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잊지 않았어?”
“청아야.”
“왜 잊지 않고서 다시 나타나. 나 아주 잘 살고 있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 흔들지 마. 너와 할 말 없어. 그냥 가 줘, 이대로.”
청아는 매몰차게 말을 내뱉고서 그를 스쳐 지나갔다. 순간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립지 않으면 가.”
온통 몸에 힘을 준 채 걸어가던 청아의 눈동자가 물결쳤다. 정민의 그 강렬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1초가 1년 같지 않으면, 하루가 10년 같지 않으면 가라.”
약한 듯, 부드러우면서도 한없이 강한 그의 목소리는 그래서 더 청아의 마음을 흔들곤 했었다. 특히 그녀의 안으로 들어 올 때 그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억눌린 소리들에 그녀는 심장이 미친 듯 뛰곤 했었다. 그렇게나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립지 않으면 가라고 한다. 그리움이 산처럼 쌓이고 쌓여 이제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는데, 차라리 기억하지 말자고 누르는 데만도 하루가 모자란 그녀에게, 그립지 않으면 가라고 한다.
청아는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어깨를 바들바들 떨며 두 손으로 얼굴을 묻은 채 결국 울고 말았다. 정민이 천천히 다가와 등 뒤에 섰다. 그의 느낌을 무서우리만치 선명하게 기억하는 그녀의 몸이 벌써 미친 듯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의 감각적인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그렇게 부드러운 힘은 잠시, 앙상한 어깨를 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그녀의 몸을 홱 돌려 가슴에 안아 버렸다.
“배신자다.”
억누른 듯한 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와 청아의 귓불을 적셨다.
“정민아!”
청아는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사고 이후 그의 허리가 조금 줄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든든한 몸이었는데, 커다란 키 뿐 그의 몸이 말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슴이 한없이 아릿했다.
“왜 이렇게 말랐어.”
청아는 그의 가슴에 기댄 채 눈물을 토해냈다. 정민이 청아의 뺨에 더운 입김을 뿜어가며 그녀의 뒷머리를 어루만졌다.
“넌, 더 말랐어. 가여워 미치겠다.”
“왜, 왔어. 그냥 내버려 두고 너대로 살지. 그렇게 살지.”
그의 무모함이 미웠다. 그렇게 하나밖에 알지 못하는 그의 융통성 없는 성격이 정말정말 미웠다. 너무나도 미웠다. 그러나 사실은 그래 주어서 고마운 것을.
“살 수 없다는 걸 몰라? 안 된다는 걸?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 하루하루 견디기 힘들었어. 오로지 너, 너를 다시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났는데, 네가 사라져서 차라리 다시 죽고 싶었던 걸 너는 모르지.”
청아의 목을 끌어안은 정민의 한 팔에 힘이 들어갔다. 주기적으로 한없이 떨리던 팔, 이제는 그녀를 안아야 하기 때문에 질 수 없었다. 그 어떤 것에도 질 수 없었다. 포기하기에 그는 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은은한 불빛이 두 사람의 나신을 감쌌다. 청아는 그의 벗은 몸을 보며,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훑어 내려가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단단하게 굳어 있는 근육, 그러나 너무나 많이 남겨진 채 아물지 않는 수술의 흔적들과 상처들.
“바보 같아. 넌, 바보야.”