니라 모자란 나였냐는 질문은 속으로 삼켰다.

“우리 의뢰인이 좀 까다로운 분이에요. 이름난 작가들은 전부 거절하셨어요.”

여자는 감정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무심한 얼굴로 툭툭 던지듯 말을 이었다. 묘하게 사람의 화를 북돋는 말투였다.

“희정 씨가 할 일은 자서전의 자료조사 정도면 충분해요. 의뢰인을 만나고 인터뷰하고.”

희정은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행동이 너무 수상했고 설명은 더 성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바빠서 어렵겠네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신문에 잘 보시면 제 글 위에 우수상, 대상 받으신 분 있어요. 저는 고작 장려상이거든요.”

자리에서 일어난 희정이 홀짝거리던 커피를 마저 입으로 털어 넣었다. 종이컵을 야무지게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는 것까지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사장님, 저 아르바이트하러 가요. 집으로 바로 퇴근할 테니 뒷정리 잘하시고요.”

한쪽 어깨에 가방을 둘러멘 희정이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착수금 이천. 계약기간 동안 매달 삼백씩 지급. 작업이 끝나면 성공 보수는 알파. 어때요?”

“….”

“식당에서 밤늦게까지 피아노 치는 것보다는 괜찮지 않아요?”

희정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드디어 표정이라는 게 생겼다. 하찮은 벌레를 바라보는 것 같은 경멸. 두 사람의 눈이 공중에서 차갑게 부딪혔다.

“사람 뒷조사 솜씨가 아주 탁월하시네요. 그런 대단한 능력으로 댁이 글쓰기도 직접 하시죠?”

희정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당장 달려가 여자의 멱살이라도 잡고 늘어지고 싶었다. 돈으로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쓰레기.

“생각 있으면 연락하세요. 기한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

여자가 다시 마론 인형같이 표정 없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깜빡했네요. 자서전 주인공은 바로 이 남자예요.”

희정의 곁으로 다가온 여자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굳이 손톱 끝을 꼭 눌러 희정의 앞으로 내미는 여자의 손이 뱀같이 징그러웠다.

“뭐 보기 싫으면 구겨서 버리든가요.”

여자는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그녀의 눈앞에서 사진을 툭 떨어뜨렸다. 팔랑거리는 사진이 바닥에 닿기 직전 희정은 결국 허리를 굽혔다.

“으휴….”

그녀의 약한 마음을 비웃듯이 여자가 눈 한쪽을 찡긋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희정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 짜증 나. 남의 사진을 그렇게 함부로 버리면 어떻게 해. 나쁜 여자 같으니라고.”

먼지를 툭툭 털며 사진을 조심해서 들어 올렸다.

“어… 이 사람은….”

***

“저기 희정 씨 미안한데, 오늘까지만 하고 그만 나와줬으면 좋겠어.”

매니저는 희정의 눈을 피하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분위기 잡고 앉으라 할 때부터 예상은 했었다. 저녁 손님이 몰아닥칠 시간인데 둘이 마주 앉을 일이 뭐가 있겠나. 짐작을 했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매니저님, 갑자기 이러시는 게 어디 있어요? 제가 뭐 실수한 거라도 있어요?”

희정이 황당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희정 씨 성실하게 일 잘하는 거야 내가 보증하지. 그런데 말이지,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끔 일어나잖아.”

뒤통수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그는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뒷말을 얼버무렸다. 그의 늘어진 턱살을 붙잡고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 알아볼 시간도 주지 않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통보하시면 저는 어떻게 해요.”

희정은 억울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매니저를 몰아붙였다.

“희정 씨 정말 미안해. 하지만 윗선에서 결정한 일이라 나도 어쩔 수가 없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것 같은 흰 봉투를 희정의 앞으로 쑥 내밀었다.

“오늘까지 일한 셈 치고 일당 챙겼어. 퇴직금이라 생각하고 제법 넉넉하게 넣었으니까 이거 받고 얼른 가. 나도 좀 바빠서.”

현금을 만져본 것이 언제 적인지. 빳빳한 만 원짜리가 낯설었다. 아르바이트 잘리는데 별다른 이유가 있겠냐마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갈무리하기 힘들었다. 확, 법대로 신고할지 고민하는데 창문 너머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딸랑.”

문에 매달린 앙증맞은 종소리와 함께 낯선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매니저님.”

혀가 꼬부라지는 여자는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덥석 매니저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이고, 유나 씨 왔어요? 내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잖아. 오는데 힘들지는 않았어요?”

쳐져 있던 매니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오냐, 너구나. 날 쫓아낸 당사자가.

“저기 요 앞에 지하철이 막혀 가지고. 내가 좀 늦었어요. 매니저님 용서해 줄 거죠?”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는 여자는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매니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곡 선택은 제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셔서 저번 독주회 레퍼토리 중에 골랐어요. 이 곡으로 말할 것 같으면요 제가 유학을 갔을 때….”

희정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개울물에서 놀기에 그녀는 너무 우량종이었다. 당당히 실력으로 자리를 따냈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희정은 자아 성찰이 빨랐다.

“매니저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커다란 가방을 등에 짊어진 희정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 흰 봉투를 고이 접어 가방 깊숙이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도도하고 까칠한 표정을 만들었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