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뚫고 나와 하늘로 불쑥 솟은 것인지, 하늘에서 땅으로 뚝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없는 건물들로 가득한 회색 도시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도시는 이곳을 벗어날 엄두 따위는 애초에 가지지도 말라는 듯 높고 낮은 콘크리트 건물 숲 안에 인간들을 가두었고, 미약한 존재인 인간들은 미처 해가 뜨지 않은 시간부터 죽어라 걷고 달리면서 규칙적이고 정확하게만 움직일 것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 군상들 속에 공민재, 그도 함께였다.'민재는 출근을 위해 정확히 7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다른 차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리는 차 안에 앉아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은, 심술 맞은 누군가가 회반죽을 풀어 끼얹은 듯 무겁고 탁했다. 어쩐지 공기까지 무겁고 탁할 것 같아 가슴까지 덩달아 갑갑해졌다.'불쾌한 느낌이 싫어 짐짓 진저리를 치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다 기어이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한여름 내내 푸르렀던 가로수가 색 잃은 잎을 모두 다 떨어낸 채 빈약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민재는 왠지 그 가로수가 자신의 머잖은 장래를 예증하는 무언의 메시지처럼 보였다.'그래. 계속 이러고는 못 살지 싶다. 이곳에서 달아날 수 있음 달아나고 싶다. 그러나 달아날 수가 없다. 아직은 그럴 수가 없었다.'민재는 도무지 정감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회색 풍경을 외면한 후 시트에 등을 기댄 채로 용호가 건네는 사진 몇 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누구야?”'“유동현과 사귀는 여자야.”'“그래? 가만. 이 여자, 유 회장 집에 있었던 간호사 아냐?”'민재는 여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가끔 유 회장 집을 방문할 때면, 호리호리한 몸매에다 웃으면 한쪽 볼에 보조개가 생기던 간호사와 눈인사를 나누곤 했었다. '“왜 아냐. 맞아. 이름은 이정미, 나이는 28세. 직업은 너도 알다시피 간호사. 가족은 아버지와 남동생. 아버지는 공직에 있다 퇴직해서 얼마 전 고향으로 내려갔고, 한 살 아래 남동생은 제대 후로 직장을 못 구해서 현재 놀고 있어.” '여자의 평범한 외모만큼이나 평범한 인적 사항이었다. 이런 여자가 어떻게 국내 기업 순위 30위 안에 드는 Y&K 그룹의 회장 아들, 유동현의 눈에 들었을까.'“형. 이런 여자라면 한때의 유희거나 어쩌면 그것마저도 아니거나 그럴 것 같은데?”'“그렇지는 않아. 유동현은 꽤 진지해. 사실은 유동현이 훨씬 더 많이 좋아해. 얼마 전 클럽에서 사고 친 거 말이야, 그게 이 여자 때문이었어. 클럽에서 취객 한 명이 이 여자한테 치근거리는 바람에, 막말로 뚜껑이 열렸던 거지.”'“그래? 둘이 사귄 지는 얼마나 됐지?”'“3년쯤. 유 회장이 뇌경색으로 쓰러졌을 때부터니까.”'이정미. 그녀라면 유동현을 죽을 만큼 괴롭고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을까? 3년이나 사귀었다면 슬슬 싫증이 날 때인데, 이 여자가 배신했다고 해서 유동현이 동민 형처럼 연인의 배신에 괴로워하다 끝내 죽음을 선택하게 될까? 아니, 적어도 죽을 만큼 고통스럽기는 할까?'“유 회장은 유동현이 이 여자하고 사귀는 줄 모르나 본데, 알면 충격 받을까?”'“그렇지 않겠어? 유 회장과 박 회장의 골프 회동이 부쩍 잦아진 이유야 빤하니까. 아마 유 회장이 두 사람의 교제 사실을 알게 되는 날에는 부자지간에 고함이 오가고 난리도 아닐걸?”'“그럴까? 그렇게만 된다면야…….”'민재는 부디 그러길 바랐다. 동현을 괴롭히는 것은 곧 유 회장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유 회장에게 치명타를 입힐 여러 요소들 중, 외아들인 동현만큼 위력적인 것은 없었기에.'민재는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뜯어봤다. 조금 긴 생머리에, 가늘게 쌍꺼풀이 진 눈이나 적당히 솟은 콧대에 동글동글 복스러운 코끝, 흔히 말하는 젖살이 아직까지 빠지지 않아 통통한 두 볼과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입술, 거기다 입 옆에 있는 볼우물까지. 여자는 20대 후반의 성인이라기보다는 이제 막 여물기 시작하는 앳되고 귀여운 여고생 같은 외모였다.'“훗, 유동현이 귀여운 여자를 좋아하나 보군. 어쨌든 이 여자를 당분간은 계속 지켜보는 게 좋겠어. 그러다 보면 이 여자가 유동현에게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지 확실히 알아질 테고, 잘만 하면 이 여자를 이용해서 부자지간에 분란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민재의 결론에 동의하며 용호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차가 무서운 기세로 멈춰 섰다.'“야! 똑바로 못해?”'용호는 간 기사를 매섭게 질책했다.'“미안혀! 어떤 정신 빠진 놈이 저 죽는 줄도 모르고 기냥 뛰어드는 겨? 썩을 놈!”'간 기사는 욕을 하며 차에서 부리나케 내렸다.'“사고 난 것 같은데?”'웬 작고 빼빼 마른 남자가 간 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괜찮은지를 묻는 간 기사의 물음에 대답하느라 머리를 가볍게 끄덕이던 남자는 바지 주머니에서 빨간색 꽃무늬가 나염된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감쌌다. 남자가 갖고 다니기엔 어울리지 않는 손수건이었다. 거기다 유난히 하얀 피부를 더욱 하얗게 보이게끔 만드는 짙은 회색 양복도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민재는 남자의 어색한 옷차림을 살피다 무릎 위에 놓인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뾰족하게 각이 진 외모에다 차갑고 매서운 눈빛을 가진 동현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여자의 귀엽고 앳된 얼굴.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는 그의 입가에 어느 순간 느긋한 웃음이 맴돌았다.''정미는 Y&K 그룹 본사의 지하 주차장 입구 쪽으로 달려가는 검정색 세단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안도했다.'“휴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행여 지각할까 마음이 급했던 나머지, 위험한 줄 알면서도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려는 찰나에 무모하게 길을 건넜다. 그러다가 우회전해서 들어오던 차와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말았다. 다행히도 손바닥이 약간 까진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몰라 사고 차량의 기사에게서 연락처를 받아 두었다.'“도대체 몇 층이야?”'정미는 한껏 목을 젖혀야 꼭대기 층을 확인할 수 있는 Y&K 본사 건물에 기가 눌려 저도 모르게 짙은 한숨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애써 ‘아자!’를 외쳤다. '사원증을 목에 건 다음 당당하게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회전문을 밀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내 꿀꺽하고 마른침을 삼켰다.'과연 내가 일주일을 무사히 버틸 수 있을까? 아니, 못 버텨!'정미는 혼자 묻고 혼자 답했다. 바깥과는 공기부터가 다른 건물 안에 들어서던 순간, 방금 전까지 ‘아자!’를 외쳤던 호기 따위는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정민이 자식 때문에 내가 이게 무슨 짓이람? 아무튼 이 자식 오기만 해. 내가 가만 안 둘 거니까. 그런데 기사들 대기실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가만, 그전에 우선 화장실부터 가고 보자.”'정미는 아랫배가 터지기 일보 직전임을 그제야 감지했다.'“어머! 여기 여자 화장실이에요!”'습관대로 여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가 여자들의 앙칼진 목소리와 따가운 눈총에 화들짝 놀라 황망히 뒷걸음을 쳤다. 그렇지만 여자들이 자신을 남자로 오해한 것이 만족스러워 빙그레 웃었다.'검은 모자 팻말이 붙은 남자 화장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터질 것 같은 아랫배를 부여잡고 아무 칸에나 들어갔다. 한결 가볍고 시원해진 여유를 느낄쯤, 진동으로 해둔 휴대폰이 주머니 속에서 부르르 제 몸을 떨었다. 발신자는 원수 같은 동생 정민이었다.'“야! 이정민, 이 나쁜 자식아!”'정미는 냅다 욕부터 끌어 퍼부었다.'“너, 좋게 말할 때 당장 와라!”'-안 돼, 그건. 미안해, 누나.'“나한테 미안하다고 해서 될 일이니, 이게? 동현 씨한테 내 입장이 뭐가 되냐고. 미치겠다, 진짜!”'-미안해. 사정 얘기 좀 잘 해줘.'“사정이 사정 같아야 말을 하지, 경품으로 받은 공짜 여행 가느라고 출근을 못한다는 말을 하라고? 그것도 출근하기로 한 첫날? 앓느니 죽지. 언제 오는 거야?”'-일주일 후에.'“일주일 후면 꼭 와야 해! 너 때문에 내가 일 년치 휴가를 미리 냈어. 알기나 해?”'-뭐?'“못 알아들어? 너 대신 내가 운전한단 말이야.”'-말도 안 돼! 누나 장롱 면허잖아? 그만둬!'“그만두란 말은 잘하지? 나도 그러고 싶은데, 너 소개한 죄로 동현 씨 체면 깎일까 봐 염려도 되고, 또 난 나대로 철없는 너 때문에 동현 씨 볼 면목이 없고 해서 그럴 순 없어. 아무튼 너 일주일 후면 무조건 와야 해! 그만 끊자. 이러다 정말 지각하겠어.”'정미는 정민의 말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남자 옷 단추 구멍이 여자 옷이랑 반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거 막상 입으니까 되게 어색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