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깊은 밤. 침을 뺀 어의가 돌아앉았다. 유신이 옷을 갈무리했다.

“이제 다 끝난 겁니까?”

어의가 돌아앉아 유신과 마주 보았다.

“내일 아침에 한 번 더 먹자. 그것이 마지막이다.”

어의는 말하지 못했지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천년 된 산삼은 산신이 내린 것이라 했던가. 그 말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놀라운 속도로 유신의 병세가 나아지고 있었다. 천년 된 산삼을 드셨던 선황도 이렇게 빠르게 약효가 나오지 않았었다.

“이제 돌아다녀도 됩니까?

“안 된다. 신아, 내 말하지 않았느냐.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 몸을 보하고 치료하여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예. 감사합니다, 아재. 그만 가서 쉬십시오. 저 때문에 많이 힘드시잖아요.”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그대로 유신의 얼굴에 드러났다. 어릴 적 그 얼굴이 남아 있었다. 어의가 유신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신아, 잊지 마라. 네가 살아난 것은 기적이다.”

유신이 해맑게 웃었다.

“제 기적은 아재가 만들었죠. 역시 아재가 최고입니다!”

유신이 어릴 적처럼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어의가 웃으며 주변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내일 아침부터는 밥을 먹자. 자거라.”

“예, 안녕히 주무십시오.”

어의가 불을 끄고 방을 나섰다. 청하원을 벗어나는 어의의 발소리가 가벼웠다.

이제 청하원에는 유신과 율만 남았다. 송시후와 동하는 늦은 밤에 돌아갔다. 매일 율의 호위를 하던 최찬혁도 노을이 질 때 청하원을 나갔다. 동하와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내일 아침 일찍 들어온다고 했다. 이제 율만 잠들면 된다. 유신은 기쁜 마음으로 건넛방에 불이 꺼지길 기다렸다.

*

박 장군은 분이 풀리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던 박 장군이 앉았다. 서 있으니 낮은 천장에 자꾸 머리가 부딪쳤다. 그의 시야에 방구석에 뭉쳐 있는 초상화가 보였다.

“가져와.”

두들겨 맞아 일어서지도 못하고 쓰러져 있던 무이가 벌떡 일어나 초상화를 가져와 박 장군 앞에 놓았다. 그리고 도망갈 수 있게 문 앞에 섰다. 박 장군이 초상화를 폈다. 또 뱃속 깊은 곳부터 울화가 치밀었다.

“그리려면 잘 그리던가. 내 새끼를 이리 못나게 그려 놔!”

“형님도 비슷하니까 찾아왔잖아요. 그럼 됐지. 내가요. 작정하고 그렸으면 똑같았어요! 그럼 어찌 됐겠습니까? 형수님 아시는 분이 찾아왔을 거 아니에요!”

박 장군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이 새끼가 아직 덜 맞았지! 그걸 아는 녀석이 이런 걸 그려서 도성에 뿌려!”

무이가 박 장군 앞에 털썩 앉아 투덜거렸다.

“그럼 어쩝니까. 분명 남문으로 들어왔는데 도성에서 나간 흔적이 없습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찾을 수가 없어요! 그 녀석 미모가 출중하니 변태 새끼한테 잡혔나 싶어 초상화를 뿌린 겁니다! 누군가 한 명은 봤을 거 아닙니까.”

덜컥. 또다시 공포가 온몸을 후려쳤다. 박 장군은 내내 불안했었다. 이리 오래 연락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가 가르쳤고 무이가 가르쳤다. 누구에게 잡혔다 한들 못 나올 녀석이 아니었다. 죽지 않고서야 연락했을 것이다. 그래서 추적에 능한 무이를 보냈는데 아직도 찾지 못했다.

박 장군이 눈을 감았다. 역모를 앞두고 있었다.

“형님, 그런데 진짜 여기 계시면 어쩝니까. 집은요?”

박 장군이 눈을 떴다. 장군의 눈빛이었다. 무이가 각을 잡고 바르게 앉았다. 박 장군이 손짓했다. 손가락으로 무이를 가리켰다가 바깥을 가리켰고 하늘을 찔렀다. 무이가 병사들을 데리고 황궁으로 들어가란 말이었다. 무이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네!”

무이는 박 장군에게 무엇을 할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반란군들을 다 잡아 죽일 것이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무이는 몸조심하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박 장군에게 한나라는 목숨 바쳐 지켜야 할 존재였다.

박 장군이 일어섰다.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은 박 장군이 침음을 흘렸다. 다시 돌아와 앉은 박 장군이 무이에게 명령했다.

“나한테 맞는 삿갓 구해 와.”

“에?”

박 장군의 시선이 방바닥을 훑었다. 이곳저곳에 부서진 삿갓의 파편이 뭉쳐 있었다. 체격이 큰 그에게 맞는 삿갓이 없어서 맞춘 것이다. 그런데 화가 나서 삿갓을 던졌다.

“후우. 당장 가서 삿갓 구해 오라고. 나가 봐야 하니까.”

“아아. 거참. 그놈의 성질 좀 죽이라고 형수님이 누누이 말씀하시잖아요! 저렇게 큰 삿갓을 당장 어디서 구합니까!”

살그머니 방문이 열렸다. 사호의 머리가 쑥 나왔다. 그리고 박 장군이 쓰고 온 것과 똑같은 삿갓을 방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장군님, 중이 대장이 움직이셔야 한답니다.”

사호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박 장군이 일어났다. 역시 중이였다.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다. 그가 삿갓을 잡으려는데 무이가 투덜거렸다.

“와, 씨발. 그 재수 없는 새끼도 데려온 겁니까. 애들 굴리게 두고 왔어야죠!”

박 장군이 삿갓을 머리에 쓰면서 무심하게 말했다.

“네가 없었잖아, 인마. 내가 없으면 중이가 애들 데리고 집에 가야지.”

박 장군이 방을 나섰다. 방에 남은 무이의 눈빛이 형형했다. 박 장군이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절대 다치게 두지 않는다. 무이는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튀어 나갔다. 덕팔과 사호에게 모든 상황을 들어야 했다.

“와, 이 새끼들 보게. 벌써 다 튀었어?”

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

깊은 밤. 도성의 구석진 곳. 작은 산 아래 있는 방 두 칸짜리 작은 초가는 세월을 그대로 입은 듯 힘겨워 보였다. 원래 주막이었으나 자식이 없는 할멈이 죽고 폐가가 되어 있었다.

오랜 친우들의 비밀 장소에 도착한 박 장군이 담장도 없는 곳을 들어섰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자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여어, 살아 있었구만.”

어릴 적부터 친우이자 전쟁터를 같이 누빈 동료였던 북한성의 성주, 최진표였다. 그가 박 장군을 격하게 끌어안았다. 매일 보던 사이였으나 박 장군이 남한성에 간 후에 서신만 오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힘듦을 알기에 서로의 등을 두드렸다.

술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박 장군이 피식 웃었다. 전쟁터에 가기 전에 방문을 가려놓았던 두툼한 이불이 그대로 있었다. 낡았으나 불빛과 바람을 막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박 장군이 시선을 내렸다. 술상이었다.

“술이냐?”

“미쳤냐?”

“또냐?”

“당연하지.”

그들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최진표가 꿀차가 담긴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을 채웠다. 박 장군이 술병을 받아 자신의 잔을 채웠다.

“네 꼴을 보아하니 제례식은 안 가겠다?”

박 장군이 시선을 내려 옷차림을 훑었다. 그저 상단의 상주가 입을 법한 평복이었다.

“셋째 보냈지.”

“히야. 그 제어도 안 되는 꼴통을? 너 아주 작정했구나?”

“끝을 봐야지.”

“적당히 해라.”

“적당히는 무슨. 남 말하냐? 너는 애들 200명이나 더 데리고 왔다며.”

최진표가 치를 떨며 말했다.

“말도 마라. 이번 겨울에 눈이 지랄 맞게 많이 왔어. 그 돌산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그게 다 얼어서 아직도 녹을 생각조차 안 해. 그래서 그런가. 돌산을 넘어오는 벌레가 없네. 그래서 병력 대부분을 성안 경비로 돌렸지. 그랬더니 성안에도 말썽 피우는 벌레가 없어. 결국에는 혈기왕성한 애들이 매일 눈 속에서 훈련만 했지. 나중에는 별 미친 짓을 다하더라고. 그냥 두면 서로 대가리 다 깨놓고 지랄하겠더라고. 바람 좀 쐴 겸 데려왔어.”

박 장군이 숨죽여 웃었다. 추위를 싫어하는 최진표가 어떤 얼굴로 매일 얼음산을 봤을지 훤했다.

“좋단다. 지랄.”

최진표가 꿀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대가리가 누구냐?”

역모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다.

“내가 어찌 아냐. 그저 애들 보내 달라고 하니까 데리고 왔지.”

“폐하는 뵈었냐?”

“내일 뵈어야지. 도착은 어젯밤에 했는데 우리 애들 잘 곳이 없어져서 급하게 애들 먹이고 재우느라 정신없었다.”

“어디에 재워?”

“네 애들은?”

“도성 안에 풀었지.”

“우리 애들은 대부분 도성 밖에. 안에는 300명만. 안에서 다 재우기에는 너무 많잖냐. 눈에 띄지.”

“제례식장 지키게 하지. 거기 숨기 좋잖아.”

“원래 내 계획이 거기 뒷산에 애들 푸는 거였어. 눈 속에서 살던 애들이라 이런 날씨는 노숙해도 되거든. 숙식 해결하기도 편하고 훈련도 시킬 수 있고. 근데,”

시선이 날카롭게 변한 최진표가 말을 이었다.

“그 주변은 물론이고 뒷산까지 반란군들로 가득 찼다. 정찰병 말에 의하면 용병까지 있단다.”

“미쳤군.”

“미쳤지. 사병도 모자라 용병까지. 역모가 실패해도 성공해도 그 용병들이 큰 문제가 될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말이지.”

화가 난 박 장군이 잔에 가득 찬 꿀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가 싫어하는 달콤한 맛과 향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기다렸던 얼굴을 본 최진표가 웃었다.

“어째 점점 더 달아져!”

“영광으로 알아. 내가 이거 꽝꽝 언 땅속에서 파내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최진표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 남한성 내려갔을 때 내가 직접 담아서 땅에 묻었다. 만나면 마시려고. 갑자기 북한성 갈 때도 제일 먼저 이거부터 파서 챙겼다.”

술병을 든 박 장군이 빈 잔을 가득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이번에도 얼굴이 찌그러지는 것은 막지 못했다.

“오래 묵혀서 그런가. 향이 좋다.”

최진표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친우는 변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도 항상 제일 앞에서 싸웠었다. 이번 전쟁에서도 그럴 것이다. 부디 무사히 살아서 꿀차를 같이 마실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최진표가 일부러 화제를 바꿨다.

“나 내일 우리 둘째 만나면 혼인 날짜 잡을 거다. 그러니까 그만 끼고 있고 막내 보내라.”

“내일 만나다니? 북한성에 같이 있는 거 아니었나?”

최진표가 한숨을 푹 쉬었다. 둘째만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황궁에 들어가서 산 지 꽤 됐어.”

“뭐? 왜?”

“왜겠냐? 뺏긴 거지. 폐하 눈에 안 들게 하려고 주야장천 장남만 데리고 다녔어. 근데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그 녀석이 태자 전하랑 눈이 맞았더라고.”

“제수씨가 힘들었겠군. 특히 둘째를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녀석이 다른 애들과 달리 제 어미를 끔찍이 챙겼지. 말이 없어서 무뚝뚝하게 보이지만 배려심이 많아서 제 어미가 매일매일 그 녀석 덕분에 행복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었지.”

“기억나는군. 제수씨가 끼고 살겠다고 그 둘째한테 나랏일 시키면 죽이겠다고 협박받았다면서 네가 술 퍼마시고 개새끼가 됐던 날이.”

“말도 마라. 우리 마누라가 황후 폐하께 쳐들어가서 항의하고 난리였었다. 먼 길 떠나는데 자식 놓고 못 간다고. 울고불고. 내가 연락받고 가보니까 폐하랑 황후께서 달래고 있더라. 그때만 생각하면 아주 죽고 싶다. 하아.”

하하하. 박 장군이 웃었다. 한 성격 하는 제수씨 때문에 폐하와 황후께서 진땀을 흘렸을 것이다.

“우리 마누라가 벌써 그 녀석 집도 싹 다 고쳤다. 혼례는 북한성에서 하고 사는 건 도성에서 살게 될 거야. 도성에 우리 살던 집 그 녀석 줬거든. 그러니까 이제 그만 막내 보내라. 사돈 하자고 네가 먼저 말해 놓고 왜 안 보내?”

“하아.”

길게 내쉬는 박 장군의 한숨을 최진표는 오해했다.

“왜, 막내가 혼인하고 싶은 사내가 있대?”

“차라리 그랬으면 좋으련만.”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최진표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설마 어릴 적처럼 아프냐?”

“아프기는. 그날 이후로 고뿔도 걸린 적 없다. 지금 생사를 모른다.”

“뭐? 생사를 모르다니 무슨 말이야? 설마 납치야? 주나라냐?”

“차라리 그랬으면 쳐들어가서 데려왔지. 가출했는데 몇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다.”

“가출? 설마 또 사고 쳤냐?”

박 장군이 꿀차를 또 따라 마셨다. 가출한 이유가 주나라 왕의 머리를 잘라서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그런데 최진표는 걱정이 커져서 눈치채지 못했다. 박 장군이 매번 한 모금만 마시던 차를 연속해서 들이켜자 자학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