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나라들이 태양을 근본으로 여기는 것과 달리 무빌 제국은 달을 시조로 삼고 있는 나라였다. 때문인지 무빌 제국에는 대대로 달의 능력을 발휘하는 신관들이 있었고 과거 그들의 능력은 낮과 밤의 경계를 지워낼 만큼 대단했다고 전해졌다. 허나 그것도 모두 지난 이야기일 뿐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겨우 달빛을 손으로 불러 모으는 능력 정도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신전이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나라 일에 관여할 만큼의 힘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런 달의 신전에 실로 오랜만에 국왕이 행차했다.'“그렇게나 엉망인가?”'무빌 제국의 새로운 왕 잇수안이 천천히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 동작은 단조로웠지만 눈빛은 무척 날카롭고 매서웠다. 잇수안이 오늘 신전을 찾아온 이유는 하나, 치열한 왕위 계승 싸움 끝에 오른 왕좌를 굳건히 하고 분열된 민심을 통합하기 위해서였다.'“흠, 이상하게 생긴 은신처에 숨어 있거나 사람 외의 것들과 말한다는 게 나쁘다면요. 그래도 꼭 하시겠다면 저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만.”'답하는 대신관의 목소리는 평화로웠다. 이미 권력의 중심에서 한참이나 밀려난 달의 신전이니 금일 국왕의 행차로 입지가 드높여질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는 듯했다.'“새로운 국왕에게 여자를 심어 놓는 것이 신전에도 나쁠 게 없다는 계산인가.”'“역시 직설적이십니다, 후후. 뭐, 일단 달의 세례를 받은 아이이니 신전 사람이기는 하지요. 그래도 처음부터 여기에 온전히 속할 수 없던 아이입니다. 전하 곁에 둔다고 신전과의 연결점이 될 존재도 아니고요. 그저…….”'달의 능력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무빌 제국에서도 오직 신전에 기거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신전 사람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달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을 달의 세례를 받았다고 칭했다. 한참 퇴색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특별하게 생각했고, 그 피는 소수에게만 이어져 오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신전 밖에서 달의 힘을 쓰는 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고귀한 존재로 추앙받는 자신들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과 같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묘하게 뒤틀린 말투임에도 대신관의 표정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역대 대신관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분이 늦은 나이에 본 귀한 딸, 몸이 약해서 신전 밖에서 한참이나 자란 후에야 이곳으로 돌아와 살게 됐다고 전해지는 그 여아가 사실 몹시 껄끄럽기만 한 존재라서 말입니다.”'“무슨 소리지?”'“알려진 바와 같이 분명, 그 아이는 대신관의 핏줄이 맞습니다. 그러나 근본이 조금…….”'근본을 운운하는 순간, 대신관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스쳤다. 잇수안은 마땅찮은 얼굴로 남은 이야기를 기다렸다.'“허면 그에 관해 여태 내게 거짓을 고한 것인가?”'“아니, 아닙니다. 노여워 마십시오. 전하께 거짓을 고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신전의 명예를 위해 조금 포장을 했을 뿐이지요. 국왕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달의 신전은 고결한 피로 이어지고 있지요. 헌데 그 아이의 어미는…… 신전 밖 일반 백성 중의 한 사람, 그것도 시장 한구석에서 빵을 만들어 팔던, 성도 부모도 없는 천한 여자였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지요. 어쨌든 여자가 죽고 나자 그때서야 대신관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됐던 모양입니다. 그가 갓 아홉 살이 된 자신의 딸을 신전으로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 신전 모두가 심각하게 반대를 했지요. 이곳은 신성한 곳, 더럽고 천한 피가 휘젓고 다니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뭐, 그럼에도 결국 대신관의 뜻에 따라 아이가 신전에 오게 되고 말았습니다. 어차피 우리들이 진짜 속사정을 공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교활한 대신관이 수를 쓴 거지요. 저희들은 어쩔 수 없이 이날까지 그 아이의 출생에 대해, 또 대신관의 옳지 못한 행실에 대해 비밀을 굳게 지켜왔습니다. 비밀이 새어 나가 신전을 추잡한 곳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이유로 왕실 쪽에도 대신관의 딸이 본처의 소생도 아니고, 실은 천민의 피가 섞였다는 것을 고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전하께서 그 아이를 찾지 않았다면 평생 묻혔을 비밀일 겁니다. 하지만 신전 사람들과 달리 그 아이는 좀처럼…… 믿을 수가 없어서요. 여기에 동화라고는 되지 못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전하를 만나 섣불리 입이라도 놀렸다가는 저희들이 크게 곤란해질 것이기에 이처럼 제가 먼저 사실을 고하는 것입니다. 신전에서 이런 수치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일이 어려운 것임을 현명하신 전하께서는 능히 헤아려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지요. 이런 사정까지 다 들으시고도 전하께서 결혼을 원하신다면, 신전에서 반대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는 말씀도 드려야겠습니다. 껄끄럽고 수치스러운 존재가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니까요.”'게다가 바나가 잇수안과 혼인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왕실에 속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 혹시라도 천한 태생이 밝혀져도 신전에는 손해가 없게 된다. 대신관은 머릿속을 빠르게 굴리며 얇은 입술에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그런 복잡한 사정을 가진 여자는 필요치 않아. 다른 사람은?”'“후후, 애석하게도 돌아가신 대신관께 다른 여아는 없습니다. 저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왕실에 진짜 연줄을 댈 기회를 가지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그 점이 몹시 안타깝지만 적절한 금전적 보상과 동시에 그 아이가 여기서 영원히 사라져 준다면 그것으로도 썩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전 대신관의 명성이지 않습니까. 숨겨진 이야기는 절대로 신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겁니다. 전하께서는 어디까지나 대신관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되시는 거지요. 역대 백성들에게 가장 사랑 받던 대신관의 딸과 새 국왕의 혼인, 썩 괜찮은 조합이 아닙니까? 아차, 바나, 그게 그 아이의 이름입니다. 어쩌면 전하께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직접 만나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정말 운이 좋았을 때의 이야기지만요.”'빙긋거리는 대신관을 쳐다보는 잇수안의 눈빛에 짜증이 서렸다. 복잡한 여자는 딱 질색이다. 그것이 마음이든 배경이든 간에. '“대신관이 아니었다면, 이죽거리는 자네 팔 하나 정도는 잘라 버렸을 거야.”'“험험. 그럼, 마음을 정하시면 부르십시오.”'잇수안의 매서운 눈빛만큼이나 나지막한 목소리도 위협적이었다. 대신관은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대신관이 물러가자 잇수안은 긴 다리를 뻗어 탁자 위에 올렸다. 정략혼이란 목적이 분명했기에 혼인의 상대는 무척 한정적이었다. 뭔가 복잡해 보이는 이 신전 여자와 혼인하지 않는다면 남은 것은 대공의 딸 정도가 될 것이다. 대공의 딸에게는 현재 공식적인 남편이 없을 뿐, 이미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 만약 그녀와 혼인하게 되면 그날로 왕위 다툼이 다시 일어날 것이 뻔했다. '“저스틴, 자네가 지금 상황을 몹시 즐거워한다고 느껴지는 게 단순한 내 착각은 아니겠지?”'짜증나는 정략혼 따위 집어치워 버릴까. 잇수안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늠름한 자세로 서 있는 저스틴에게 향했다. 저스틴은 평민 출신의 기사였지만 현재 왕실 기사단장의 직책을 맡고 있는 사내였다.'“그럴 리가 있습니까, 흠흠. 아무튼 저기서 이곳저곳을 뒤지고 있는 여자가 바나 아가씨라는 분의 시녀라고 들었습니다. 그분께서는 항상 어딘가에 숨어 계시기 때문에 저렇게 찾으며 돌아다니는 것이 일과라고 하던데요. 저 시녀가 말하길 오늘은 더더욱 찾기가 어려울 거랍니다. 포악하고 심술…… 아!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전해 들은 이야기니 노여워 마십시오. 그런 전하의 방문 소식을 듣자 바람처럼 사라졌답니다. 뭔가 낌새를 알아채고서요. 위험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안 게 아닐까요?”'잇수안의 사나운 눈초리를 피해 저스틴이 창 너머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단번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던 잇수안이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자, 저스틴은 창문 밖과 그를 번갈아 보았다. 이럴 때의 잇수안을 잘못 건드리면 삼 일은 후회하게 될 게 분명함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속에서는 끝없이 그를 놀려 주고픈 충동이 일어났다. 결국 저스틴은 슬그머니 손가락으로 신전의 후원을 빠져나가는 여자를 가리키며 눈치를 살폈다.'“이대로라면 역시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겠군요.”'“누구 마음대로, 가서 그 바나나인가 뭔가에게 포악하고 심술 맞은 왕의 존재를 똑똑히 확인시켜 주도록 하지.”'아니나 다를까. 잇수안의 수려한 눈썹이 크게 휘어지더니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