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청명하게 맑은 하늘에서 눈이 나린다.
귀한 손이 오시려는지 날이 밝기도 전부터 까치가 솟을대문 위에서 요란스럽게 울어 댔다. 금족령이 내린 지 닷새. 비랑은 밤새 뒤척이던 몸을 일으켜 창을 열었다. 푸른 하늘을 닮은 시린 바람이 창으로 들이쳤다. 동장군의 심술이 가장 극에 달하는 날이었다. 그에 맞게 바람은 살을 에는 추위를 몰고 다녔다.
청지기의 빗질 소리가 고요한 집 안의 정적을 깨트리며 들려왔다. 무엇을 몰아내려 그리도 열심히 빗질을 해 대는지. 집안의 우환이 물러가기를 비는 마음인가 하여, 요란스레 부지런을 떨어 대는 빗질이 비랑의 마음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공기가 찹니다.”
창 바깥쪽에서 들린 걱정 어린 말에 비랑이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는 무사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북성의 겨울을 함께 나고도 그런 말을 해. 이 정도로 상할 몸은 아니야.”
“하나…….”
뭐라 더 말을 하려다 진운이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의 호위무사 시절부터 함께해 온 진운이었다.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고 비랑이 황제의 개인 호위 척사의 수장이 되었을 때, 그는 기꺼이 비랑의 부하가 되어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지금, 황명으로 집 안에 유폐된 비랑의 곁을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권력과 지위를 버리고서 말이다. 비랑은 그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해서, 여러 차례 만류하며 돌려보내려 하였으나 진운은 고집스럽게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이… 쌓이려는가 보다.”
굵어지는 눈발을 보며 비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비랑의 목소리를 들으며 진운이 하늘을 우러렀다. 비랑이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눈이 그녀의 손바닥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비처럼, 눈처럼 그리 살다 가면 좋겠다 생각한 적이 있었지. 흔적도 없이 그리 사라지면 참 좋겠다고. 한데 이제는 그 생각이 바뀌었다. 낙인으로 남아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 낙인을 네게 새겨 넣고 싶구나, 비랑.’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고 수많은 전장을 서로에게 의지해 누볐던 주군이 그의 충신 비랑에게 한 말이었다. 그 누구보다 가장 믿고 의지했으며 마음속 아픔까지 함께 나누었던 존재. 그 믿음이 배신을 당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배신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그것은 비랑과 그 집안에게 해당되는 일. 비랑의 주군인 황제에게는 참을 수 없는 능욕이었고 배신이었다. 무너진 마음을 어찌 다시 세울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바라서는 아니 되는 일이었다.
황제의 처분을 기다리는 시간이 비랑에게는 지독하게 고통스러웠다.
지축이 울렸다.
까마귀 떼가 솟을대문을 떠올라 소름 돋는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기다리던 소식이 오려나 보다.”
말발굽 소리가 대문 앞에서 멈추고 이어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황제 폐하 납시오!”
허공에 떠올랐던 비랑의 손이 움찔 떨렸다. 바닥에 길게 드리웠던 진운의 그림자가 흔들린다. 비랑이 몸을 돌려 방문을 급히 열고 나섰다. 마루 끝에 선 비랑의 앞을 진운이 막고 섰다.
“진운.”
“가시면 안 됩니다.”
장승처럼 버티고 선 진운의 결연한 얼굴을 비랑이 슬피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이 굳건하던 사내의 눈이 불안을 담아냈다. 그를 바라보는 비랑의 입가에 처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비랑의 손이 허공을 떠올라 진운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흠칫 몸을 떤 진운이 비랑의 눈을 마주 보았다. 비랑이 말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의 주군이 기다리신다, 진운.”
“허나.”
“주군이 부르시면 언제든 어느 곳이든 신하는 마땅히 가야 한다. 그 길이 혹여 지옥 불 속이라 하여도. 그것이 신하 된 자의 도리다.”
그를 진운이 모를 리 없었다. 알지만 차마 보낼 수가 없음이다. 이리 가면 다시는 살아 있는 비랑의 모습을 볼 수 없을지 모르기에.
비랑이 가벼이 진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곁을 스쳐 바닥으로 내려섰다. 자박자박 눈이 쌓이기 시작한 시린 바닥을 밟아 나아가는 비랑의 발소리에 진운의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샛문 앞에 멈춘 비랑이 문을 열기 전 고개를 돌려 진운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믿음직한 부하이며 오랜 벗이었던 진운의 너른 등이 오늘따라 유독 쓸쓸해 보였다. 비랑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머물렀다.
오늘 이후, 그대의 삶이 평온하기를. 불충한 죄인의 곁을 지켜 주어 고마웠다고, 생사고락을 함께하자 맹세했던 전우에게 비랑은 마음속으로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끼이익. 비랑이 묵직한 걸쇠를 걷어 내고 문을 밀었다. 열리기 시작한 문틈으로 관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운정은 나와 왕명을 받들라!”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마당을 가득 메운 황군의 모습이 보였다. 그 가운데 눈에 익은 백마가 서 있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비랑의 아비 가운정이 달려 나오는 것도 보였다. 비랑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찌하여…….”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고 턱을 넘는 비랑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죄인은 비랑 자신이었다. 황제가 직접 단죄를 해야 할 이 또한 자신이었다. 한데 방향을 잃은 황제의 칼날이 비랑의 아비를 향해 겨눠지고 있었다.
“아니 됩니다!”
황제를 향한 예를 갖춘 뒤 바닥에 부복하는 아비 앞을 비랑이 막아섰다. 쫓아오며 무릎을 꿇은 터라 옷가지가 흐트러지고 다리에 생채기가 났다. 그에 아랑곳없이 비랑이 흙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신 가비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황명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황제에 대한 불충이었다. 당장에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황군대장이 나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비랑의 앞으로 걸어가며 검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그것을 내리치기 직전 백마가 움직였다.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에 황군대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가 손을 들어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그러자 낮은 신음을 흘리며 황군대장이 검을 거뒀다. 황제의 손짓에 따라 옆으로 물러선 황군대장 앞을 백마가 지나갔다.
비랑은 지척으로 다가와 멈춘 말의 발을 보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이 비랑의 불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을 담아냈다.
“황명이다.”
“제가 받겠습니다.”
비랑의 말에 황제의 입술이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비틀어진 황제의 붉은 입술이 일자로 내려온 것은 한순간이었다. 시리게 차가운 기운을 흘려 내며 황제가 입술을 달싹였다.
“현 황제를 능멸한 죄인을 낳아 기른 것 또한 죄. 선대 황제와의 약조를 어긴 것 또한 대역죄로 다스려야 할 터.”
바닥을 짚고 있던 비랑의 손끝이 떨렸다.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가운정이 바닥을 기어 앞으로 나섰다.
“저의 죄이옵니다. 폐하, 저를 벌하소서.”
“대역죄인의 집안이다. 이 집안의 그 누구도 살아 대문을 넘지 못하게 하라.”
자신의 숙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가운정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관군에 의해 끌려나오는 식솔들의 울부짖음과 비명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아비규환의 참극이 벌어지려 했다. 비랑이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심장이 찢길 듯이 아파 왔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죄 없는 이들까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으아앙!”
얼마 전 태어난 노비의 어린것이 시린 바람과 급작스런 상황에 울음을 터트렸다. 노비가 다급히 아이의 입을 막아 보지만 보챔은 더 심해졌다. 저러다 아이가 잘못되지 않을까. 입을 틀어막은 채 품에 꼭 껴안은 아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앞으로 황군 하나가 다가가는 것을 보며 비랑이 엎드렸던 상체를 세웠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비랑의 곧은 눈을 말 위에 앉은 황제가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비랑이 황제에게 시선을 맞춘 채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용의 문양이 새겨진 길이 두 자 정도의 도였다. 그것은 황제가 비랑에게 직접 하사한 것이었다. 도를 알아본 황제의 눈이 서늘한 냉기를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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