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 미안해요.

― 뭐가?

― 실은 집 떠나기 전에 눈 파란 사람 소문 들은 일 있어요. 잔칫집에 저승사자가 나타났다고.

― ……왜 내게 숨긴 게요?

― 말해줬으면 더 일찍 떠났을 거잖아요. 그래 그랬어요. 몸도 성치 않은 사람 길 나설까 봐.

― …….

― 오늘 품 팔았던 집에서는 다른 이야길 들었어요. 도적 누명을 쓸 뻔했다 합디다. 여기서 멀지 않은 데라던데.

― 고맙소.

― 화내는 게 아니고?

― 아니오. 고맙소. 진심이오.

유안이 명하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위험을 감수하며 사람 많은 곳에 나다니는 모양이 자기를 알아봐 달라는 듯 보였다. 대낮이고 큰길가였다.

처음에는 설마 했다. 삿갓을 비스듬하게 들어 올리며 기연가미연가 오래 쳐다보았으나 찌푸린 얼굴에 깐깐해 보이는 인상은 분명 명하였다. 다만 세 발짝 정도 뒤에 따라다니는 낯모르는 여인이 확신을 흐리게 만들 뿐이었다.

“거리를 충분히 두고 저를 따라오십시오.”

지나치며 조용히 말을 건네자 상대가 화들짝 놀라는 게 느껴졌다. 유안은 돌아보지 않고 저벅저벅 걸었다. 두 사람도 더 이상 티를 내지 않고 그가 걷는 대로 따라왔다.

어디로 가나.

그는 망설였다. 홍자단의 집에 데려가는 것은 지나친 폐가 될 터였다. 그러나 길에서 대화하는 건 위험했다. 그리고 예하를 오라비와 만나게 해주어야 하였다. 그녀는 명하로부터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나는 이렇게 자단을 이용해 먹기만 하는구나.’

자조했지만 달리 도리가 없기에 결국 그는 홍자단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삿갓 아래로 쓴웃음이 떠올랐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다지도 명확한 권력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홍자단은 그를 향해, 그는 예하를 향해,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만을 위해 일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누이의 상봉은 눈물겹고 절절했다. 예하는 오라비의 마른 뺨을 쓸며 북받쳐 울었고, 명하는 누이의 거칠어진 손이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살아 있으니 다행이다,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기쁨의 속삭임이 오히려 서글프고 더 애절했다. 혼자일 때는 내일 일만 근심하던 두 사람이었으나 피붙이를 만나자 모든 것이 백배는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저희는 자리를 비켜 드릴 테니 깊은 대화 나누십시오. 부인께서는 저와 함께 가시어 좀 쉬시면 좋겠습니다.”

눈치 빠른 자단이, 민우상 공의 무사 소식만 명하에게 전하고는 그의 동행을 데리고 사라져 주었다.

유안은 잠시 망설였다. 나도 비켜야 하는가.

그때 명하가 그를 향해 말했다.

“너도 모두 들어야 할 이야기다. 좀 앉아라.”

몇 달 만에 본 명하는 상당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유안은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을까 잠깐 생각했다. 생전 처음 경험한 고된 방랑인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인가, 혹은 존재감 희미하게 그를 따라다니는 저 여인 때문인가.

명하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는 이야기. 반은 공감하고 반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얼마 전이었더라면 핏대를 세우고 꺼냈을 이야기를 이제는 침착하게 두 사람에게 해 줄 수 있었다.

“선선왕이신 효종 임금 때 청과 나선이 국경인 흑룡강변에서 부딪친 사건이 있었다. 그때 임금께서는 두 차례에 걸쳐 조총수들을 파병하셨고 그걸 나선정벌이라고 부른다.”

이야기의 시작은 뜻밖이었다.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나 세자 책봉을 둘러싼 중전과 희빈의 갈등이 아닌, 뜬금없는 먼 나라 옛이야기에 예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산술 스승이던 상인이 그들에게 해 주었던 것과 같은 이야기였고, 그녀는 유안처럼 푸른 눈을 가진 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만 기억했던 흑룡강이 의외의 맥락에서 다시 거론되는 것에 놀랐다.

“일은, 그 조총수 중 한 명이, 죽이려고 했던 나선 병사로부터 목숨을 살려 주면 자기네 군자금을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받은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선은 상당한 부를 자랑하는 나라로, 부동항을 확보하겠다는 의욕에 꽤 많은 금을 청국으로 유입하여 감춰 두었다는 거였지. 의심쩍어 하면서도 조총수는 그를 살려 놓았고 병사는 약속대로 금을 그에게 건넸다. 하지만 일개 군사가 금을 가지고 귀국하는 건 가능하지 않았다.”

명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조총수는 꽤 신중한 사람이었던 모양으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금을 숨긴 후 조선으로 돌아와 당시 임금의 심복이었던 모(某) 대감에게 은밀히 사건의 전말을 아뢰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곧바로 주상께 전해지게 되었다. 임금은 흥분했다. 나선이 청을 공략하는 데 쓸 정도의 군자금이라면 우리가 북벌에 쓸 만한 분량이리라, 그는 기뻐하며 금을 국내로 반입할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금은 그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표면상으로 함께 북벌을 꿈꾸는 서인들이 속으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알아 버린 임금은 함부로 금을 내돌리지 않으려고 경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