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우리 결혼하자.”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오빠가 충격을 받아서 미친 소리를 하는 거라고, 상처가 커서 아무 말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어제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았거나.

“왜 대답이 없어? 결혼하자고.”

“싫어.”

어차피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후회할 말이었다.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는 걸 후회하고 자책할 게 뻔한데, 받아들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내 말 들어. 하정 언니가 오빠 떠났다고 오빠까지 하정 언니 버릴 거야?”

“충동적으로 하는 말 아니야. 하정이 때문에 하는 거야. 네 도움이 필요해서.”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하정 언니를 위해서 나랑 결혼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정 언니를 위한다면 어떡해서든 그 언니의 정략결혼을 막아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나한테는 힘이 없어. 하정이를 데리고 올 힘이. 그런데 너한테는 있잖아. 너는 하정이 데리고 와줄 수 있잖아.”

“지금 나를 이용하겠다는 거야?”

정말이지 전윤우는 끝까지 나쁜 놈이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자기 옆에 붙어 있는지 알면서. 내가 자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꼭 이런 말을 해야 할까?

“서원그룹이 우리 회사에 투자만 해준다면, 그래서 내가 후계자로서 제대로 자리만 잡는다면 나중에 하정이 데리고 올 수 있어. 많이도 안 바래. 딱 3년. 3년이면 돼. 그때까지만 네가 내 방패막이 되어주라.”

내가 왜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지? 내가 뭐 때문에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 고작 전윤우 하나 좋아한 죄로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마 뿌리치고 나올 수가 없었다. 나쁜 마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3년 뒤에 놓아줄게. 욕심도 안 내. 딱 하정이 데리고 올 수 있을 정도만 되면 너 놓아줄게.”

“오빠는 나한테 그런 말을 하고 싶어? 내가 오빠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런 말이 나와?”

“좋아하는 것까지 안 막을게. 네 마음까지 어떻게 할 생각 없어. 결혼한 3년 동안은 너한테 최선을 다 할 거야. 실망시키지 않을게.”

더 이상 듣기 싫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혹하는 나도 싫었고, 내 마음을 다 알면서도 이런 제안을 하는 윤우는 더 꼴보기 싫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윤우의 눈빛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내가 오빠 좋아해서 이 제안 받아들일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야. 아무리 좋아해도 이런 바보 같은 짓은 안 할 거니까 남은 시간동안 하정 언니랑 잘 지내.”

기를 쓰고 버텨야했다. 윤우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싶었는데 이번만큼은 그럴 수도 없었다. 아무리 윤우를 좋아한다지만 이혼하기 위해서 결혼할 수 없었으니까.

“이럴 시간에 하정 언니한테 더 집중해. 두 사람 이제 시간 얼마 안 남았잖아.”

마지막 희망까지 짓밟아줬다. 이게 나쁜 짓이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분명히 몇 분전까지는 윤우가 안쓰러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미웠다.

하정을 좋아하는 만큼 나를 배려해줬으면 좋겠는데 윤우한테는 그런 일말의 양심 같은 것도 안 남아 있는 것 같아서.

***

괜히 거절했다. 그 제안을 거절하고 나서 만나기는커녕 연락도 되지 않는 윤우 때문에 계속 후회하고 있었다.

정말로 내 말대로 하정과 모든 시간을 쏟고 있는 것인지,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고 문자를 보내도 읽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하고 기다리려고 해도 차마 하정을 보내지 못해서 거기까지 따라가는 건 아닌지 겁이 났다.

“안 되겠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겠어.”

결국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결과 듣고 가야지.”

엄마의 목소리에 그제야 눈치 챘다.

‘아, 나 검진 받고 있었지?’

그것도 잊을 만큼 온 신경이 윤우에게 가 있었다.

그런 나쁜 놈이 뭐가 좋다고 이렇게 안달인지 나 자신조차 알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제일 중요했다.

이렇게 있다가는 친한 동생도 못할까 봐 무서웠다.

“조금만 기다려 봐. 곧 보고 싶은 사람 올 거야.”

엄마의 말도 잘 안 들렸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것인지, 정말 하정따라 가려고 출국 수속을 마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래? 결과 안 나올까 봐 불안해? 괜찮을 거야. 저번에도 아무 이상 없었잖아.”

“어? 어.”

“얘가 왜 정신을 못 차려? 정신 차리고 저기 봐.”

엄마의 목소리를 따라 움직이니 거짓말처럼 윤우가 서있었다.

‘오빠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평소 같았으면 이미 엄마 버리고 달려갈 애가 왜 이러고 있어?”

“엄마, 결과는 엄마 혼자 들어도 되지? 나, 윤우 오빠랑 잠시 얘기하고 올게.”

나는 엄마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잽싸게 윤우의 손목을 잡고 달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무슨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여전히 내 머릿속은 전쟁통일 것 같았다.

“그만 달려. 여기 아무도 없어.”

정신 차려보니 아무도 없었다. 물론 있었다고 해도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왜 연락 안 됐어? 전화도 안 되고 문자도 안 되고 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잠수 탄 거야?”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

“생각? 무슨 생각? 생각할 시간이 왜 필요한데?”

“네가 마지막 희망이었어. 하정이 말고 다른 여자는 죽기보다 싫은데,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너한테 도와달라고 한 거야. 하정이 아니면 의미 없는 짓이라 아무나 하고 해도 괜찮았으니까.”

“그렇게 그 언니가 좋아?”

물어보면서 비참했다. 하정이 예쁜 것도 알고 있었고, 똑똑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달리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언니가 어디가 좋은데? 더럽게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못된 언니가 뭐가 그렇게 좋은데?”

“함부로 말하지 마. 하정이 성격이 예민하든, 못됐든 나한테는 하나도 안 중요해. 하정이가 내 옆에 있는 게 중요하지.”

오기라는 게 생겼다. 옆에서 해바라기처럼 오빠만 바라보는 나는 안 되면서 못되 먹은 하정 언니는 된다는 게 용납도 안 됐다.

“아무리 너라도 용서 못해. 다 건드려도 하정이는 건드리지 마. 내가 하정이 때문에 무슨 선택까지 했는지 알면서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해?”

그리고 가지고 싶었다. 하정만 바라보는 전윤우라는 남자를.

아니, 가지지 못한다면 옆에라도 있고 싶었다.

마음은 주고 받지 못하더라도 추억은 쌓일 테니까.

그러면 정이라는 게 쌓여서 오빠도 나를 봐주지 않을까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말해 봐. 나랑 결혼해서 뭐 어쩌겠다고?”

말은 청산유수처럼 막힘없이 하더니 막상 들이닥치니까 무서운 것인지 입을 열지 않는다.

“왜 물어봤는데 대답을 안 해? 나도 오빠 계획을 알아야 내가 오빠랑 결혼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결국 내가 졌다. 어차피 질 게임을 뭐 때문에 이렇게 시간을 끌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너는 결혼만 해주면 돼. 너랑 결혼하면 너네 집에서는 당연히 우리 집 도와줄 거고, 그럼 3년 안에 우리 회사 성장시켜서 후계자로서 제대로 서기만 하면 돼.”

참 두루뭉술한 계획이었다.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성장을 할지 미지수였고, 성장을 해도 얼만큼 할지 미지수였다.

그리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속도로 성장해도 후계자로서 제대로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장담해? 지금까지 놀고 먹기만 했잖아. 하정 언니랑 데이트 하면서.”

“어, 할 수 있어. 하정이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어. 너네 집도 너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잖아. 나한테는 서원그룹도 필요하지만 서희랑 서율이도 필요해. 너네 집 배경만큼 절실하게.”

이 오빠 대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려는 걸까? 우리 집안만큼 내 언니와 내 오빠가 필요하다는 건, 나를 그저 방패막이로만 생각한다는 뜻인데, 본인이 직접 말해놓고서 듣는 내가 그게 어떤 뜻일지 모른다고 생각할까?

“너 이용하는 만큼 더 잘해줄게. 우리 관계에 최선을 다할 거고, 서운하게 만들지도 않을게.”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하정을 위해서 결혼한다면서 나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니, 그게 얼마나 큰 희망고문인지 윤우는 알고 있을까?

아니, 알면서도 이 짓을 하려는 나도 문제는 있는 거겠지. 전윤우 하나만 바라보고 이 짓거리를 하는 거니까.

그렇다고 무를 수도 없었다. 또 거절했다가 다시 윤우의 연락이 두절되면 어쩌나 싶었다.

차라리 이런 계약 결혼을 선택하지, 윤우를 놓치는 건 하기 싫었다.

내가 매달린 것도 아니고 오빠가 스스로 내 옆에 있어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고 믿었다.

3년이면 짧은 시간도 아니고 꽤 긴 시간인데, 그 긴 시간도 윤우가 하정만 바라볼 리도 없고, 내가 윤우 오빠의 여자가 안 되라는 법도 없다.

“그래, 결혼하자. 뭐가 됐든 우리 결혼해보자."

결국 선택했다. 어떡해서든 윤우의 옆에 있기로.

사랑에 미쳐서 허튼 짓 하는 것을 알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사랑에 미쳤으니까 가능한 일이었고, 나중에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후회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 후회한다고 해도 무를 수 없었다.

지금은 윤우 오빠만 생각하기로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어찌됐든 나는 윤우 오빠 곁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

***

3년 후.

암흑으로 가득 차 적막이 가득한 집안, 그곳에서는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만 들린다.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3년 동안은 나한테 집중하겠다면서 이게 뭐야? 계약기간도 끝나가는데.”

벌써 3년이 다 끝나간다. 그 시간동안 나는 윤우의 마음을 잡지 못했고, 우정그룹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윤우 오빠가 세운 나라는 방패막이를 이용해서.

빛의 속도로 성장한 우정그룹은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처음 굳게 먹었던 윤우의 마음도 달라진 것 같았다.

집에서 애처롭게 눈물만 흘리며 기다리는 서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굴었다.

“오빠, 제발 전화 받아. 집은 왜 안 들어오는 거야? 이렇게 나 혼자 둘 거야?”

이제 날짜를 세는 것도 지쳤다. 윤우는 셀 수 없을 만큼 외박을 했고, 그동안 서아를 포함한 서원그룹의 집안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여자를 다 만나고 다녔다.

그런 주제에 다정하기는 더럽게 다정했고.

그래서 서아는 더 놓을 수가 없었다. 그 여자들은 그냥 윤우에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었지만 서아는 없으면 안 되는 공기처럼 윤우의 옆에 머무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있는 듯 없는 듯 늘 주위에 머물러 있는 공기를 윤우가 알아줄 턱이 없었고, 서아는 메말라갔다.

물을 먹지 못해서 말라가는 나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