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매운 게 시집살이라고 했지만, 가유는 그깟 매운 시집살이 자신만 잘하고 노력하면 문제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시우 역시 가유면 어디서나 예쁨 받을 거라며 용기를 북돋아주었고 솔직히 잘 할 자신도 있었다. 가장 모범적인 딸인 자신이 유찬과 동거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부모님이 얼마나 실망하실지 알고 있었지만, 사람 눈에 콩깍지가 씌였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이보다 더 큰 대형사고가 있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이게 결혼으로 가는 출발점이라면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시작해도 나쁘지 않다며 자신을 위로했다. 그래서인지 처음 동거한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와 달리 두려움은 많이 가신 상태였다. 무엇보다 홀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누군가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인생의 반려자가 생겼다는 것이 꼭 그리 나쁘지만도 않았다. '“나한테 대답 잘하는 며느리 하라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다른 건 몰라도 너도 알다시피 난 굽실대는 며느리는 못해.”'“어이쿠, 바라지도 않네요.”'그의 말에 찌릿하고 노려보자 유찬은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런 그가 얄미워 일어서는데 재빨리 손을 잡았다.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 그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전염되어왔다.'“너는 진담 농담도 구분 못 해?”'“네 말 속에 뼈가 있었거든.”'“눈치 챘어?”'“당연하지.”'자신의 대답에 그가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처음에 봤을 때 싸가지 없이 굴면서 사람 은근히 무시하는 것 같더니, 실제로 사귀어보고 살면서 그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유머도 많았고 애교도 잘 부렸다. 가끔 애교부리는 문제로 골을 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나이 더 먹은 자신이 애교 부리면 이상하지 않겠냐는 말에 그래도 좋으니 한번만 부려보라고 했지만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날 좋아하실까?”'가유가 너무 자주 물으니 짜증이 나는지 숫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실 얼마 전부터 그의 부모님이 무엇을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까지 메모를 하면서 나름대로 요리법까지 터득해놓았다. 더욱이 유현이나 유진과는 친했기 때문에 그들이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더욱 그녀에게 큰 힘이 된 것은 자신에게 아군이 있다는 점이었다. 두 형제는 누구보다 자신을 지켜 줄 거라 약속까지 한 상태였다.'“우리 마누라는 뭐든 잘해서 우리 엄마가 너무 좋아할 거야. 나중에 제대해서 나오면 엄마가 나보다 널 좋아하면 어떡하지?”'“에이, 설마…….”'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만 노력하면 누구보다 귀여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나름대로 그의 어머니 마음에 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유찬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 자신이 귀여움을 받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네 말 듣고 있으면 어머님이 무조건 날 좋아할 것 같아.”'“당연하지. 이 세상에 널 예쁘게 안 봐주면 우리 엄마가 누굴 예쁘게 봐주겠어?”'사랑스럽다는 듯 유찬이 자신을 꼭 끌어안았다. 입대한다는 말에 처음에는 눈물만 나왔다.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생소한 감정이었다. 한동안은 패닉 상태에 빠져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한 발자국 떨어져 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았다. 그가 자신보다 두 살 어리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유찬을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제대하면 바로 결혼식 올리자.”'“칫, 돈도 못 벌면서. 결혼식은 무슨…….”'“제대하면 공부하면서 돈 벌 거야.”'“아휴, 기특한 우리 남편. 군대 간다고 하더니 벌써 어른이 다 되어버렸네.”'엉덩이를 툭툭 치며 다독거리자, 이게 한술 더 뜬다. 어리광을 부리며 안아달라는 몸짓을 하자 가유가 징그럽다며 뒤로 물러섰고 이때다 싶었는지 유찬은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따스한 품안의 온기가 자신에게 전해져 온 순간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2년 정도면 되는데 마치 먼 길을 보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든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제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머리를 쓰다듬는가 싶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기다릴 거지?”'“음.”'그동안 그가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알고 있었다. 조금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찾고, 귀가시간에서 1분만 지나치면 휴대전화에 불이 날 정도였다. 2년을 결코 짧은 시간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막상 보고 싶을 때 바로 보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유찬아.”'“어.”'“나…… 너 없는데 잘 할 수 있을까? 미움 받으면 어떡하지.”'“송가유, 나이 헛먹었어. 누가 널 미워해? 아버지 얘기는 했잖아, 그냥 그러려니 해야 돼. 괜히 심기 건들려서 마음 고생하지 말고 힘들면 엄마한테 말하면 다 들어주실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자꾸 이러면 내가 너무 불안하잖아.”'“너를 생각하는 것처럼 날 생각해주실까?”'그의 말을 백 퍼센트 믿을 수 없었지만, 가끔 부모님에 대해 얘기할 때면 조 사장에 대해선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정말 가족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아버지와 난 살(殺)이 끼었나봐.’'유찬이 하나하나 읊어주는 것을 그동안 꼼꼼하게 기록해놓았고 싫어하는 일만 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엄마가 나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어. 그런 것 있잖아, 왜 내가 이렇게 된 게 다 엄마 탓이라고. 사실 누구의 탓이라고 하기도 그래. 대부분은…….”'그는 뭔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의 말속에서 아픔을 느꼈다. 그는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지나가는 투로 아버지와는 장난 한번 쳐본 적이 없다고 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유찬이 자신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찬아.”'“내가 또 괜히 우울하게 만들었네.”'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은 채 정수리에 턱을 가져다대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서로를 위로하던 손길에 따스함이 시간이 흐르면서 기묘한 공기로 바뀌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이게 아닌데. 마음은 그런데,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와 살을 맞대고 살고 있지만, 남녀관계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탓에 어색할 때가 많아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이자 갈라진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하자.”'“지…… 지금? 아직 날 환하단 말이야.”'“그러면 어때. 영화나 텔레비전에 봐도 날 환해도 잘만 하던데. 나 내일 모레면 이제 군대 간단 말이야. 고무신 거꾸로 신으면 어떡해. 네 몸에 조유찬 것이라고 도장을 찍을 수도 없고 그래서 내 흔적을 남길 거야.”'가끔 자신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강한 소유욕을 드러내곤 했다. 그의 말에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태연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며 말했다.'“지금껏 남긴 걸로도 충분하거든.”'“너는 충분해도 난 아니란 말이야.”'이럴 때는 어린애가 따로 없었다. 보채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큭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려고 하자 입안의 속살을 살짝 물었다.'“가유야…… 하자……. 으응…… 제발…….”'마지못해 입술을 삐죽 내밀자, 유찬은 무슨 커다란 상을 받은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표정과 달리, 그의 입술은 진한 커피 위에 있는 휘핑크림을 단숨에 먹을까, 아니면 천천히 티스푼으로 떠먹을까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흐트러진 숨결이 귓가로 파고들었다.'“확 먹어버릴까 보다.”'일부러 시간을 끄는 소리에 막혔던 기도 속으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그의 입술이 간질이듯 조심스러우면서 한없이 부드러웠다. 마른 대지 위에 촉촉하게 내리는 빗줄기처럼 몸의 신경들이 음악을 타듯 그의 손길에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감긴 눈 사이로 자잘한 움직임이 보였다. 초록 이파리 위에 내려앉은 물방울이 이슬이 되어 전신을 적시며 간질이기 시작했다.'“…… 아…….”'이파리를 타고 또르륵 내려가는 이슬이 바닥에 닿는 순간 톡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맞춰 달콤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파닥파닥 날개짓을 배우는 새의 몸짓처럼 목의 맥박이 요란스럽게 뛰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은 신기한 악기 같다며 유찬은 맥박 치는 목덜미에 혀끝을 댔다. 뜨거운 불길이 장작에 불이 붙기 시작하더니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머릿속이 피아노의 건반이 되어 음악에 맞춰 몸이 저절로 열렸다.'“유…….”'바닥에 몸이 눕혀지고 셔츠의 단추가 풀렸다. 하얀 속살이 드러나고 열에 들뜬 눈동자가 말간 눈동자를 뚫어져라 살피더니 땀방울이 맺혀있는 이마를 간질이는 바람이 훅 하고 불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검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치우더니 날개짓을 배우는 아기새의 부드러운 깃처럼 그의 입술이 와 닿았다. 새로운 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흥분이 얕은 입맞춤으로 희미해져 갔다. '희미한 소리. 그게 자신이 내는 소리라는 것을 느낀 순간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두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와 보낸 시간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는데……. 잠시도 떨어지기 싫은 마음이 눈동자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그의 따스한 음성이 가슴 안으로 퍼져나갔다.'“송가유…… 사랑해.”'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폭풍처럼 전신을 휘감아왔다. 사랑이라는 말 한 마디에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것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태초의 남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촉촉이 젖어드는 여성에 그의 숨결이 느껴졌고 육중한 몸이 자신 위로 겹쳐졌다. 대지가 모든 생물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녀는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활짝 열어젖혔다. 마른 대지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대지는 그걸 마음껏 흡입했다. 자신의 내부 깊숙이 들어온 그의 분신을 느낀 순간, 억제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잔잔한 산들바람이 몸을 간질이더니 태풍이 되어 몸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하아…….”'대지는 기다렸다는 듯 모든 것을 품어냈고 하늘이 주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잔물결이 거대한 파도처럼 위에서 아래로, 구석구석 모든 곳을 헤집고 다녔다. 귓가에서 머릿속에서 눌러왔던 불꽃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펑펑 터지기 시작했다.'“가유야…… 아…….”'그의 사랑은 자신을 향해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면 자신의 사랑은 숨기고 감추기에 바빴다.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고 하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 넣은 수많은 핑크빛 하트를 그리며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었다. 사랑한다…… 유찬은 자신이 송가유가 그의 생명이라고 했다.'“유찬아.”'“잊지 마. 지금의 느낌, 시간, 숨결, 네 안에 내가 있다는 것.”'잠시 몸이 위로 들리는가 싶더니 찌를 것 같은 눈빛을 자신에게 고정시켰다. 뚝하고 떨어지던 물방울이 얼룩을 만들었고 모든 것을 적셔버렸다. 잊힌 두려움이 다시 자신 안으로 검은 먹구름처럼 몰려오자 그에게 몸을 밀착시켰다.'“사랑해.”'“뭐?”'“사랑해. 조유찬…… 이 나쁜 자식아, 널 사랑한다고!”'가슴의 고동이 멈추더니 들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웃음소리가 집 안에 가득 찼다.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 가끔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한번 툭 뱉어내기는 했지만 이렇게 외치듯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몸이 으스러져라 끌어안는 그의 품에 안겼고 폭발할 것 같은 키스가 이어졌다.'“송가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입대 선물을 확실하게 받았어.”''내일…… 내일이 오는 게 이렇게 두렵고 무서웠던 적이 없었다. 시간을 붙잡는 것이 가능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아두고 싶었다. 품안에 잠든 채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는 가유를 한참동안 내려다보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외출 준비를 한 뒤 힐끔 한 번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맞춤을 하고 말았다.'“으…… 음…….”'몸을 뒤척이자 본능이 시킨 것처럼 몸을 다독이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금방 갔다 올게.”'집 밖으로 나온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시간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급하게 가야하는데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가 입대하기 전까지 그녀 곁에 있고 싶었다. 나직한 한숨,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 가유와 자신이 동거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차 여사는 장난을 쳐도 정도껏 하라고 했다. 그리고 한참을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에 설마 하는 눈으로 동생들과 자신을 보았다. 두 사람이 동거했던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씩이나 되었는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했다.'“네 아버지가 아시면 너하고 나, 둘 다 죽는 거라는 것 몰라서 그래? 당장 정리해.”'못 들은 걸로 하겠다며 자신의 말은 더 이상 듣지 않으려 했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아들과 함께 사는 여자를 만나자고 해야 하는 게 우선인데 그렇지 않았다. 가유에 대한 얘기는 모조리 거짓말인 줄 알고 있었다.'“난 인정 못한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처음에는 자신을 달랬고, 나중에는 화를 내었다. 하다하다 안 되니까 결국은 협박까지 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고집을 꺾지 않으려 않았다.'“그 사람은 제 아내에요.”'“아내? 아주 조그만 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내가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이제 하다하다 별짓을 다하는구나. 너희 아버지, 네가 사고 치고 다녀도 지금까지 왜 아무 소리 안 하고 해결해줬는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절 위해서 그랬다고 하지 마세요. 스스로 체면 때문에 그랬다는 것 다 아니까.”'다그치는 자신의 음성에 놀란 듯 차 여사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왜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게 되었는지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쩜 평생 가슴 한쪽에 두어야 할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불량학생은 아니었다. 공부도 남 못지않게 했었고 언젠가는 최고가 될 수 있을 거란 희망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만족시켜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내버렸다.'“그래서 기어이 그 아이를 집으로 데려오겠다고?”'“네.”'확신에 찬 답변에 차 여사는 기겁을 했고 희숙은 말도 안 된다며 소리를 내 질렀다. 희숙의 딸인 사촌 동생은 그렇지 않아도 남자들만 있어 심심했다며 빨리 봤으면 했다. 차 여사를 놀라게 한 것은 유진과 유현 역시 가유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에 더욱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들 삼 형제가 모두 자신의 편이라 생각했던 차 여사가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을 몰랐다.'“너 절대 네 아버지 설득 못해.”'“많이…… 아주 많이 좋아해요. 가유하고 있으면 편해요. 그 전에는 내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요. 내가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깨닫게 돼요. 좋아하는 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가유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요.”'처음 보는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차 여사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애정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많은 것을 자신과 했던 분이었다. 그런 분에게 실망을 안겨드렸다는 것은 알지만 감정은 누가 뭐라 해도 막을 수 없었다.'“살면서 사람을 좋아할 수 있어.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야. 무엇보다 반대하는 결혼은 웬만하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여자가 너보다 나이가 많다면서? 그것 하나만 봐도 결코 순수한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어.”'“내가 거짓말 했어요. 나이 어린 남자는 상대조차 안하는 걸 알고 속였어요.”'그만큼 자신은 그녀와 사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감정을 설명해야 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가유를 오직 자신만의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왜 가유를 소개시키지 않았는지 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게 꽁꽁 감춰두고만 싶었다. 자신이 동거를 한다는 것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의 변화를 가장 빨리 눈치 챈 것은 동생들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조 사장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아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오피스텔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다. 자주 들르던 자신이 오지 않자 동생들은 불시에 오피스텔을 습격했다. 미쳤다고 했다. 자신 역시 그 말에 백 퍼센트 공감했다. 송가유란 여자한테 미쳐 있었다.'“아직 네 나이도 있고, 하여튼 안 돼.”'차 여사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떨어져 있다 보면 마음이 정리가 될지도 몰랐다. 혹시 자신의 마음이 변하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걱정하지 말라 가유가 말했다. 변할 일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자신이 제대할 때까지 본가에서 가유를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지금껏 물건이든 사람이든 한 번도 집착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가유한테는 그게 되지 않았다. 기다린다고 했지만 혹시 그녀가 자신을 떠날까봐 그게 가장 두려웠다. 가유를 잃는 것은 자신의 인생이 사라져버린 것과 같은 의미였다.'‘내 부모님한테 가 있을게.’'‘안 돼! 남동생이 유학 갔다면서? 너도 대학 졸업하면 유학 간다고 했잖아.’'‘안 갈 거야.’'입대를 나중으로 미룰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어차피 갈 것 빨리 갔다 오고 싶었다. 그녀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에 그는 그녀의 집도 아닌, 바로 자신의 집에 있으라고 하자, 가유는 너 혹시 미친 것 아니냐며 물었을 정도였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부탁 같은 것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를 설득하는 일은 자신에게 피가 마르는 시간과도 같았다. 가유를 설득했지만, 그 다음은 자신의 부모님이었다. 가유보다는 심리적으로 부담이 덜 되었다.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충분히 알았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습니다.”'자신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뉴스만 보고 있는 것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자신의 말을 들었지만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반응을 보일 줄 몰랐다. 다시 한 번 얘기를 꺼내자 그제야 이상했는지 자신을 보았다.'“그래서?”'“제대하고 결혼…….”'“미친놈!”'큰 소리도 아니었다. 기가 막혀할 뿐 놀라는 표정은 아니었다. 네가 사고 친 게 어디 한두 번이냐,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같은 늘 일어난 일에 대한 보고를 받는 것처럼 담담한 모습을 보여주는 조 사장을 보며 그는 순간 뒤돌아 나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하다하다 이제 별짓을 다하는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여자는 안 된다!”'재고할 가치도 없다며 딱 잘라버렸다. 보고 있던 텔레비전을 끄더니 그대로 서재로 향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 있는 자신을 불안한 듯 바라보는 세 쌍의 시선이 얼굴에 와 닿았다. 순간적으로 포기하고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잠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허락을 받아야 했다. 어차피 이 집은 자신의 것이 아닌, 바로 아버지인 조 사장의 집이었다. 서재로 따라 들어가려는 그를 제지한 것은 차 여사였다.'“나중에 하자. 괜히 아버지 화나게 하지 말고.”'“오늘이 아니면 안 돼요.”'“유찬아.”'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그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서재로 향했다. 장부를 보고 있던 조 사장은 서재 안으로 들어오는 자신을 싸늘하게 보더니 보고 있던 장부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도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냐. 아랫도리 단속 잘 하라고, 잘못하면 자신의 인생을 말아먹는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했다. 그런데 뭐? 여자!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마. 그쪽에서 얼마를 달라고 하는지 당장 알아봐.”'“그런 사람 아닙니다.”'똑 부러지는 그의 대답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난생처음 다른 것도 아닌 여자 문제를 말씀드리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해주지 않는 것이 내심 서운했다. 이제 한번쯤 아들인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어도 좋을 텐데. 이 문제뿐 아니라 다른 문제 때문에 서운함을 느꼈던 적도 있었다. 이제와 그걸 말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깊게 숨을 몰아쉬며 자세로 바로 한 뒤 시선을 떼지 않고 응시했다.'“제대할 때까지 집에 있게 해주세요.”'“지금……. 허허. 기가 막히는구나. 내가 순순히, 그래 그렇게 해라 그럴 줄 알았냐? 어림없는 소리, 너는 내가 정한 혼처가 있으니까…….”'“제 인생입니다. 아버지 인생이 아니고!”'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책이 날아오더니 이마를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끈한 열기가 달아올랐고 뜨끈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돈으로 해결해.”'“그런 문제가 아니라고요!”'자신의 진심을 이렇게까지 짓밟아야 하냐고 되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공허함이 전신을 에워쌌다.'“저 가유 포기 안 해요. 못한다고요. 이번만큼은 아버지가 양보해주세요.”'“임신했구나.”'기가 막혔다. 자신이 고집 부리는 이유가 그것밖에 없다는 듯 단정 짓는 말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식을 그렇게 모르냐는 말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언제나 한 가지 감정이었다. 지금껏 자신에 대해선 다른 감정은 일절 무시해버렸다. 젊은 남녀가 한때의 불꽃놀이에 미쳤기 때문이라면서 화를 냈다. 불꽃은 한순간은 아름답지만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니, 빨리 마음을 잡으라고 했다. 무슨 말을 해도 진심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자 맥이 빠졌다.'“아버지 기준으로 더 이상 절 평가하지 마세요.”'“후회할 짓은 하지 않는 게 좋다.”'“제가 후회할 거라고 확신하세요?”'조 사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판단이 옳은 것 같지만 나이가 들면 어른들 말을 듣지 않는 것에 대해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이니 책임지는 것도 스스로 하겠다고 하자 조 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가유에 대해 얘기해도 며느리로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며 서슬 퍼런 목소리로 꾸짖었다. '그날 그렇게 말없이 듣기만 했다. 어쩌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가족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았고, 자신밖에 모른다고 해도 좋았다. 그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조유찬 자신의 부모님과 함께 있는 것을 간절히 원했고 원하는 대로 그녀를 설득했다.'‘너, 진짜 나쁜 놈이야. 어떻게 너도 없는 집에 날…….’'‘아내는 남편 집에서 사는 거야.’'‘내가 어쩌다 너 같이 어린놈한테 넘어갔는지 모르겠다.’'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말을 했지만 서운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결정이 내려진 순간, 그는 가유에게 집안의 모든 것을 설명했고 차 여사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알려주었다. 물론 처음부터 쉬울 거란 생각은 안했다. 하지만 눈치도 빠르고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능력도 있어 금방 적응해 귀여움을 차지할 거라고 생각했다. 무조건 안 된다고 했던 조 사장 역시 조 회장의 명령이 있었으니 함부로 못할 거라 생각했다. '본가에 들어가면 부모님뿐 아니라 가유하고도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오늘 밖에서 차 여사를 보기로 했다. 자신 때문에 속상해하고 있는 것도 알기에 기분도 풀어드리고 가유를 잘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차 여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엄마.”'“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쁜 녀석.”'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따스한 편은 아니었다. 평소답지 않게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며 살랑거리자 조금씩 화가 풀리는 게 보였다. 원래 성격이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지는 못하지만 차 여사의 비위만큼은 누구보다 잘 맞출 자신이 있었다. 한참동안 말없이 듣고 있는가 싶더니 물었다.'“너 언제 그렇게 수다쟁이가 된 거야?”'자신이 무슨 말을 많이 하는 지도 모른 채 주절거리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였다.'“가유와 살면서부터.”'대답이 적잖이 서운했는지 금방 얼굴색이 변했다. 사실이었고 굳이 가유에 대한 감정을 감추고 싶지 않았다. 남극의 기온보다 더 차갑게 내려가는 곳이 바로 본가였다. 동생들과 재미있게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조 사장만 집에 들어오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거의 꿈같은 얘기였다. 생각해보니 집은 언제나 차갑기만 했지 따뜻했던 기억이 없었다.'“가유는 이상하게도 말이 없는 나도 말을 많이 하게 만들어. 그 작은 입으로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는지……. 엄마하고 얘기하다 보니까 갑자기 가유가 막 보고 싶다.”'“조유찬!”'사납게 부르는 차 여사의 음성에 놀라 바라보자 어머니가 기막힌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사태평이라는 둥 지금 자신은 조마조마 해 주겠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가유 얘기만 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딱히 다른 할 말이 없다는 말에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내가 믿을 사람 엄마밖에 없다는 것 알고 있잖아.”'“몰라.”'“에이, 그러지 말고. 나 군대 가고 없어도 가유 잘 부탁해.”'“뭐가 예뻐서? 그리고 그런 애하고 살고 있으면 진즉 얘기했어야지.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은 어디서 배웠어? 정말 난 네가 내 아들인지 의심스럽다. 솔직히 지금은 내가 널 낳고 뭐 하러 미역국을 먹었나 싶다.”'충격도 충격이지만,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배신감이 더 크다는 것을 유찬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일어나버린 일을 없는 일로 할 수는 없었다.'“내가 왜 그런지 알잖아.”'만약 조 사장이 그와 가유가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 처음부터 반대에 부딪쳤을 것이다. 다른 여자였다면 상황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가유만큼은 그런 일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려서 여자 보는 눈이 없다며 자신들의 기준으로 평가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감출 수밖에 없었다.'“잘 해줄 거죠?”'잽싸게 차 여사 곁으로 다가가 팔짱을 끼며 눈동자에 마구 하트를 넣어 부탁하자 그런 자신의 표정에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을 쳤다. 부모님은 그와 가유가 함께 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반대하신 분이었다.'“어떤 애인지도 모르는데 처음부터 좋아할 수 없어. 하는 것 봐서.”'“가유는 정말 잘 할 거야. 평생 그만한 여자 못 만날 것 같아요. 제가 여자 보는 눈이 까다롭다는 것, 엄마가 더 잘 아시잖아요. 알뜰하지, 애교…… 아니다, 그건 좀 못하지만. 엄마는 내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죠?”'차 여사는 그의 물음에 답변이 없었다. 사실 그가 가유와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부터 조 사장은 냉담하다 못해 유찬을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살갑거나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눈빛은 주고받았는데 가유로 인해 상황이 훨씬 더 악화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유찬은 자신에 대한 미움이 혹시라도 가유에게 불이익을 줄까 그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그것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싶었다.'“엄마가 도와주세요. 그러셨잖아요, 엄마 마음 알아주는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가유라면 누구보다 엄마 마음 잘 헤아려줄 거예요.”'“그걸 어떻게 장담해?”'“내가 이래 뵈도 사람 보는 눈은 있잖아요.”'아들인 유찬이 좋아하는 여자이고 이미 둘이 살림까지 했다니까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는 유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까 화도 났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지금이야 녀석의 비위를 맞추는 게 우선이라는 것을 알았다.'“네 여자한테 잘해주면 엄마한테는 뭘 해줄 건데?”'“평생 효도.”'아주 마음에 드는 선물에 자신도 모르게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알았다.”'“고마워요. 여태 엄마 속 썩인 것, 나중에 제대해서 가유와 잘 사는 걸로 갚을게요. 혹시라도 엄마와 가유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난 엄마 편을 들 거라고 약속해요.”'“당연히 그래야지.”'처음에 왔을 때의 딱딱하고 화났던 모습은 사라졌다. 유찬은 안도감이 전신에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활짝 웃었다. 앞으로 가유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만큼 차 여사에 대한 그의 믿음은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가장 사랑하는 분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해도 그의 편은 차 여사와 두 동생뿐이었다. 젊은이의 꿈이 아름다운 이유는 언젠가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라고 했다. 유찬은 가유가 그의 가족에게 낯선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이 부모님에게도 통할 거라는 단순함에서 시작된 믿음이 그의 모든 것을 산산이 깨트릴 거란 상상을 그는 하지 못했다.'''일장'이장'삼장'사장'오장'육장'칠장'팔장'구장'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