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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재수 없는 날
5월 말, 내내 뿌옇던 미세먼지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성주혜 실장은 하늘이 당신의 생일에 저 맑은 공기를 내셨다며 미역국을 말 그대로 한 바가지 차려 줬다.
은택은 말없이 미역국을 밀어 놓고 커피만 들고나오는 길, 성 실장은 등 뒤에서 잔소리도 한 바가지를 뿌려댔다.
“아니! 한두 살 먹은 어린 애예요? 거, 좀, 드시고 가시라니까. 부모 자식 장수하고 서로 고맙다, 하는 건데 그게 뭐 어때서. 1년에 딱 한 번 먹는 걸 싫다고 저렇게 고집을 피우신대. 아니, 애냐고요!! 아유!”
자신의 탄생이 기쁜 적 없었다. 하여 은택은 축하받을 것도 없고, 감사할 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성 실장 고집도 대단하다. 매년 싫어하는 미역국을 밀어내는 은택인데, 매년 미역국을 들이민다.
“오늘은 호텔로 퇴근해요.”
뒤도 안 돌아보고 기다리지 말라 이르며 차에 올랐다. 이미 작아지는 성 실장이 뭐라 구시렁대는지 상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출근하자마자 기쁜 소식이 들려오긴 했다. 한주 건설에서 중동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따냈다. 무려 70억 달러 규모의 수주액으로 은택이 담당하고 있는 혁신기획조정실과 한주 건설의 협업이 마침내 빛을 발했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져 나오고 축하 메시지가 폭주했으며, 은택의 조부, 주현석 회장의 평생 들을까 말까 한 치하도 있었다.
“잘했다!”
그러나 오후 즈음 느닷없이 찾아온 약혼자, 지온을 시작으로 생일치곤 괜찮았던 은택의 하루는 밑바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기분 좋게 회의를 마무리하고 집무실로 오니, 지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
예고 없는 방문에 본의 아니게 은택의 미간이 먼저 좁아졌다.
기억하기론 지온은 동남아시아 투어 중이었다. 재작년 유럽 클래식 음반 레이블과 계약하더니 바쁜 공연 일정으로 얼굴 보기 힘든 약혼자였다.
“싱가포르 가기 전에 들렀어.”
“무슨 일이야?”
공연이 있을 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안중에 없고 피아노 앞에만 앉아 있던 지온이었다.
“한 달 만에 보는 건데 반가운 표정이 아니네.”
소파에 앉아 들어오는 은택을 올려보며 지온이 뽀로통 입술을 내밀었다. 은택은 다시 물었다.
“연락도 없이 와 놓곤. 나도 너처럼 바빠.”
은택은 들고 있던 노트북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인터폰을 눌러 다음 미팅을 15분 미루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나한테 15분 주는 거?”
소파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는 은택의 움직임을 따라보며 지온이 깜찍하게 불평한다. 그에 은택은 까딱, 꼭 한번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지온이 피식 웃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은 곱상하고 티끌 하나 없다.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티가 지온의 온몸에 좔좔 흐른다.
가는 곳마다 문이 열리고, 환영받고, 원하는 것마다 제 손에 쥐어지니, 울어 본 적도 없고, 떼 써본 적도 없고, 애 써본 적도 없는 돈 많은 집 영애다운 지온이었다.
그러나 15분이 짧다, 하여 더 줄 은택도 아니었다. 그리워하기엔 별 특별한 감정 없는 약혼자였고, 보고 싶었다, 하기엔 애가 닳도록 그리운 연인도 아니며, 반갑다, 웃어주기엔 친우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한주 레나세르 호텔> 건으로 벨기에 대사를 만나기 전 미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큰둥한 은택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지온이 짧은 숨을 내뱉고 단번에 말했다.
“파혼하자.”
은택이 앉은 그대로 두 눈만 치켜떴다. 못 알아들은 줄 오해했는지 지온이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한다.
“파혼하자고.”
은택은 다리를 바꿔 꼬며 느른하게 몸을 뒤로 기대며 지온이 방금 내려놓은 찻잔을 바라봤다.
지온의 선호 금융과 은택의 한주 그룹. 두 집안의 막역함이 오늘의 지온과 은택을 만들어 냈다.
소위 재벌들이라는 인간 군상들의 삶이란 협소하고 폐쇄적이었다. 같은 유치원에 들어가고 같은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학길에 오르기까지. 가는 곳도 만나는 사람들도 다 거기서 거기였다.
따라서 지온과 은택의 약혼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인생에 결혼이 있다면 지온과 은택은 당연히 부부라 불러 마땅할 그 좁아터진 세상의 선남선녀였다.
하여 은택은 거부하지 않았었지만 기뻐하거나 설레지도 않았었다. 당연한 것을 감사하고 좋아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결혼 약속을 깨자는 소리를 듣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슴에서 일어야 할 슬픔 아니면 분노가 일절 없었다.
은택에게 처음 떠오른 생각은 귀찮다, 였다.
주현석 회장에게 설명해야 했고, 그의 여섯 번째 아내 박명자 여사가 들이밀 맞선녀 파일은 또 얼마나 많을까. 뿐인가. 그녀의 아들 주찬호는 은택의 입지를 다질 처가를 잃었으니 좋아 날뛸 게 뻔했다.
근데 그게 다였다. 단지 번거로울 따름이었다.
하여 이 파혼에 빚이 누구에게 있는지, 누가 이익이고 손해인지 따질 것 없이 그냥 알았다. 하면 될 것을.
“왜?”
나름 같이 알고 지낸 시간이 있기에 어울리지도 않는 예의를 부려 은택은 괜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넌 나한테 관심 없잖아. 그리고….”
지온이 말을 멈추더니 숙였던 고개를 살짝 들어 갸우뚱 은택의 얼굴을 바라본다.
“…나 남자 있는 거 알면서. 사람 붙이지 않았어?”
치사하게 여자 꽁무니나 캐고 다니지는 않는다.
굳이 그렇게 요란 떨지 않아도 은택에게 아부하는 사람들, 뒷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사람들이 시시콜콜히 지온의 숨겨진 남자의 얘기를 물어다 주긴 했었다.
결혼도 아니고 약혼한 사이니 은택은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근데 다른 남자 때문에 파혼을 한다니, 약간 거슬리긴 하다.
차라리 네 낯짝 보기 싫어서, 혹은 네 성격이 거지 같아서 파혼하자고 했으면 좀 덜 기분이 상했으려나.
업보. 그건가 보다. 호색한으로 유명한 주 씨 어르신들이 울린 여자들의 눈물이 이렇게 은택의 기분을 제대로 잡치는가 보다.
“그래. 알았어.”
이제 좀 분노가 인다. 은택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책상 의자에 앉아 배신과 실망, 그리고 체념 같은 단어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런 감정도 막대한 손해는 없다는 것에 쉬이 사그라든다.
“알았어. 나가봐.”
“널 사랑하다 지쳤어.”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넘기다 손이 멈췄다. 파혼하자는 말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사랑?
은택의 눈썹 산이 올라갔다. 그 아래 황당하여 커진 눈동자가, 말해 놓고 시선을 피하는 지온을 똑바로 향했다.
“넌 왜 나랑 약혼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널 사랑해서 약혼했었다고.”
사랑이라니. 얘가 언제부터 이렇게 물색없는 소리를 뱉어내는 애였던가. 아니 진정 몰랐단 말인가. 이 바닥에서 약혼과 결혼은 거래다. 사랑 따위가 아니라.
난데없는 지온의 사랑 타령에 집채만 한 짜증이 몰려왔다. 끓는 한숨을 꾸욱 눌러 담으며 고개를 서류로 다시 내렸다.
지온의 짧은 한숨 소리와 잦아든 목소리가 이어졌다.
“주은택. 나 혼자 하려니 힘들더라. 사랑도 받는 맛이 있더라고. 미안하다. 내가 먼저 널 포기해서.”
뭘? 누가 누구를? 그 포기라는 단어 하나에 짜증이 분노로 뒤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랑 같은 소리하고 있네. 사랑받지 못하니까 분하고 억울했어? 그래서 포기하고 바람피운 거야?”
은택은 피식 비웃어 줬지만, 꾹 물린 턱은 제법 아팠다. 저 혼자 삽질하다 이게 아닌가 싶어 달아나는 주제에 네가 날 포기했다고? 누가 사랑해 달랬나?
“애썼네. 그렇게 감당도 못 할 거 하느라. 가봐.”
“사랑을 감당하려고 하는 줄 알아? 심장이 있으면 그냥 하는 거지?”
탁! 펜이 책상에 큰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반면 지온은 일어난다. 일어나 제 소지품을 챙겨 들고 문으로 걸어가는 자세가 무대 위를 걷는 것처럼 우아하기 짝이 없다.
문이 열리는가 싶었는데.
“너 참 딱하다. 네 심장은 살려고만 뛰는구나.”
“뭐?”
지온이 돌아섰다.
“건강해라.”
문이 닫혔다.
“저게 근데!”
화를 내봤자 은택은 혼자였다. 서류 위의 글자가 머릿속에서 엉켜 버렸다. 펜을 쥐고 있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은택은 그 펜을 이번엔 냅다 집어 던졌다.
***
그날의 사달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온의 사랑 타령으로 불편한 심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은택의 기분을 제대로 뒤집어 놨다.
어머니, 변지숙 여사였다. 아니 지숙 베르너 부인이라 불러야 하나? 1년에 딱 한 번, 은택의 생일에 전화한다.
- 은택아, 생일 축하한다.
“네.”
- 언제 한번 뮌헨으로 놀러 와.
“네.”
- 여긴 6월이 좋아. 꽃도 많이 피고, 날씨도 청명하고.
“네.”
은택은 뮌헨에 출장차 자주 갔었다. 꽃보다 나무를 좋아하고 청명한 날씨보다 코가 시큰하도록 추운 날씨를 더 좋아한다.
25년 동안 어머니라는 사람은 해마다 빠짐없이 생일을 축복해 주지만 그 아들이 어디에 가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지금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알아볼 수나 있을까. 남과 다를 바 없는 어머니와 아들이었다.
버린 엄마와 버려진 아들이라는 관계. 어디에 사는지 버젓이 알고 있어도 서로 찾지 않는 모자(母子).
오늘 서른이 된 은택은 조금 전 지온에게 그랬듯, 듣는 사람 가슴을 후벼 파면서까지 거절을 잘한다.
이에 ‘전화 그만하시라.’ 충분히 얘기할 수도 있고, 그것이 싫으면 이즈음 오는 독일발 전화를 무시해도 되련만.
은택은 거절도 못 하고 부지런히 전화를 받으며 그 지지부진한 끈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25년 동안 봐온 곽지온은 그렇게 쉬이 밀어내면서. 왜 25년 동안 한 번도 찾지 않는 어머니는 떨쳐내지 못하는 것인지.
- 사랑해, 아들.
썩을 사랑.
오늘 서른이 된, 낯선 아들은 사랑하고, 일곱 살 아들은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게 떠났던가.
“네.”
아버지, 주인호는 첫사랑이 죽자 저도 아내과 아들을 두고 죽어버렸다. 남편이 사라지자마자 엄마는 제 사랑을 찾아 아들을 버리고 떠났다.
사랑? 좋아하네. 그렇게 쉽게 버리고 포기할 거 너희들이나 실컷 해라.
“본부장님. 가실 시간입니다.”
은택은 재킷을 입고 단추를 여몄다.
생일. 일진 한번 죽인다.
“가자.”
성큼 발걸음을 뗐다. 오늘 하루, 재수 없는 일은 그게 끝인 줄 알았다.
***
호텔 로비 앞. 은택은 차에서 내리다 띵 울려오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기분이 저기압이다 보니 술이 기승을 부리나 보다. 방으로 모시겠다는 권 기사를 만류하고 회전문을 밀었다.
조용한 로비에 의외로 규칙적인 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바(Bar)가 있는 45층을 눌렀다. 집처럼 쓰고 있는 방은 44층이나 더 취해 인사불성으로 누워 자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평일의 새벽 1시. 이 시간이면 영업을 끝낼 즈음이었다. 그러나 한주 그룹의 후계자, 주은택이 나타나면 닫았던 문도 열어젖힐 것을 그는 취중에도 잘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바(Bar)의 문 앞에 선 직원은 마감 시간이라며 돌려보낼 생각이었는가 보다. 입을 벙긋 열다가 은택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어준다.
은택은 무심하게 바로 들어섰다. 비릿한 술 냄새와 함께 블루스 가수의 굵고 거친 노랫소리가 은택의 기분처럼 축 처져 들려왔다.
시차를 이기지 못한 외국인들 몇몇이 앉아 있을 뿐 손님은 없었다.
전작을 한 은택의 머리는 흐느적거리는 기타 소리를 따라 너울거리며 같이 흔들렸다.
이미 몸에 밴 듯 은택은 바의 가장 끝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다른 손님들을 등질 수 있고, 바텐더의 시야가 머물면서도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늘 마시던 것 드릴까요?”
은택은 넥타이를 아래로 잡아끌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스트레이트 잔이 호박색 액체를 담고 나왔다. 코스터 위에 잔이 앉기도 전에 은택은 잔을 채어 단번에 마셔버렸다.
당황한 바텐더가 술을 잔에 다시 채워 놓고 조용히 자리를 피해줬다. 그것을 은택은 다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비워냈다.
느글거리는 속에서 헛웃음도 느글거린다.
웃기고들 있다. 곽지온은 자기 맘대로 사랑하다, 자기 맘대로 포기하고 가버렸다.
어머니란 사람은 제 사랑을 위해 아들을 포기하더니 1년에 한 번 은택을 들었다 놨다 한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아들 앞에서 저도 죽어 버리고.
망할 놈의 사랑. 사랑들 하시느라 바빠서 정작 남겨진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 상관도 안 한다.
사랑만큼 이기적인 감정이 또 있을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것은 둘째치고 일단 빠지면 눈이 뒤집혀 죄다 제 관심 밖으로 몰아내 버린다.
그 잘난 저들의 사랑을 빼고 다 포기해 버린다.
뭘 했다고 포기하는가. 은택을 가운데 두고 사랑을 했네, 노력했네, 떠들어 대지만 정작 은택은 그들이 뭘 했는지 모른다.
빌어먹을 사랑.
은택이 손가락을 들었다. 매니저가 후다닥 달려와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콱! 죽어버리겠어!”
불쑥 끼어드는 여자의 목소리에 술을 따르던 바텐더의 손이 잠깐 흔들렸다. 그 바람에 잔 밖으로 술이 넘치고 말았다.
쏟아진 술에 바텐더는 쩔쩔매고 은택은 나쁜 기분이 공연히 더 나빠진다. 소리 나는 쪽으로 인상 쓴 눈을 돌렸다.
오른쪽, 스툴 하나를 건너뛰고 여자가 앉아 있었다. 마감 시간이 지나 손님을 받지는 않았을 텐데. 투숙객인가. 원래 있던 사람이었던가.
“콰악! 죽어 버린다고! 끅.”
거센 딸꾹질에 여자의 고개가 휘영청 은택 쪽으로 향했다. 그 바람에 눈이 마주쳤다.
꽃 피는 5월이었다. 여기저기 예쁜 색들이 난무하는 계절에 스물이나 간신히 넘었을 법한 여자는 옷도 검고, 머리도 검고, 구두도 검었다. 색깔이라곤 취해 상기된 발간 볼과 그보다 더 빨간 입술밖에 없었다.
“근데, 힝~, 어떻게 죽을까….”
마주친 눈을 그대로 두고 질문인지 독백인지 모를 소릴 지껄인다. 저승사자 같다.
당신이 죽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죽여 데려가려는 것 같은데. 맹랑한 생각에 은택이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훌륭한 외모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덕에 여인들의 접근은 은택에게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전자에 대한 반항으로 은택은 그들을 늘 멀리했었다.
“더 드릴까요?”
어느새 다가온 바텐더가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이 무너졌거든요. 히잇! 와르르르르르. 핏. 휴…”
술을 기다리는 사이 여자가 반쯤 뜬 눈으로 은택을 보고 말했다.
“그래서 콰아아악! 죽어 버릴 거예요.”
죽을 사람은 혼자 가서 네 말대로 콰아아악 죽어 버리더라. 너처럼 첨 보는 사람 붙들고 광고하고 죽지 않는단 말이다.
은택은 술이 들어찬 잔을 붙잡고 다시 입에 털어 넣었다.
너도 티가 난다. 곱게 자란 티. 죽는 게 뭔지도 모르는 어리숙한 티. 그래서 죽을 용기도 없는 게, 큰소리만 빵빵 치는 티. 그럼 누가 와서 우쭈쭈 달래주면 와앙 울어버릴 것 같은 티.
“어떻게 죽는 게 안 아파요?”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짜증이 조금씩 인다.
“글쎄. 안 죽어 봐서.”
젠장. 왜 대답했을까. 저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은택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멀리 마른 수건으로 컵을 닦던 바텐더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가며 은택의 눈치를 보고 섰다. 은택이 고개를 까딱이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자 다시 제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 시간마저 난데없는 불청객 때문에 꼬여버렸지만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대답한 은택의 실수가 먼저였고, 엄밀히 말하면 이 여자는 은택의 고객이었으니까.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입을 꽉 다물고 옆모습만 보여주는 은택에게 여자는 계속 지껄였다.
“당연히 안 죽어 보셨겠죠. 그래도 왜…… 죽을 때 편히 갔네, 어렵게 갔네. 뭐 그런 말들 하잖아요. 끅.”
여자는 꼬인 혓바닥으로 단숨에 말하다 뭐가 걸렸는지 조약돌 같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헛기침을 했다. 휴우, 하고 늘어지게 숨을 정리하고 또 은택을 본다.
“그러니까 분명 편히 가는 그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이죠.”
“왜.”
“…뭐가, 왜요?”
“왜 죽으려는데.”
“에이~. 이 아저씨 머리 나쁘네.”
어쭈. 이젠 손가락으로 은택의 팔을 찌르기까지 한다.
“하늘이 무너졌다니깐요.”
그 손가락을 들어 제 정수리 위에서 빙그르르 돌리더니 툭 하고 제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취중에도 모은 무릎이 가지런하다.
“그리고요오. 솟아날 구멍도 없어요. 띠비럴. 흐잇.”
띠비럴? 욕인가? 했으면 그만이지 왜 손을 제 입에 대고 혼자 민망 떨고 있는지. 그 내숭인지 청승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을 은택의 취한 눈이 까닭 없이 눈여겨본다.
새까만 머리카락 때문인지 얼굴은 밀가루를 바른 것처럼 유난히도 하얬다. 짙은 눈썹은 고집스러워 보이는데 커다란 송아지 같은 눈망울은 착해 보였고, 높게 오른 콧날은 도도해 보였으나 도톰한 입술 때문에 순박해 보였다.
글쎄…. 요즘 ‘예쁘다’의 정의가 TV에 나오는 연예인이나 성형외과 광고에 찍힌 얼굴이라면 이 여자는 예쁘지 않았다.
그러나 극과 극의 대비가 묘하게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멀쩡해.”
“뭐가요?”
“하늘.”
은택이 턱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여자도 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본다. 그리곤 다시 은택을 올려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긴 속눈썹을 서너 번 끔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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