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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싸늘한 바람이 부는 가이아의 정원. 고요히 잠든 노아의 옆에 조심스레 무릎 꿇은 리에나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그의 피가 스며든 땅이 새까만 색으로 썩어들어갔다. 그의 숨결이 닿은 곳에 머물던 것들은 모든 생명력을 잃은 채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은 잔디들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한 채 그대로 뿌리를 세상에 내놓고 조용히 스러졌다.
“미안, 합니다, 노아.”
잘게 떨리는 손이 조심스레 노아의 뺨을 감쌌다. 피로 얼룩진 얼굴은 리에나스의 손에 너무도 쉽게 담겼다.
“노아-.”
쏴아아. 무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가이아가 위로의 말 대신 떨어트린 나뭇잎들이 하늘하늘 바람에 날리며 리에나스의 머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내가, 내가….”
리에나스의 숨이 노아의 살결에 닿았다.
“당신을….”
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어두운 정원 안. 옹기종기 가이아의 뒤에 숨은 신수들이 코를 찡긋거리며 리에나스의 말소리에 귀 기울였다.
“내가, 당신을….”
노아의 몸을, 얼굴을,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모습을 두 눈에 가득 담았다.
그리곤 이내, 그의 몸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깊은 잠에 빠진 노아가 단잠에서 깨어나지 않게, 다시금 고통의 수렁에 빠져 그 속에서 허우적대지 않게.
최대한 노아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럽게 노아를 안아 든 리에나스가 조용히 발을 들어 올렸다.
-잘 가, 리에나스.
따스한 바람이 리에나스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의, 소중한 벗.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작별 인사였다.
1
마계와 인간계의 경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피비린내 섞인 끈적한 바람이 리에나스의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수한 어둠만이 느껴지는 저의 유일신, 아스모데우스의 곁에 있을 때는 느껴본 적 없는 역함이었다.
리에나스는 마계의 이인자라고 불릴 정도로 강한 마족이었다. 원래라면 딱딱한 정복을 입고 마신의 곁을 지켜야 할 그였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정복 대신 가벼운 셔츠와 바지를 입고, 항상 하나로 묶고 다니던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평상시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한 리에나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바람에 펄럭이는 셔츠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리에나스가 조용히 제 신세를 한탄했다.
리에나스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마신, 아스모데우스와 함께했다. 그의 앞엔 언제나 그의 신이 존재했고, 그는 마찬가지로 신만을 위해 존재했다. 마신을 위해 제 온 삶과 목숨을 바치는 것에 대해 리에나스는 단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신을 보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계 안에서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그건 리에나스도 마찬가지였다. 리에나스는 언제나 복종했고, 순종했다. 제 신의 앞에 무릎 꿇고 그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지금. 근 1,000년 만에 처음으로 마주한 마계와 인간계, 그 경계에서 본 광경에 말을 잃은 리에나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도대체….”
마신, 아스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한 게 조금, 아주 조금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대지는 온통 질펀한 피로 뒤덮여 있었다. 세상은 굶주린 마수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고, 느껴지는 건 광기에 미친 인간들의 따가운 살기와 적개심, 그리고 피와 힘에 미친 마족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뿐이었다.
그 모든 걸 온몸으로 생생하게 느끼고 있자니, 마치 냄새나는 오물을 뒤집어쓴 듯했다.
리에나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경계의 끝자락. 인간계와 마계 그 사이 어딘가쯤. 발을 걸치고 선 리에나스가 탁한 숨을 내뱉었다.
“….”
리에나스가 인간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질퍽한 그림자가 리에나스의 발목을 끈질기게 잡아당겼다. 경계 안의 마수들은 모두 도망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경계 건너편, 도망가지 않은 인간들이 날 선 시선으로 리에나스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리에나스를 죽일 기세였다.
하지만 리에나스에겐 그 무엇도 방해가 되지 못했다.
“모든 건 나의 신을 위해서.”
새빨간 입술이 야트막한 호선을 그렸다. 진실하지도, 그렇다고 거짓되지도 않은 미소를 흘리며 리에나스는 그렇게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였다.
*
세상은 세 개의 세계로 구분되어 있었다.
어둠을 관장하는 아스모데우스의 땅, 마계.
빛을 관장하는 이본느의 땅, 천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생명 없는 공허한 땅, 중간계.
공허로 가득 찼던 중간계에 탄생한 첫 생명은 이본느와 아스에게서 떨어져 나온 파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본느의 파편은 중간계의 번영과 활기를 이끌어왔고. 아스의 파편은 안식과 고요를 이끌어왔다.
해와 달이 뜨고, 물이 흘렀다. 땅은 비옥해졌고, 그 속에서 태어난 풀과 나무들은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야기했다.
무수히 많은 생명의 탄생 속엔 인간도 있었다. 여타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지성을 타고난 인간들은 중간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간계는 인간계가 되었다.
그리고 중간계, 아니, 인간계가 삶의 터전이 되어가는 동안. 아스와 이본느는 인간계를 사이에 두고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학살했고, 서로의 세계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자 했다.
이본느의 세계에선 어둠이 곡 악이었으나, 아스의 세계에선 빛이 곧 악이었다.
한 치의 물러남도 없는 치열한 전투 속. 인간들은 제게 빛을 내려준 이본느를 제 신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빛과 어둠이 탄생한 이래 어둠이 겪은 최초의 배신이었다.
인간은 마족보다 훨씬 약했지만, 수가 많았다. 인간의 손에 죽는 마족들이 하나둘 생겨나자, 아스는 제 아이들의 안위를 위해 전쟁을 강제로 종식했다.
천계에 남아 천족을 학살하던 마족들은 피 튀긴 창을 내던진 채 마계로 돌아왔고. 인간계에 남아있던 마족들은 인간의 배신에 치를 떨며 마계로 귀환했다.
그리고 그렇게 2천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인간의 손에 자행되던 살육의 현장은 잊힌 지 오래였다. 인간계는 완전한 이본느의 땅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스가 이본느를 향한 복수를 접은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들은 제 영원한 적인 천계를 향한, 그리고 저희를 배신한 인간계를 향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으니.
200년에 한 번 태어나는 이본느의 아이, 성자를 처리하기 위해 내려온 리에나스가 바로 그 증거였다.
“하….”
리에나스가 뻐근한 목을 뚜둑, 꺾었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에나스는 개의치 않고 어깨, 손목, 발목을 연이어 움직였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뚜두둑, 하는 소리가 울렸지만 역시나 리에나스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거 참.”
리에나스가 피 묻은 옷소매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인간 한번 더럽게 많네.”
인간들의 말을 빌려 말해보자면. 하늘에 계신 이본느께서 신비로운 늑대를 타고 내려와 세상에 연보랏빛 장막을 흩뿌려 놓는 시간. 간단하게 말해 해가 저무는 때.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모습을 보며 리에나스가 한숨을 삼켰다.
리에나스가 성자를 죽이라는 마신의 명을 받고 마계를 떠난 지 어언 일주일째였다.
리에나스는 일주일 동안 인간계를 돌고, 돌고, 또 돌았다. 그러나 마주하는 건 오직 산적이나 겁을 잃은 맹수들뿐이었다.
“미치겠네, 진짜.”
리에나스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 근처에서 어렴풋이 신성한 기운이 느껴지긴 했다. 신력을 느낀 건 천 년 전이 마지막이었지만, 리에나스는 기분 나쁘게 제 속을 긁고 있는 이 기운이 신력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오라는 신전은 안 나오고 더러운 욕심만 뚝뚝 흘리는 인간들만 튀어나오는 탓에 리에나스의 짜증은 극에 달해있었다.
“커헉!”
188이란 큰 키를 가졌지만, 우락부락하지 않은 여린 몸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검조차 뽑지 않은 허술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숲속의 산적들은 끊임없이 리에나스를 급습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로는 항상 같았다.
“사, 살려…!”
차마 끝마치지 못한 산적의 비명이 허공으로 허무하게 흩어졌다.
푸확! 산적의 복부에서 시뻘건 핏물이 튀어 올랐다. 사방으로 흩어진 뜨거운 선혈이 아름다운 궤도를 그리며 리에나스의 발치에 투둑, 떨어졌다.
리에나스의 허리춤에 달린 새까만 검 대신, 온갖 것들로 더럽혀진 산적의 검이 그들 자신의 온몸을 꿰뚫었다.
죽어가는 그들의 시선에 서린 것은 명백한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아.”
그러거나, 말거나. 어디선가 느껴진 기분 나쁜 신력에 리에나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찾았다.”
그토록 기다리고 찾아 헤매던 목적지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신경질적이던 리에나스의 얼굴에 옅은 기쁨과 뿌듯함이 들어찼다.
“테이.”
리에나스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리에나스는 이미 제가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살육의 현장엔 흥미가 떨어진 지 오래였다.
“테이?”
리에나스의 부름에 허공이 크게 일렁였다. 그와 동시에 리에나스의 수족, 테이가 투명한 허공을 찢고 나타났다.
“왜, 주인.”
등장한 남성은 리에나스와 같은 마족이었다. 그처럼 큰 키를 가졌고, 무료한 시선을 가졌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리에나스는 길고 검은 머리를 가진 반면에, 남성은 짧게 자른 회색 머리를 가졌다는 것 정도일까.
하나밖에 없는 제 쌍둥이 형제보다도 더 자신을 닮은 남성, 테이를 흘끗 바라본 리에나스가 고개를 까닥였다.
“갈아입을 옷 좀 가져와.”
“응.”
테이가 짧게 대답하며 순식간에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그런 테이를 흘끗 바라본 리에나스가 이내 천천히 발을 옮겼다.
발을 옮기면 옮길수록 리에나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숲 너머로부터 느껴지는 신력은 충분히 순수하고 신성했다. 성자가 아니라면 인간은 감히 품을 수도, 넘볼 수도 없을 정도로 순도 높은 신력이었다.
리에나스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어쩐지….”
어쩐지 불안했다.
리에나스는 성자를 죽이라는 아스의 명을 곱씹었다.
인간을 죽이는 건 쉽고 단순한 일이었다. 계약 없이 막무가내로 인간계로 넘어오며 마력 대부분을 잃은 리에나스였지만, 그런 그조차도 인간 하나쯤은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리에나스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끼는 걸까. 정체 모를 두려움을 느끼고, 끝이 없는 걱정에 잠기게 되는 걸까.
리에나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느껴지는 두려움이 낯설었다. 의아하고, 동시에 신기했다. 리에나스가 오랜만에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며 입술을 꾹 앙다물었다. 그리고 그때.
“주인.”
소리 없이 등장한 테이가 새까만 옷들을 불쑥 내밀었다.
길게 이어지던 리에나스의 생각이 끊겼다. 느리게 시선을 돌린 리에나스가 눈을 껌벅이며 테이를 바라보았다. 멍한 리에나스의 표정에 테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옷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받아. 팔 아파.”
퉁명스러운 테이의 말에 리에나스가 느릿하게 옷을 받아 들었다.
“테이.”
“응.”
“고마워.”
“응.”
“그러니까 이제 신께 가봐.”
“응.”
“한시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마.”
“응, 주인.”
테이가 건네준 옷자락들을 힘주어 쥐며, 리에나스는 생각했다.
뭐가 어찌 되든 간에, 모든 건 내 신을 위한 일일 것이라고. 성공도, 실패도, 모두 신의 뜻 아래 존재할 것이라고.
“모든 건, 나의 신을 위해서.”
*
신전은 끔찍하리만치 온통 하얬다. 벽도, 천장도, 조각상들도. 검정과 황금이 뒤섞인 마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얗고 또 하얬다.
성자를 죽이기 위해선, 우선 신전을 파악해야 했다. 언제 사제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언제 성자의 방을 방문하고, 누가 성자의 방 앞을 지키는지도 알아야 했다.
인간 하나쯤은 손쉽게 죽일 수 있는 리에나스였지만, 그가 죽여야 할 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성자였다. 생각 없이 행동했다간 자칫하면 약해진 몸으로 천족과 싸우게 될 수도 있었다.
죽진 않겠지만, 천족과의 전투는 항상 큰 후유증을 몰고 왔다. 때론 팔 한쪽을 잃기도, 눈 하나를 잃기도, 100년간 깊은 잠에 빠지기도, 양 날개를 잃기도 했다.
그랬기에 천족과 싸우게 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던 리에나스는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이곳, 신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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