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은 소낙비가 내린 뒤의 눅눅한 습기와 해묵은 먼지 때문에 숨을 쉬기가 버거웠고, 암실을 방불케 하는 두터운 어둠 때문에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도 가늠되지 않았다. '손전등만 있었어도 이렇게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어둠 속에서 헤매지는 않았을 텐데. 담을 넘자마자 맞닥뜨린 쥐새끼 때문에 놀라 자빠지면서 손전등을 잃어버린 것이 새삼 뼈에 사무쳤다. '“분명히 이 어디쯤이었는데.”'낮에 봤던 기억대로라면 현관에서 들어와 열 발자국 가량 걸은 이 어디쯤에 분명 욕실로 들어가는 문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앞을 더듬어도 손은 그저 허공만을 맴돌 뿐이다. 아무래도 마루로 올라서며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았다. 낭패다!'수정은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아무리 미향이 꼬드겼어도 귀를 기울이지 말았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가뜩이나 쪼그라든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조여 왔다.''점심시간, 미향은 수정의 곁으로 다가와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수정아, 너 본 적 없지?”'“뭘?”'“네 미래의 남편 얼굴.”'미향의 묻는 말에 수정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본 적이 없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그렇게 묻는 미향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난 봤다!”'수정은 미향의 말은 거짓말일 게 빤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금세 ‘어떻게?’라고 물었다.'“간단해. 너희 동네 흉가 있지?”'“공원집?”'“어, 바로 그 집! 밤 12시에 그 집으로 들어가는 거야.”'“밤 12시에?”'“그렇다니까. 시간을 잘 지켜야 해. 아니면 효력이 없거든. 아무튼 그 집 욕실로 들어가서 벽에 걸린 거울을 보는 거야. 참! 칼을 꼭 가져가.”'“칼?”'들으면 들을수록 신빙성이라고는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미향이 들려주는 말에 완전히 빠져들었다.'“칼을 입에 물고 머리를 있는 대로 풀어헤쳐. 마치 네가 귀신인 것처럼. 그리고는 거울을 보면서 주문을 말하는 거야. 거울아, 거울아, 내 남편이 보고 싶구나. 제발 보여 다오!”'“말도 안 돼!”'“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해보면 될 거 아냐?”'“네 말만 믿고 그런 짓을 하면 내가 바보천치다.”'“대신 듣고도 안 하면 겁쟁이지.”'미향은 겁쟁이라는 말로 수정을 자극하며 부추겼고, 그것도 모자라 ‘수정이가 오늘 밤에 남편 얼굴 보러 흉가에 간대. 대단하지?’라며 반 아이들에게 공개적으로 떠벌리기까지 했었다.''‘그러거나 말거나 한 귀로 흘려들을 걸. 쓸데없이 오기 부린다고 기어이 여길 오다니. 바보천치!’'수정은 앞으로 걸어가지도 뒤돌아 나가지도 못한 채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꼼짝 않고 있으려니 신경만 갈수록 예민해져, 뜰에 쌓인 먼지가 날리는 소리까지 모조리 다 들릴 지경이다. 거기다 마당에 휘도는 으스스한 바람소리와 무성한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사는 새들의 구슬픈 울음소리까지도. '“으! 이러고 있다가는 내가 내 명대로 못 살지.”'수정은 연신 오싹 오싹 소름이 돋았다. 금방이라도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아 머리끝이 쭈뼛 서고 등줄기에서는 땀이 삐질 거렸다. 침조차 넘어가지 않았고, 너무 용을 쓰며 버틴 탓인지 장딴지에서 쥐가 나려 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이대로 돌아가면 겁쟁이라고 놀림을 당하겠지만 할 수 없어. 일단 내가 살고 봐야지!’'수정은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라면 제 아무리 담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자신처럼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애써 자위하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천천히 몸을 틀었다. '컴컴한 어둠을 더듬거리며 겨우 몇 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발밑에서 무언가 뭉클한 게 밟혔고, 숨이 꼴깍 넘어가게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정체불명의 그것이 그녀의 발목을 콱 움켜쥐었다. '오. 마이. 갓!''“귀, 귀신이면, 물, 물러가고. 사람, 사람이면, 정체를 바, 밝혀라.”'장우는 자신에게 발목을 잡힌 여자가 하는 말에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이런 기절초풍할 상황에 무슨 정신이 있어 이런 말을 중얼거리는지. 여자의 반응이 웃기면서도 조금은 놀라웠다. 비록 모기 소리보다 작은 데다 놀란 나머지 호흡이 흐트러져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여자는 적어도 기절을 하지는 않았다. '‘제법 강단은 있네. 대체 누구냐, 넌?’'장우는 여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하지만 불쑥 일어서지 않았다. 혹시 그랬다간 여자가 정말 기절할지도 모르니까.'“귀, 귀신이면, 물러 가, 가고, 사람이면 정체를 밝히라니까.”'장우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탓인지, 여자는 여전히 바들바들 떨며 혼잣말처럼 아주 작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훅, 흑. 흐으.”'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숨쉬기 버거운 듯 힘겹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장우는 그제야 여자가 울고 있음을 알아챘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누워 있던 자신을 밟은 여자를 그저 조금 골려주려던 게, 어처구니없게도 울리는 일이 되고 말았다. 장우는 우는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지금이라도 잡은 발을 놓아주고 사과를 해야 하나? 아니면 조용히 손을 풀고 잠자코 지금처럼 누워 있어야 하나? 당최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울먹임이 커지는 여자를 봐서라도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몇 초 후, 단단히 옥죄었던 손을 슬그머니 풀었다. '‘뭐하는 거야? 왜 가만히 있지?’'장우는 발목만 놓아주면 여자가 그 길로 달아날 줄 알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여자는 선 자리에서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여자의 울음이 어느새 멈췄다. 장우는 어둠에 가린 여자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있는 대로 귀를 세웠다. '번쩍!'아주 짧은 찰나! 어둠 속에서 서늘한 빛이 발했다. 장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의 눈에 보이는 번쩍임은 분명 칼이었다. 그것도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부엌에서나 쓸 법한 식도!''수정은 어떤 수를 쓰든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정체가 귀신이 아님을 안 이상, 무기력하게 울고만 있을 수 없었다.'‘다행이 내 잠바 안쪽 주머니엔 칼이 있어!’'수정은 제발 칼을 써야 하는 최악의 순간만은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그리고는 칼을 감싸고 있던 손수건을 조심스레 풀었다. 정신을 바짝 곤두세운 때문인지 캄캄한 어둠에도 불구하고 어렴풋하게나마 눈앞이 밝아지는 듯했다. 덕분에 처음보다는 떠는 정도도 덜해졌고, 까무룩 기절할 것처럼 호흡이 어지럽지도 않았다. '‘네놈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난 무조건 칼을 휘두를 거야. 어차피 이판사판 공사판이니까!’'상대가 남자라고 추측했다. 아니 남자가 확실했다. 발목을 잡던 손아귀의 힘도 그렇고, 이 야밤에 흉가에 들어와 넉살 좋게 누워 있을 정도의 담력을 가진 자라면 남자임에 분명했다. 아마도 갈 곳 없는 부랑자거나, 동네 양아치거나, 그도 아니면 죄를 짓고 숨어 다니는 범죄자일 것이다. '부랑자, 양아치, 범죄자라니! '다시금 가슴이 옥죄이면서 오금이 저렸다. 놈의 정체가 무엇이든, 자신이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인 자들이었다.'‘싹싹 빌면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볼까? 아니면 내가 먼저 이 칼로 콱!’'수정은 자신이 점점 미쳐간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사람을 먼저 찌를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상상 밖의 일이 지금 버젓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왜 꼼짝을 않지?’'수정은 놈이 발목을 놓아주던 순간, 금세 덤벼들 줄 알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놈은 죽은 듯이 누워만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긴장감이 갈수록 어마어마한 무게로 커져만 갔다. 머잖아 그 무게에 짓눌려 제풀에 고꾸라지고도 남을 만큼. '문득, 놈이 자신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고 잠자코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놈이 변덕을 부리기 전에 냉큼 여길 나가야 했다. '수정은 슬금슬금 게걸음을 옮겼다. 칼이 마치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라도 되는 양, 혹은 악귀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십자가라도 되는 양, 가슴 가운데에다 두 손으로 모아 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