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랑해요

“어우, 여기 분위기 뭐야?”

혜미가 모텔의 전관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건물 입구에 들어설 때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 혜미의 곁을 지나갔다. 남자의 팔에 매달린 여자의 치마는 지나치게 짧았고, 밝은 표정의 남자는 여자와 나이 차가 많아 보였다.

“딱 봐도 불륜이네!”

불쾌한 표정을 짓던 혜미가 몸서리를 한 번 치고서 한영이 있을 방으로 향했다.

“왔어?”

벨 소리에 문을 연 한영이 빙긋 웃으며 혜미를 반겼다.

“외숙모,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왜 이렇게 어두워요?”

혜미의 말에 한영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혜미가 지나온 복도를 힐끗 보니 정말로 조명이 어둡긴 했다. 경우와 함께 지나다닐 때는 느끼지 못했던 점이었다.

“그러게. 주인이 짠돌인가 봐. 어서 들어와. 그거 내 짐이야?”

한영이 혜미의 손에 들린 자그마한 종이가방을 받아들었다. 혜미는 한영과 경우가 머물고 있다는 방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욕실이 왜 이렇게 화려해요? 겉모습하고 다르네요?”

낡은 건물이어서 내부도 초라할 줄 알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욕실이 꽤 넓은 데다가 타일의 색이 형형색색이었다. 호실을 꾸밀 때 가장 신경을 쓴 곳이 그곳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만큼.

“뭐야? 침대가 하나예요?”

혜미가 이맛살을 들어 보였다.

“아! 침대에서는 삼촌 혼자 자. 난 바닥에서 자고.”

한영이 혜미가 오해할까 봐 부지런히 설명을 했다. 그러나 혜미의 의심하는 눈은 여전했다.

‘삼촌이 외숙모를 바닥에 재울 인물이 아닌데. 자기가 바닥에서 자면 잤지, 그럴 리가 없지.’

혜미는 그렇다고 설명하는 한영이 당황해서 말실수를 한 거라고 여겼다.

“이래서 엄마가 말을 전하라는 거였구나.”

혜미의 혼잣말이 컸다. 삼촌이 일하는 중이고, 외숙모에게는 낯선 곳이고, 그래서 옷을 가져다줄 사람이 저밖에 없다며 엄마 진경이 보내서 왔다. 물론 엄마가 말하지 않았어도 찾아올 생각이었다. 어쨌든 엄마의 의견을 전할 임무도 가지고 왔다. 한영은 가방을 내려놓은 뒤, 혜미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말을 전해? 무슨 말?”

“우리 집으로 당장 들어오래요.”

“…뭐?”

어느새 혜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떠올랐다.

“나 외숙모한테 수업 받고 있는 중이라는 거 잊은 거 아니죠?”

“…응, 그래. 기억하고 있지. 그런데….”

“나 매번 이 이상한 곳으로 수업 받으러 올 수도 없고, 엄마 말마따나 삼촌이랑 외숙모 둘이서 이 좁은 방에 맨날 같이 있는 것도 걱정 되네요.”

혜미가 엄마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합쳐서 이야기했다. 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명희의 노파심도 합쳐진 것이었다. 진경은 명희에게 어떻게든 경우를 단속하라는 명을 받든 상태였다. 한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납득이 됐다. 그러나 선뜻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처음으로 경우와 단둘이 있게 된 공간이어서 그랬다. 시설이 어떻든, 분위기가 어떻든 그의 자는 모습을 누구의 간섭도 없이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곳이어서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혜미의 엄마인 진경은 부담스러웠다. 첫 만남에서는 아저씨의 조언대로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보임으로써 그녀의 의심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병원비를 내주면서까지 진료를 받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께름칙했다. 그녀의 속내를 알 수 없어서 불편했다.

“병원도 요 옆이고, 경우 씨 일하는 편의점도 이 근처인데….”

“외숙모가 가르치기로 한 나는 여기 없어요.”

혜미의 말에 한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혜미를 가르치는 일이라….

“외숙모 진료받는 동안 삼촌한테 아빠 차를 빌려줄 거래요. 아빠가 요즘 출장이 잦아서 차를 거의 안 쓰거든요.”

혜미는 진경이 알려준 미끼를 한영에게 던졌다. 한영의 표정을 살피면서 혜미는 의아했다.

‘엄마는 어떻게 알았을까? 외숙모가 집에 들어오기를 망설일 거라는 걸.’

그걸 예상하고 진경은 설득할 만한 미끼들을 혜미에게 주입시켜 놓았던 것이다.

“엄마가 그러던데요? 외숙모에게는 저를 가르치면서 받게 될 수입이 절실할 거라고.”

혜미의 말에 한영의 입이 딱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혜미의 말이 맞았다. 언제까지고 매번 돈을 지출하면서 이곳에 머물 수는 없다. 취사를 할 수 없는 곳에 머물면서 언제까지 허술한 밥을 먹을 수도 없다. 게다가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경우에게만 감당하게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러나, 그렇지만….

“경우 씨 오면 그때 이야기해 볼게. 뭐 마실래?”

한영은 잠시 결정을 미뤄두고 물었다. 마음으로는 경우가 ‘no’라고 말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자신에게 밤새 팔 하나를 내어줄 만큼 배려심 깊은 그가 이곳에 더 머물기를 원하는 제 마음을 대변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다.

“마실 거 뭐 있어요?”

혜미의 물음에 한영은 자그마한 미니 냉장고를 열어 보였다. 종류별로 꽤 다양한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그거 하나 먹을 때마다 계산서에 추가되는 거 알아요?”

혜미의 질문에 한영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아. 물론 경우 씨하고 나는 가능한 한 손대지 않는 거지만, 특별히 네가 왔으니까.”

한영의 말에 혜미는 기분 좋게 씩 웃었다. 뭐 상황이야 어떻든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고 대접해주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좋았다.

“음… 그럼 오렌지 주스 먹을래요.”

나이에 어울리는 천진한 목소리로 혜미가 말했다. 한영은 싱긋 웃으며 오렌지 주스 병을 꺼내어 내밀었다.

“혹시 그런 거야? 오렌지 스타 팬이어서 오렌지 관련된 음식 좋아하는 거?”

“어? 어떻게 아셨어요? 역시 예리한데요?”

어느새 혜미는 편안한 마음으로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오렌지가 상큼한 이미지여서 오빠들과 진짜 잘 어울리는 이름이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오렌지만 봐도 기분이 좋고, 오렌지 색깔만 봐도 기분이 좋아요. 주스는 오렌지 주스가 제일 좋고, 오죽하면 그렇게 싫어하던 당근도 무지 잘 먹게 됐다니까요!”

혜미의 즐거운 설명에 한영이 웃어 주었다. 이 아이의 ‘오렌지 스타’ 사랑은 진짜구나! 한물간 아이돌을 오랫동안 잊지 않고 애정한다는 것만으로도 감탄할 만했다. 하물며 그들에게 다가가는 길을 자신의 진로로 선택할 정도이니까!

생각보다 혜미와 함께 있는 시간이 한영에게 도움이 됐다. 윤과 함께 노래하고 있을 경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혜미 덕에 그 괴로운 상상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옷을 가져다준 것도 고마운데 혜미는 자신의 학교생활이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한영의 지루한 시간, 어쩌면 괴로웠을 시간을 즐겁게 채워주고 있었다.

“백혜미, 너 와 있었어?”

경우가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한영은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혜미가 있는 동안에는 인내하기로 했다. 혜미는 엄마의 생각을 삼촌에게 전했다. 한영은 긴장된 마음으로 경우를 응시했다.

‘가지 않겠다고 얘기해요. 우리 그냥 여기 있겠다고 말해줘요.’

“당연히 Yes지! 잘 됐다! 그렇잖아도 너무 험한 곳인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경우는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한영을 보면서 그렇지 않냐는 마음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한영은 차오르는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그가 원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것. 마음의 정도가 같지 않다는 것. 그것이 이렇게 마음 아픈 일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장담했었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마음만큼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니, 그 사실이 자신을 아프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어. 그의 마음 얻는 일, 실패할 수도 있고.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어?”-

아저씨의 염려가 담긴 말이 이제야 선명하게 와닿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내가 하는 선택이니까.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니까.”-

어쩜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걸까? 누구의 마음 온전히 사로잡아 본 적 없는 풋내기이면서 무엇이 그리도 설레고 자신이 있었던 걸까?

“지금 바로 갈까?”

한영의 마음을 모르는 경우는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혜미도 그러자는 표정으로 응대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한영은 말이 없었다. 경우와 혜미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한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가면 안 될까요?”

경우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혜미도 마찬가지였다.

“경우 씨하고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 그래요.”

한영이 가라앉는 마음을 애써 끌어당기며 말했다. 경우의 눈동자가 바빴다. 한영의 시무룩함이 어디에 근원한 것인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혹시… 가고 싶지 않은 거야?”

경우가 물었다. 한영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네, 가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여기에서 당신과 둘만 있고 싶어요. 어느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이곳에서!’

외치고 싶은 말을 한영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의아하게 보고 있는 혜미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아, 아니요. 가는 게 맞죠. 여러모로. 그런데 마음의 준비는 좀 필요할 것 같아요. 저 며칠 새 벌써 잠자리가 세 번째 바뀌는 거잖아요. 게다가 혜미 아버님도 계시는 낯선 곳에… 오늘만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어요.”

한영의 더듬거리는 설명에 경우가 살며시 웃어 주었다. 그러나 경우의 가슴 한구석은 또다시 아파오고 있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낯섦을 감당해야 하는 그녀의 어려움이 충분히 이해되고 있었다. 혜미만 없었다면 안쓰러운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혜미야, 가자.”

“엥?”

“데려다줄게.”

“진짜 같이 안 가?”

혜미가 단번에 생각이 바뀐 삼촌 때문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 말 한마디에 바로 생각을 바꾸다니! 줏대 없어 보였다.

“들었잖아. 오늘만 여기 있고 싶다잖아. 누나한테도 그렇게 전해 줘. 내일 들어간다고.”

경우의 말에 혜미가 한영의 표정을 살폈다. 감격을 눈에 그렁그렁 달고 있는 얼굴을 보자니, 피식하는 웃음이 났다.

“알았어. 나 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줘.”

혜미가 말했다. 한영이 혜미에게 고마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저녁은 약속대로 자장면을 먹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입가에 춘장이 묻어 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영이 앉은 자리에는 닦은 티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냥 다 먹고 나중에 닦으면 안 되나?”

열심히 씹으면서 경우가 말했다.

“네, 그럴게요.”

한영이 얼른 대답했다. 온종일 일을 해서 그런지 배가 무지 고팠던 경우는 정말로 열심히 먹었다. 한영의 면이 거의 그대로인데 비해 그의 그릇은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버스킹 연습은 잘했어요?”

한영은 그의 식사가 얼추 끝난 것 같아서 참았던 물음을 던졌다.

“아니.”

그렇게 말해놓고서 경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냉수를 마셔서 입 안을 헹구고 티슈로 입가를 정리했다. 한영의 궁금해하는 마음을 모르는 거 아니었지만 선뜻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냥… 나하고는 안 맞는 것 같아.”

한영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럼, 이젠 안 가도 되는 거예요?”

환한 그 얼굴이 경우는 이해되지 않았다. 싫었던 걸까? 자신이 노래하기를 기다리는 것 아니었나?

“그래. 안 가도 돼. 근데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경우가 솔직히 물었다. 한영의 얼굴이 당황하여 움찔거렸다.

“내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싶은 거 아니었어?”

“아, 물론, 그렇죠. 그런데… 그 여자하고는 아니었어요. 그 윤이라는 여자. 전 좀 별로거든요.”

경우의 얼굴에 의문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여자가 별로였다고?

“사심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이지 않았어요? 일부러 경우 씨 꼬여 내려고 안달하는 사람처럼. 전 그런 사리사욕이 가득한 사람은 별로거든요. 경우 씨가 잘 생기고 천재여서 끌리는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막 노래하자 그러고, 연락처 달라 그러고. 그러는 거 너무 오버 아니에요?”

한영이 저도 모르게 속내를 마구 드러내며 말했다. 경우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영의 두 눈이 커졌다.

‘뭐야? 나 왜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 이지은!’

경우는 한영의 당황한 얼굴을 보면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던 사람,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나서는 옆에 있게 해 달라고 애걸복걸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그런 질문이 마음에서 마구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제 모습은 생각하지 못하고 남 비난하기에 바쁜 그녀가 불합리해 보이면서도 어째서 자꾸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그 여자 만날 일은 없을 거야.”

한영의 말라버린 면을 짜장 소스에 버무려 주며 경우가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래.”

한영이 빙그레 웃었다. 혜미네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가슴을 짓누르는 와중에 그나마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말이었다.

“저 노력할 거예요.”

경우가 비벼준 면을 야무지게 씹으면서 한영이 말했다.

“경우 씨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아요. 혜미 부모님께도 인정받도록 노력할게요. 걱정 말아요. 혜미도 구워삶은 저인걸요! 분명 저를 예뻐하실 거예요, 두 분.”

뜬금없는 선포에 경우는 정신이 없었다. 마치 결혼 허락이라도 받아내려는 사람처럼 굳은 의지가 엿보이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언급할 시점일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경우는 웬일인지 그걸 따져 묻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여자가 새롭게 용기를 얻는 모양에 동조를 해 주고 싶었다.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