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설렘

“넌 알고 있었어? 도민수의 원래 매니저가 최지헌이었다는 거 말이야.”

연희는 외투를 소파 위에 내려놓으며 연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피곤함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라 엔터를 대표해서 날카로운 발언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초지일관 침묵했다. 최만식 대표와 라 엔터 나머지 식구들의 진로에 관한 이야기를 주도해 간 건 다름 아닌 그였다. 의아하게 침묵하는 그를 보다 못해 연희가 평소와 달리 앞장서서 발언을 했다. 뒤늦게라도 그에 관한 입장을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연우는 뜬금없는 지점에서 의문을 갖고 있었다.

“6년 전, 말도 안 되는 기사가 실리던 날, 넌 다 알고서 그 식사자리에 갔던 거야?”

“다 지난 일이야. 오빠답지 않게 왜 걸고넘어져?”

연우는 저도 모르게 뒷덜미에 식은땀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도민수와의 스캔들을 유도한 식사 자리에 하마터면 최지헌이 마주할 뻔했다. 그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어도, 큰 위기가 닥쳤지만, 그가 나타났더라면 또 얼마나 당혹스러웠을 지가 가늠이 되어 연우는 연희를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연희 너… 괜찮아?”

“뭐가?”

“도자기를 만질 때보다 더 떨리는 너의 손을 봤어.”

연희가 마른 침을 꼴깍하고 삼켰다. 언제나 저보다도 제 마음을 더 먼저 알아채는 오빠. 연희는 그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던 생각을 얼른 치워버렸다. 그는 변함없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오빠 이연우였다.

“언젠가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걸 각오하고 왔잖아.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라서 좀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절망적이지는 않은 것 같아. 괜찮아. 너무 그렇게 긴장하며 걱정하지 마.”

연희는 부러 환하게 웃으며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침묵이 이해가 됐다. 예상보다 빠르게 최지헌 그를 맞닥뜨려서 일 것이다. 도자기를 만져야 할 때보다 더 긴장하는 여동생의 옆에서 그는 온 신경을 한곳에 쏟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빠… 나 정말로 민수랑 잘해 볼까?”

연우의 이맛살이 들렸다. 그러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웃기만 할 뿐 아무 의견도 내지 않았던 연희였다. 그럴 의지가 전혀 없던 그녀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그냥, 민수랑 잘 돼서 결혼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면… 오빠의 어깨를 경직시키는 그런 일 따위 더 이상은 없겠지?”

아… 그런 마음인 건가? 자신의 마음과 상관없이 단지 발을 동동 구르는 오빠 때문에?

“민수 정도면 훌륭하지 않아? 그만하면 성품도 괜찮고, 능력 있는 데다 생활력도 강해 보이잖아. 무엇보다도 너의 활동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서포트 해 줄 사람이 될 것 같은데.”

연우의 설명에 연희가 피식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거뿐이겠어? 잘생겼지, 매력적이지, 섹시하지, 착하지, 돈 많지, 나이도 어리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그 아이가 무슨 문제겠어? 문제는 나에게 잔뜩이지.”

연우의 미간이 파르르 떨렸다. 연희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그런 나여서… 그 아이한테 감히 그런 마음먹질 못했는데… 오빠가 편할 수 있다면 노력이라도 해 볼까?”

연우는 또 고민했다. 나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 달라고 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님, 마음에도 없는 일을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게 옳은 걸까? 어느 쪽이 너를 행복의 길로 이끌 수 있을까? 고민하며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 연우를 바라보며 연희는 언제나처럼 연연하지 않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무엇이 어떻게 되든 별 상관없다는 듯한 저 얼굴.

“뭐 먹을래? 벌써 저녁때야.”

연우는 열정 없는 주제를 치워버렸다.

**

송두는 몸을 뒤척였다. 이놈의 잠은 오지 말라고 할 때는 그렇게도 쫓아다니며 괴롭히더니, 이제 제발 와 달라고 하는데도 도무지 올 생각을 않는다.

‘에이! 이놈의 잠! 청개구리 같은 놈!’

오지 않는 잠을 원망하던 송두는 급기야 누운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오지도 않을 놈을 기다리느니, 더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곤히 잠든 연두의 배 위로 이불을 덮어 주고 일어난 송두는 거실에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어슴푸레하게 달빛이 새어 들어온 책상 위에 낡은 노트북이 보였다. 송두는 불을 켜는 대신 노트북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엄마의 유품. 요즘 들어 화면이 깜빡이는 현상이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송두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곤 한다. 1년에 서너 차례씩 수리를 받아야 할 만큼 노트북은 낡아 있었다. 그냥 새로 하나 장만하는 게 어떻겠냐는 수리공의 이야기를 매번 들으면서도 송두는 그러질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송두는 극도로 피곤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이 고통을 글을 쓰며 견디기로 했다. 어떠한 스토리를 써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아무렇게나 막 써 나가는 것. 일기 같기도 하고, 수필 같기도 한 이런 식의 글은 언제나처럼 저장되지 않은 채 삭제될 것이다. 그러나 송두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잠이 오질 않는다. 무지 피곤해 죽겠구만. 오지 않는 잠이 원망스럽지만, 원망한들 잠이 알아듣기나 할까 보냐? 그래도 연두가 잘 자서 다행이다. 다친 내 다리를 보며 눈물을 글썽일 때는 무지 마음이 아팠었다. 쪼그만 녀석이 왜 그렇게 속이 깊은 건지… 근데, 이젠 그런 연두의 모습이 단순히 감동적이지 않다. 일곱 살 같지가 않다. 왜 그런지 몰라도 우리 연두는… 너무 어른스럽다. 도대체 그 마음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다. 에휴… 그냥, 세상 모든 일곱 살들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 별 생각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맑기만 하면… 아기를 선택한 나의 판단을 후회하지 않을 텐데… 경서의 말대로 지나치게 철이 든 연두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은 무너진다. 공연히 내가 널 선택해서, 너를 아프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괜히 엄마의 자리를 자처해서는, 불행한 딸로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송두는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그러다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 때문에 송두는 온 가슴이 뜨끔했다.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난… 정말로 나쁜 사람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건지! 그 아이가 아니라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거라고, 선미와 준호 아저씨에게 큰소리쳐 놓고서는… 연두가 없었더라면… 이라는 가정을 생각하다니! 에잇! 나쁜 년!]

타타타타… 조용한 거실에 촘촘히 울리던 키보드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송두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던 민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헌은 말했었다. 그가 널 알아본 것 같다고… 다시금 타타타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로… 나를 알아본 걸까? 어째서? 너무도 달라진 이 모습을 보고서 어떻게? 변함없어 보이는 그 눈… 진짜일까? 혹 그가 나처럼 아직도 여전한 마음인 건 아닐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그저 착한 심성인 그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준 것뿐이잖은가? 나는 무엇을 기대하는 건가? 그가 초라한 나를 보고도 떡하니 알아봐주고, 예전처럼 사랑의 눈빛을 날려주길 기대하는가? 에이! 말도 안 되는 일! 그렇다고 나의 이 상황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연두는 내가 선택한 거다. 떳떳하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결정이다. 엄마를 잃은 그 아이와 나는 같은 신세였다. 좀 더 세상을 살아갈 힘이 있는 내가 그 아이를 거둔 것이 뭐가 부끄러워? 흔들리지 말자, 김송두! 흔들린대도 변할 건 없다는 걸 잊지 말자! 내가 누구인지 더욱 기억하자! 난… 김연두의 엄마다!]

키보드로 내리찧는 글은 그러했다. 그러나 그런 글을 써 나가는 순간에도 송두의 머릿속에서는 민수의 얼굴이 떠나질 않았다. 6년간 써낸 이야기의 남주인공은 모두 도민수 그였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와 다른 캐릭터를 구상해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어느새 캐릭터는 그를 닮아 있었다. 어째서 남주의 키가 모두 180 언저리인지, 어째서 몸무게는 70 쯤이며 눈썹은 언제나 짙고, 눈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 크기인지… 변함없는 캐릭터 묘사에 선미가 의아함을 드러낼 정도였다. 송두는 온 머리카락을 세차게 흔들어댔다. 도무지 찾아오지 않는 잠만큼, 끈질기게 털어지지 않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