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정아!”'소란은 어느 순간 번쩍 깨이듯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동안 발랄한 감이 지나치던 소란이 요 근래 부쩍 말도 없이 사색에만 잠겨있어 마음 졸이면서도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던 난정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소란의 고함에 득달같이 방으로 들어섰다.'“예, 애기씨. 어쩐 일이셔요?”'“어머니에게 말씀드려줘. 나, 오라버니한테 갈 거야!”'정말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오셨구나. 난데없는 말에 난정은 얼이 나갈 듯하면서도 일단 소란을 말렸다. 청혼서를 받았다고 해도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기 전인데 처녀가 시댁 될 집에 너무 자주 드나드는 것도 보기 좋지 않았다.'“갑자기 어디를 가신다고 그러셔요? 쇤네가 마님을 모셔올 것이니 앉으세요, 애기씨.”'“아니, 나 드디어 결심했어.”'난정이 여전히 아이처럼 자신을 달래려 들자 소란은 떼를 쓰는 대신 확고하게 선언하며 섬돌에 내려서서 꽃신을 신었다. '“나, 오라버니한테 허혼서를 보낼 거야.”'허혼서를 보낼 것이라면 이따가 주인어른이 오셨을 때 점잖게 말씀드려 명필을 불러다가 좋은 문장과 필체로 작성해서 보내야 할 것이지, 혼인 당사자가 나서서 들고 나는 경우는 없는 법이었다. 누가 들으면 놀랄 소리에 난정이 펄쩍 뛰었다.'“아이고, 아니 될 말씀입니다요. 세상에 신부가 나서서 허혼서를 보내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요?”'“아니야, 그런 건 의미가 없어!”'소란은 그렇게 한 마디 하고는 그대로 어머니가 있는 안채로 내뺐다. 윤 부인 역시 희산이 마지막으로 다녀간 뒤로 부쩍 생각이 늘어난 소란의 모습에 심란해 하다가 느닷없이 달려와 허혼서를 얘기하는 딸에게 대경실색했다. '“무슨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 게냐? 어찌 이리 갑자기 부부인 댁에 허혼서를 보내? 예의가 아니야, 이것아.”'“소녀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어요, 어머니.”'혼인하기를 오매불망 바랐던 것이 누구인데 그걸 궁리해 보지 않았을 것인가. 처음 희산이 마음이 정할 때까지 생각해보라는 말을 했을 때 소란은 그냥 한 이틀 정도 시간을 두었다가 근방에서 최고로 훌륭한 명필을 초빙해서 세상에서 가장 정갈하게 쓴 허혼서를 쓰게 할까 마음을 먹었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는 사이 자신의 그런 생각은 여전히 희산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처사가 아닐까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 보니 시간은 벌써 희산이 다녀간 다음 열흘이나 흘러있었다.''-내가 아는 너는 그만한 판단은 내릴 줄 아는 여인이다.''그렇게 일렀던 희산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계속 메아리쳤다. 그때 희산은 여러 말들을 해줬었다. 단지 입으로 말한 단어들이 아니라 속에 들어있는 의미가 더 여러 가지였던 말들. 그중에서 소란의 마음에 가장 깊게 들어와서 꽂힌 것은 희산의 목소리 말미에 붙어있는 ‘여인’이라는 단어였다.'희산이 자신을 여인이라 불러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열흘이 지나는 동안 소란은 많은 시간을 생각에 잠겨서 보냈다. 아마 여태까지 살면서 한 가지 일을 이렇게 오래 고민한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두근거리면서도 소란은 몇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희산의 말대로 자신은 언제까지나 귀염 받는 어린애일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혼인이라는 것은 자신이 꿈꿨던 것 마냥 언제나 행복하고 좋지만도 않을 거라는 것.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희산과 함께 하고프다는 것이었다.'“명필은 부르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어머니.”'소란은 윤 부인이 놀랄 정도로 확고하고 진지한 태도로 일렀다.''퇴청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희산은 어느 순간 걸음이 느려지더니 천천히 멈춰 섰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제법 든 단풍이 시선을 붙잡은 것이다. 더위가 식나 보다 했더니 어느새 가을이다. 올해도 슬슬 저물어간다는 생각에 문득 감상이 밀려왔다. '“이제 오느냐?”'산책 삼아 걸어서 집에 돌아오자 조 부인이 마당에 널어둔 것들을 거두며 맞이했다. 부부인이 되었지만 습관처럼 굳어진 탓인지, 아직도 조 부인은 나물이며 고추 같은 것들을 널어 말리며 직접 돌보곤 했다.'“예. 올해는 고추가 유난히 붉은 것 같습니다.”'“그러니? 하긴 올해 여름이 유난했어야지.”'마당 거적에 가득 널린 홍고추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조 부인은 이내 희산에게 의미를 담아 일렀다.'“옷 갈아입고 잠시 뒤뜰에 나서보려무나. 단풍이 제법 들었단다.”'선선히 사랑채로 들어선 희산은 간단히 손을 씻고 공복을 벗었다.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잠시 매무새를 고치는데 잠시 전 어머니의 당부가 떠올라 이내 뒤뜰로 나아갔다. '희산은 빨갛게 불타오르고 있는 단풍나무 아래에 단풍보다 더 화사하게 빛나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오라버니.”'소란은 멍하니 서 있는 희산을 가만히 부르며 살며시 웃었다. 그 부름에 희산은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제야 왠지 의미 있게 들렸던 어머니의 당부가 이해가 갔다. 어머니도 참.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셨으면 좀 더 빨리 나와 볼 것을.'“언제부터 거기 있었느냐?”'“한참 되었어요.”'소란은 기다리며 놀리고 있었는지 손에 들고 있는 단풍잎을 빙글빙글 돌렸다. 막 물이 드는 중에서도 제법 붉은 것이 시선을 잡아끌었다.'“저, 이제 결정했어요.”'희산은 담담하게 이르는 소란과 달리 떨리는 심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입매를 가볍게 꼬았다.'“저 사실 시경 공부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그건 시경을 배운다 하면 오라버니가 저를 더 좋아할 것 같아 일부러 그런 거였어요. 수는 재미있어서 열심히 배우긴 하지만 글씨 연습은 꾀를 자주 부려요. 요리도 아직 서툴러요. 지난번에 오라버니에게 드린 과자는 어머니가 도와주신 것이에요.”'소란이 조근조근 이르는 동안 희산의 입매에 떠올랐던 미소는 점점 더 짙어졌다. '“하지만 저 앞으로 진짜 열심히 배울 것이에요. 오라버니랑 대화할 수 있게 책도 많이 읽을 것이고요, 요리도 잘 배우겠어요. 금방 잘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저는 여인이 될 것이어요.”'소란이 손끝으로 돌리고 있는 단풍잎이 그 긴장을 대변하듯 점점 빠르게 팔랑거렸다.'“그래서 오늘은 허혼서를 드리러 온 거예요.”'당차게 일렀으나 소란은 단풍잎 말고는 빈손이었다. 희산은 한 걸음씩 소란에게 다가가며 짐짓 물었다.'“허혼서는 필체 좋은 사람에게 부탁하여 인심 좋은 사람에게 들려 보내는 것인데, 아니 보이는구나.”'소란은 단풍잎을 놓으며 생글 웃었다.'“허혼서는 바로 저예요.”'다음 순간 소란은 희산의 목에 팔을 두르며 와락 안겼다. 희산도 이제는 오라버니가 아니라 정인情人의 품으로 소란을 안았다. 붉은 단풍나무 아래서 그보다 더욱 붉은 두 사람의 입술이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희연의 육인교가 사가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 *''‘대비마마의 하문에, 전하께서 확답을 하지 않으셨답니다.’'중궁의 육인교가 궁을 빠져나가고 며칠 후 깊은 밤, 사랑채에 앉아있는 병판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서안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가늘어졌다가 다시 회복되기를 반복하던 병판의 눈매는 들었던 얘기를 몇 번째 곱씹고 있었다.'‘전하께서 강건하게 반대하시자 대비마마께서, 허면 정빈을 승격시켜 비로 삼으시겠습니까 하문하셨는데, 전하께서 확답을 하지 않으셨답니다. 하여 대비마마께서 그대로 간택령을 진행시키신 것이 옵니다.’'궁 안에는 벽에도 귀가 있다 하였다. 그런 귀들은 입이 되어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대비전에 있는 병판의 귀는 그에게 제법 쓸 만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흠.”'문득 병판의 입술이 미소를 그렸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음이 감도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허탈함을 넘어 어떤 배신감까지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대비 앞에서 검우가 취했다는 행동은 병판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삼 년 전, 딸이 정1품 빈이 되어 궁으로 들어가던 날 병판은 임금이 직접 고른 현판에 새긴 수화당이라는 처소와 중궁전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삼 년이 흐르는 동안 검우가 수화당에 보여준 총애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간택을 반대하는 검우에게 정빈을 승격시켜 비로 삼겠느냐 했다던 대비의 하문과 그 하문에 대한 검우의 반응은 여태까지 유지되어 오던 병판의 믿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더없이 아끼면서, 왜 더 아끼지는 않는가.'찰나 가늘어진 병판의 눈은 이번에는 오래도록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구차한 상상이었지만 검우와 정빈 사이에 아이만 있었더라도 새 중전이 들어오는 일 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아들이 아니었어도 좋았다. 여자아이라도, 작금 왕실의 적통 혈손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간택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의 뜻이 미치지 않은 것인지 정빈은 그동안 한 번도 용종(龍種)을 품은 적이 없었다. 이 순간 그것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안타까웠다.'“설마…….”'가늘어졌던 병판의 눈이 순간 크게 떠졌다. 서안을 톡톡 두드리던 그의 손가락 움직임이 급작스레 멎었다.'“삼 년 동안 시간낭비만 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